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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동작경찰서. 2006년까지는 노량진경찰서였다.
▲ 동작경찰서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동작경찰서. 2006년까지는 노량진경찰서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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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역 광장 맞은편에 있는 동작경찰서는 2006년까지 노량진경찰서였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이기는커녕 '민중을 향한 몽둥이' 역할을 하던 독재정권 시기 노량진경찰서는 동작구민, 특히 중앙대·숭실대생들에게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중대생들의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에 맞선 노량진경찰서

1990년 5월 29일부터 노량진경찰서 입구에서는 중앙대생들의 연좌농성과 경찰의 강경진압이 반복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특이한 광경은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이 전날 노량진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대학가에서 동료 학생의 연행에 대하여 끈질기고 거세게 항의시위를 벌이는 대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중앙대 학생들은 노량진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화염병시위·평화행진 등을 병행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무려 119명이 연행되는 상황에서도 '총학생회장 구출-전대협 사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핵심 전술은 학과별로 돌아가면서 노량진경찰서 앞 연좌농성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들이 머리채를 잡히고 뺨을 맞는 일까지 발생하자 지나가던 시민들은 경찰에 심한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노량진경찰서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중앙대 학생들의 시위에 강공으로 맞선다. 화염병으로 맞서는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구속으로 대응하고, 연좌농성이나 평화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전원연행으로 맞선다.

노량진경찰서는 경찰서 입구에서 농성하던 중앙대 학생들을 29일에는 69명, 30일에는 25명을 연행하는 등 무려 119명을 연행한다. 급기야 31일 새벽에는 중앙대 학생들이 노량진경찰서 정문초소에 화염병까지 던지는 일로 비화하자, 박진용 학생 등 2명을 '화염병 사용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연행하여 구속하기도 한다.

이때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항의시위와 경찰의 연행·구속이라는 악순환이 무려 다섯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한다.('학생회 간부 구출-강경 진압 악순환', 한겨레신문, 1990. 6. 2) 
 
노량진경찰서가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을 구속하면서 시작된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은 구출작전과 강경진압이라는 악순환을 5차례나 반복했다.
▲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을 보도한 한겨레신문(1990. 6. 2) 노량진경찰서가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을 구속하면서 시작된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은 구출작전과 강경진압이라는 악순환을 5차례나 반복했다.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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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서 난동을 부린 노량진경찰서 사복 경찰들

이보다 며칠 전인 1990년 5월 24일에는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 200여 명이 숭실대 구내로 들어가 학생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건물 유리창 80여 장이 깨지고 교직원 승용차 3대를 부서지게 하는 등 한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찰은 시위 학생들이 건물로 달아나자 "교문에서 50m 떨어진 과학관으로 쫓아가 사과탄을 던져 넣으며 총장실 대형유리창 4장과 1층 로비의 거울과 괘종시계 등을 부수기도 했다".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의 이러한 난동은 하루 전에 이어 이틀째 계속됐다('전경, 숭실대서 난동', 동아일보, 1990. 5. 26).

사건의 발단은 5월 22일 수배 중이던 숭실대 학생 양재봉이 교문 앞에서 경찰에 강제 연행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곧바로 노량진경찰서 소속 백운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파출소 유리창이 깨지고 경찰 오토바이 2대가 불타자 경찰은 M16 공포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분이 가시지 않은 경찰은 다음날인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숭실대 교내로 진입하여 '난동'을 부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요한 당시 숭실대 총장이 직접 노량진경찰서를 방문해 한만석 서장에게 연행 학생 25명 전원을 석방하라는 요구와 함께 강력히 항의하는 일로 발전한다. 관할 경찰서장은 "기물파손의 95%는 학생들이 한 짓"이라고 거짓 해명한다. 여론이 들끓자 치안본부마저 자체 감찰팀을 동원하여 노량진경찰서를 감찰하겠다고 나서며 사태를 무마한다.

당시 노량진경찰서가 숭실대에서 보여준 보복테러를 벌이는 듯한 행태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 본연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이는 공권력을 가장하여 '공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조폭 집단의 모습에 어울렸다.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이 보여준 숭실대 난동 사건은 마치 조폭집단의 보복테러 행태와 비슷했다.
▲ <전경, 숭실대서 난동>(동아일보, 1990. 5. 25)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이 보여준 숭실대 난동 사건은 마치 조폭집단의 보복테러 행태와 비슷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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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한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

노량진경찰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6년 영등포경찰서에서 분리돼 만들어졌고, 지금의 자리에는 1967년 건물을 신축하면서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노량진경찰서는 출범과 함께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경찰서가 시작된 지 불과 몇 개월도 안 되는 1967년 2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여성 인권 유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158명의 원생들이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노량진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출동하는데, 이들이 휘두른 곤봉에 윤아무개씨와 장아무개씨 등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집단탈출 소동-시립부녀보호소원생들', 경향신문, 1967. 2. 9).

이후에도 노량진경찰서는 1970년에는 235명의 집단탈출을 주도한 황아무개씨를 비롯한 9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등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나서기보다는 외히려 이를 덮는 데 경찰력을 동원하고 행사한다.
   
노량진경찰서는 여성 인권침해의 상징적인 장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출동하여 서울시의 인권침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집단탈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1967. 2. 9) 노량진경찰서는 여성 인권침해의 상징적인 장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출동하여 서울시의 인권침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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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관할구역에 있던 중앙대와 숭실대, 총신대 학생들을 상대로 더 자주 일어났다.

1971년 10월 16일 새벽 이인근 등 중앙대 학생 4명을 시위주동 혐의로 연행해 5일 만에 석방했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만 따져도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은 1973년 숭전대(숭실대의 당시 이름) 학생 600여 명의 반유신투쟁을 진압하면서 최경열 등 3명을 연행한 일, 1974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김철웅 등 중앙대 학생 3명을 연행하여 구류에 처한 일, 1975년 중앙대생 2명과 숭전대생 2명을 연행한 일 등 계속 됐다. 매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대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적으로 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 때에 그 도를 더한다.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중앙대, 숭전대, 총신대 학생들의 헌신적 활동은 1980년 9월 개강과 함께 채플시간에 계엄해제와 독재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숭실대 학생들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노량진경찰서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대학생들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시위주동 학생들을 잇달아 연행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맞선다.

1981년 3월 23일 중앙대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유인물 배포하며 교내시위를 주도한 박문수, 김증래, 오춘성 등 3명의 학생을 구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7일 마찬가지로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박영권과 이상 등 2명을 구속한 일, 1982년 9월 도서관 4층에서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면서 밧줄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이근원과 임재선 등 2명을 구속한 일, 같은 해 11월 교내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김연명을 구속한 일도 다 노량진경찰서가 한 일이다.

1983년부터는 시위가 더 자주 발생함에 따라 구속자도 급증했다. 숭전대에서는 교내시위를 주도한 김상림과 최성남 등 2명(3월), 소유진, 윤석호, 윤성환 등 3명(6월), 배정섭, 배영환 등 2명(11월), 함지호, 이기원, 박재국 등 3명(11월)이 잇달아 구속된다. 중앙대생들도 교내시위를 주도한 윤민탁, 박수일 등 2명(5월)과 이도형, 김민수 등 2명(6월), 기형노, 배정미 등 2명(10월)이 잇달아 구속됐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동작지구당사 앞에서 '독재타도'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전두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14명도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3명) 또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같은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숭전대 조혜란 학생도 노량진 육교 위에서 다시 시위를 벌이다 노량진경찰서에 연행돼 구속됐다.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신대방동에 있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원풍모방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데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국모방 시절이던 1972년부터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노량진경찰서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맡아 방용석과 정상범 등 노조 간부 2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노량진경찰서는 관할구역에 있던 대표적인 민주노조 원풍모방 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 한국모방 노조간부 구속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72. 9. 6) 노량진경찰서는 관할구역에 있던 대표적인 민주노조 원풍모방 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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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 남부경찰서가 새로 생기면서 원풍모방 노조의 관할이 바뀐 관계로 한동안 잠잠했던 노량진경찰서는 1982년에는 검찰과 안기부, 보안사와 구청, 노동부 등 관계자와 함께 '동작구 지역 공동 대책회의'(4. 19)와 '확대지역 노동대책회의'(동작구와 영등포구, 7. 9)에 이종석 당시 노량진경찰서장이 잇달아 참석하여 원풍모방 노조 와해 방안 마련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6년 '신길동 가두투쟁'과 노량진경찰서

노량진경찰서는 연행된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1986년 당시 대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해 전태일 열사 26주기 '신길동 가두시위'(11. 13)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는 보름 전에 있었던 건대사건(10.28)으로 무려 1276명의 대학생이 구속된 직후였음에도 1000여 명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시위는 장시간 격렬하게 진행돼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큰 충격을 줬다. 더군다나 이들은 전두환 군사정권과 타협해 추진하는 개헌을 기만이라고 규정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민족민주헌법을 제정하자'는 급진적 주장을 내세웠다.  

이에 치안본부로부터 사전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까지 당하자 노량진경찰서는 연행한 학생들을 구타하는 등 보복성 가혹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이 '신길동 가두시위'로 현장에서 연행된 대학생과 노동자 40명 중 37명을 포함하여 총 48명이 구속됐다.
 
노량진경찰서는 '신길동 가두시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를 당하자 연행된 노동자와 대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기도 하면서 무려 48명을 구속한다.
▲ 1986년 "신길동 가두시위"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1. 14) 노량진경찰서는 "신길동 가두시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를 당하자 연행된 노동자와 대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기도 하면서 무려 48명을 구속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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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경찰서 → 동작경찰서, 이름 바꿨지만...

노량진경찰서는 2006년 동작경찰서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독재정권 시기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한 과거의 유산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적으로, 최근 노량진수산시장 사태에서 수협 측의 강제 철거 시도와 이에 맞서는 시장 상인 간에 발생한 여러 폭력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동작경찰서가 일방적으로 수협의 편을 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동작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와 기자회견, 대중 집회까지 열면서 "동작경찰서는 편파수사를 중단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은 집회를 통해 "동작경찰서가 편파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동작경찰서 앞 집회 장면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은 집회를 통해 "동작경찰서가 편파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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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량진경찰서의 편파수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2016년 겨울 이수역 7번 출구 노점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구청의 노점상에 대한 집단감금, 집단폭력 사건에서도 나왔다. 노점상 한 명이 노점상 철거과정에서 철거에 동원된 용역에게 집단감금, 집단폭행 당했다고 고소한 사건에 대해 처음 경찰은 '혐의 없음'으로 처리했다가 검사의 재수사 요구에 직면해 일부 용역의 폭력 혐의를 확인해 검사에 보고하지만, 동작구청의 '교사' 여부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수사로 일관하다 결국 '혐의 없음' 처리했던 것이다.     

촛불혁명의 결과 정권이 교체되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할 수밖에 없다. 적폐청산은 역시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자동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동작경찰서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동작경찰서가 이제라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부응하여 '권력이나 자본의 하수인'이 아니라 진정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길 다시 한 번 소망해본다. 

* 이어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⑫(노량진길 5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노량진길, #노량진경찰서, #동작경찰서, #대학생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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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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