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른도감> 포스터.

영화 <어른도감>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열네 살 경언(이재인 분)은 아빠를 잃고 혼자가 된다. 장례식 때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삼촌이라는 하는 재민(엄태구 분), 장례 이후 절차를 하나하나 도와준다. 그러면서 조의금이니 보험금이니 하는 것들을 넌지시 물어본다. 경언은 똑부러지게 대처한다. 경언은 그가 어딘지 못마땅하고 못 미덥다. 

미성년의 나이로 혼자가 된 경언, 재민은 후견인이 되어준다는 명목으로 경언의 집에 들어앉는다. 그러다가 아빠의 죽음으로 남겨진 보험금 8000만 원을 재민이 가져갔다는 걸 알게 된다. 끈질긴 추적 끝에 재민을 추궁하지만 이미 어딘가에 몽땅 다 써버린 상태이다. 이에 재민은 우연히 알게 된 경언의 연기력(?)을 보고, 함께 '제비'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한다.

작업 대상은 4층짜리 건물주 싱글 약사 점희(서정연 분), 일명 철벽녀다. 재민은 조심스레 접근해보지만 번번이 막히고 만다. 그런 그녀가 왜인지 '딸' 경언에게는 반응을 보인다. 아빠와 딸로 위장한 재민과 경언은 본격적으로 점희를 공략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한다. 이 아이 같은 어른 재민과 어른 같은 아이 경언의 앞날은 어떨까. 

안정과 편안함을 앞세운 독립영화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오랜만에 폭력 없이 코믹하고 예쁜 독립영화, 신파 없이 감동 어린 영화를 보았다. 탄탄한 기본기에 막무가내로 밀어넣는 사회적 개인적 메시지 없이 자연스레 느끼고 잔잔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의미들의 향연이 신선하고 이채롭다. 

<어른도감>은 영화적 해석을 위해 또는 연출이나 각본을 되새기기 위해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특유의 안정과 편안함을 즐기기 위해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은 영화이다.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함과 별다를 것 없는 익숙함을 앞세운 이 영화는 담백함과 잔잔함 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즐길 만한 게 없을 것 같은 와중에 '잘 봤다'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된다면, 어느 면에서도 빠지지 않는 만듦새가 한 몫 하는 것이리라. 

여러 단편을 통해 경쟁력을 입증한 김인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새삼 당연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극을 이끄는 세 주인공 엄태구, 이재인, 서정연 배우의 안정감과 탄탄함은 완벽에 가깝다. 

외로운 이들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롭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경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경언의 삼촌(이라고 하는) 재민 또한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합쳐 작업을 하려는 점희도 싱글이다.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외로움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가 이들을 사연 있는 외톨이로 그려낸다. 이들 셋은 아이와 어른을 오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평범하다고 하는 아이와 어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경언은 어른 같은 아이다. 아빠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빠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어른 같았을 것이다. 그 아빠에 그 동생이라고, 재민은 아이 같은 어른이다. 형의 장례식 때 십수 년 만에 경언 앞에 나타난 모양새부터 어딘가 꺼림칙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경언과 재민은 극명하게 갈리는 캐릭터다. 그래서 입체적이진 않다. 반면 점희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첫 인상이지만 재민과 경언의 '작업(?)' 장면에서는 허당기 어린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경언과 이어지는 아픈 과거도 등장한다. 아이 같은 모습과 어른 같은 모습이 공존하는 그녀가 진짜 어른이 아닐까. 

쌓는 작업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영화 <어른도감>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진짜 어른'은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저 시간이 흐르도록 놔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시간을, 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만 그나마 어른 비슷한 것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걸 '경험'이라고 부르면 맞을까. 베이컨에 따르면 인간 인식의 원천은 경험에 있다고 하는데, 경험이 쌓이듯 시간이 쌓이듯 무엇이든 쌓는 작업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무언가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언과 재민은 이제 같은 시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점점 다가갈 것이다. 부득이하게 있게 된 그 자리 말고, 그들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 그 자리가 비단 '아이 같은 아이' '어른 같은 어른'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어른이 되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어른 같은 아이'보다는 '아이 같은 아이'가, '아이 같은 어른'보다는 '어른 같은 어른'이 낫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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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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