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퇴근길, 집으로 가는 골목 양쪽에 자리한 분식점·반찬가게·피자·떡집 등은 내 오랜 단골가게다. 얼마 전 만두와 김밥을 만들어 팔던 가게 하나가 사라지고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도로변이나 큰 거리에 있던 편의점들이 동네의 작은 골목까지 들어서게 되면서, 작고 오래된 식당과 가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대형마트들이 동네 시장을 사라지게 했듯이.

'가게를 한다는 건 내가 들어갈 감옥을 짓는 것과 같다'는 말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새로 문 연 식당이 몇 달 만에 사라지거나, 다른 가게로 바뀌는 일은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 됐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하다가 노포라고 할 만한 오래된 가게 혹은 식당을 만나면 행운처럼 느껴져 꼭 들어가 보게 된다.

이 책 <노포의 장사법-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는 우리나라 곳곳에 숨은 '밥장사의 신'들을 찾아 장장 3년간 전국을 발로 뛴 '한국의 노포 탐사 보고서' 같은 책이다. 모두 평균 업력 54년의 가게들이다.

잡지사 기자에서 요리사가 된 '글 쓰는 셰프'로 잘 알려진 박찬일이 저자로, 주방에서 힘들게 일하는 동종업계 노동자로서의 애틋한 시선이 함께 담겨있다. 오래된 가게를 고포(古鋪)라 하지 않고, 사람처럼 늙은 가게 노포(老鋪)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자가 정의하는 노포란, 노포라고 하면 왠지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만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이 노포란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식당 음식이 맛있어서라고.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생존을 넘어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자 전설이 된 26곳 노포 이야기와 우직한 장사법이 흥미롭게 소개된다. 냉면, 횟집, 고깃집, 분식집, 포장마차까지 다양해 하나씩 찾아가고픈 미식여행서이기도 하다.
  
책 표지.
 책 표지.
ⓒ 인플루엔셜

관련사진보기

 
생존을 넘어 살아 있는 문화유산
 
'하루 단 500그릇만 파는' 서울의 하동관, '60년 전설의 면장'이 지키는 인천의 신일반점, '포장마차의 저력' 여수 41번집... 노포를 오래 취재하다 보니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이른바 '살아남는 집의 이유'다. 물론 맛은 기본이다. 운도 따라야 한다.

그 외에 가장 중요한 건 한결같음이다. 사소할 것 같은 재료 손질, 오직 전래의 기법대로 내는 일품의 맛, 거기에 손님들의 호응으로 생겨난 기묘한 연대감 같은 것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 서문

책을 읽다 보니 나만의 노포가 저절로 떠올랐다. 서울 남산에 갔다가 하산길에 꼭 들르게 되는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 장충동 태극당 빵집.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릴 때 저절로 발길이 머무는 행주산성 원조국수집. 고기와 진한 국물이 당길 때 가곤 하는 동네 대림시장 감자탕집. 모두 10년에서 20년이 넘게 다닌 곳들이다.

이 '늙은 가게'들의 장사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로 좁혀진다. 모두 단순한 메뉴와 우직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세와 유행에 민감하고 쏠림이 심한 나라에서 이런 미덕을 유지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시대와 트렌드에 뒤처진다는 초조함에 많은 식당들이 요즘 잘 팔리는 새로운 음식, 신상 메뉴로 바꾸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대를 이었으나 선대만 못한 맛과 태도에 취재를 포기한 집도 여러 곳이었단다.

이 책의 부제,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이 되는 지점이다. 노포들이 옛 맛을 고집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야 맛이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 이것은 국내외 노포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책 속에 나오는 유일한 외국 노포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오모니'라는 동포 식당의 주인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대와 똑같은 음식 맛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 노포.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 노포.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한 가지 일을 지속한다는 것의 위대함 
 
업력(業歷)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대다. 수많은 식당들이 간판에 'SINCE 19XX'를 써 붙이고, 전국의 노포 식당만 찾아다니는 식객들도 늘었다. 2017년 서울시는 오래된 가게들의 가치를 헤아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39곳의 노포를 '오래가게'라는 이름으로 지정한 바 있다. 바야흐로 '노포의 시대'라 할 만하다.

멀리 볼 줄 아는 노포의 뚝심은 종종 함께 오래 일하는 직원의 존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책 속 많은 노포에서 몇십 년씩 일하며 고희와 팔순을 넘긴 직원을 만날 수 있다. 정년이 한참 지난 이들을 끝까지 보듬으며, 서로 의지하며 간다.

서울식 불고기의 표준이라 할 한일관(1939년 창업)이 그렇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하나라는 조선옥(1937년 창업)도 그러하다. 일흔이 넘은 현역의 직원과 조리장들이 여전히 갈비를 굽고, 홀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자못 감동을 주기까지 했다.

맥주를 좋아한다면 책에도 나오는 서울 을지로 야장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을지오비베어는 꼭 한번 가봐야 할 노포다. 맛깔난 생맥주와 노가리 안주 맛으로 유명한 곳이다. 무엇보다 구순(九旬)이 다 되도록 매일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 가게 앞을 쓸고 직접 '디스펜서(생맥주를 공급하는 손잡이 장치)'를 잡고 '생활의 달인'처럼 정확하게 맥주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창업주다.

구도자 같은 경건한 태도, 참으로 악착같이 살았던 그의 삶은 한 가지 일을 지속한다는 것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노포의 장사법 -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인플루엔셜(주)(2018)


태그:#노포, #박찬일, #노포의장사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