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13 07:53최종 업데이트 18.09.14 14:18
광화문을 지나며 서촌 쪽을 바라보면 우람한 '인왕산(仁王山)'이 마을을 듬직하게 감싸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서울을 대표하는 산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는 '남산(南山)'이라 말한다. 이는 애국가 중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구절이 가져다준 오랜 학습 효과일지도 모른다.

현재 서울의 경계에서 남산이 중심부에 자리 잡은 형세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삶부터 생각하면 서울을 대표하는 산을 남산으로 보기는 어렵다. 여러 기록들을 보면 오히려 인왕산이 실제 국민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산 같은 느낌이 많다. 특히 예술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선시대 서울에 사는 화가들이 자연을 찾아 가장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산은 인왕산이었다. 이들이 세검정을 지나 북한산 등을 찾은 것도 인왕산을 찾던 발걸음과 같은 연장선상의 길이었다.

인왕산 자락을 가장 많이 그린 이는 단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정선의 불후의 명작 '인왕제색도', 리움 미술관 소장(국보 제216호) ⓒ 리움미술관


그는 인왕산 근처에 살며 인왕산을 소재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정선 이후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이인문(李寅文, 1745-?)도 자주 인왕산을 찾았으며, 김홍도의 절친 강희언(姜熙彦 1710-1784)도 인왕산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남기고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중인들의 시사 모임과 가까이 하며 인왕산에 자주 들렀으며, 김정희의 제자들인 유숙(劉淑), 전기(田琦), 유재소(劉在韶) 등도 인왕산과 북한산을 자주 찾았다. 예술가들이 그토록 인왕산을 자주 찾은 것은 산이 높지 않으면서도 넓어 오르기 좋고, 바위산이지만 근처에 물이 흘러 경치도 좋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산을 그린 실경산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정선이 인왕산의 비 개인 풍경을 그린 <인왕제색도>이다. <인왕제색도>는 화가인 정선 개인의 일생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 회화 중에서도 가장 회화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힐 만한 것이다.

그만큼 뛰어난 필력을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정선은 인왕산 자락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종로구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 쯤이 이 작품의 정확한 시선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규모 면에서도 일반 조선시대 작품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바위산을 웅혼한 필치로 그린 천하절품이다. 강한 필선을 주로 사용하여 바위를 그리면서도 솜씨가 무르익어 바위를 강한 듯 부드럽게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다. 먹의 번짐을 사용하여 비 개인 산의 바위의 질감과 나무의 모습을 잘 살려 그렸다.

바위산과 나무 사이에 흐르는 운무는 자칫 건조하기 쉬운 산 풍경을 촉촉하게 해주는 물기의 구실을 톡톡히 한다.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필선의 강약, 가는 선과 굵은 선, 거친 선과 윤기 있는 선의 조화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잘 구사되어 있는 명작이다.

북한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정선의 <인왕산>
 

조선미술박물관에 있는 정선의 그림 '인왕산' ⓒ 조선미술박물관

  
<인왕제색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며칠 전 느닷없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마침 독일 시민권자인 동생이 북경을 거쳐 북한을 16박 17일 동안 돌아보고 친정집에 들른 것이다. 평양과 개성 등 오래된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등 천하명산을 다 둘러보고 왔다.

미술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보통 부러운 일이 아니다. 미술공부를 하다보면 남북이 분단된 것이 얼마나 아쉽고 불편한 일인지를 자주 느끼게 된다. 지금은 북한이 되어 가볼 수 없는 곳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을 연구할 때나 북한의 박물관에 있는 작품을 보고 싶을 때 자주 속이 상한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미술 책 여러 권을 선물이라며 사왔다. 그 중에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미술품을 수록한 도록이 있다. 이 도록을 들춰보다 반가운 작품이 있어 쾌재를 부른다. 정선이 인왕산을 소재로 그린 <인왕산>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인왕산 소재의 그림과 다른 특별한 구도인 데다, <인왕제색도>의 우측만을 축소하여 그린 것 같은 느낌이라 새로워 더욱 반가웠다. 더욱이 이 그림은 그동안 한국미술사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라 반가움은 더했다.

이 작품은 백운동천 어느 한 곳에서 창의문 쪽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인왕산을 소재로 그린 다른 작품 중에서 보이지 않는 구도이다. 거친 듯하고 소략해 보이지만 산세의 맥을 정교하게 이해한 정선 특유의 필치가 잘 살아있다. 몇 번 안되는 붓질로 바위산의 강인한 인상을 그대로 실은 솜씨가 가히 대가의 풍모가 난다.

그림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면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강한 먹 선의 느낌만으로 웅장한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작가의 미덕이라 하겠다. 둥그렇게 흐르는 바위의 선에 율동감이 있고, 계곡 사이로 시선을 모으는 구도에서 회화적인 역동성이 느껴진다.

<인왕제색도>와 비슷한 구도의 새로운 작품 <인왕산>은 그동안 <인왕제색도>의 제작 배경에 대한 해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작품이라는 면에서 중요하다. 그동안 정선 연구의 권위자로 불리는 미술사학자 최완수는 <인왕제색도>를 연구하며 "1751년(辛未年) 윤달 하순(辛未 閏月 下浣)에 건강이 좋지 않던 절친한 벗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건강을 빌며 그린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오른 쪽에 있는 기와집은 '이병연의 집'이며, 이 작품은 임종을 코앞에 둔 육십 년 지기를 위하여 칠순 노인 정선이 혼심(魂心)을 다하여 그려낸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일견 낭만적이고 애틋해 멋져 보이나 현실과는 잘 부합하지 않는 면이 많다.

<인왕제색도>는 이러한 개인적인 소회를 담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평생 미술 세계를 정리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선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제작한 연대를 기록한 '기년작(紀年作)'이며,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대형 작품이다. 세로 72cm에 가로가 138cm나 되는 초대형 작품이다.

이 정도의 규모는 자신의 미술세계를 정리하는 의미에서나 그릴 수 있는 작품이지,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한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그리면, 작은 화면에 건강을 기원하는 소재를 그리고, 그 사연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지 아픈 친구를 위해 조선미술사에서 보기 어려운 크기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런 면에서 그림 오른 쪽에 있는 집을 이병연의 집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재고해야 한다. 이병연을 위해 그렸다는 전제 하에 이병연의 집이라 추정하였지만, 그림 속 구도를 보아서도 육상궁(현재의 칠궁) 위에 있었다는 이병연의 집이라는 것도 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더욱이 이 집의 모습이 유사한 구도의 다른 작품인 북한 소재 <인왕산>에서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화가 정선이 인왕산의 구조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미술적 구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집은 당시 인왕산 자락에 있었던 조선 중기 학자인 성수침(成守琛)이 살았던 청송당(聽松堂)과 같은 유명한 건물이었을지 모른다.

재평가 필요한 강희언의 <인왕산도>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의 신선한 화면, 개인 소장 ⓒ 강희언

인왕산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인왕제색도>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지만, 강희언의 <인왕산도>도 눈여겨보아야 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강희언은 정선과는 출신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매우 다른 입장에 있었던 작가이다. 정선이 매우 강인한 필치와 이지적인 지식 체계를 갖춘 이였다면, 강희언은 매우 섬세하고 서정적인 성향의 감성을 가진 미술가였다.

강희언의 <인왕산도>와 정선의 <인왕제색도> 두 작품은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나고, 두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시각 면에서 매우 다른 위치에 있다. 그러니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각각의 제작 의도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여야 한다.

<인왕산도>는 세로 24.6cm, 가로 42.6cm의 작은 그림이다. 조선시대 보기 드문 대형 작품인 <인왕제색도>와는 차이가 많다.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자세나 작품을 다루는 붓, 먹의 사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크기는 정선의 작품보다 훨씬 작지만 <인왕산도> 또한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서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인왕산도>의 우측 화제를 보면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고(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린 것이다. 작품의 제작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데에도 그동안 이 작품을 그린 도화동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의견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 작품의 시선을 언뜻 보면 멀리서 정면을 그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왼편으로는 점점 멀리 경관이 물러서고, 오른 쪽 창의문 넘어가는 길은 화면 앞으로 다가 서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작가의 위치는 오른 쪽 어느 부분이다. 그렇다면 창의문으로 오르는 길 앞쪽에 '도화동'이라는 곳이 있어야 한다. 마침 다행히 그 정도의 위치에 '도화동천(桃花洞川)'이란 곳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인왕산과 백악이 구분되는 곳에서 백악 쪽으로 오르면 대은암(大隱岩)이 있는데, 그 근처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도화동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도 그곳에 '도화동천'이라 새긴 각석이 있다. 강희언은 백운동천을 지나 이곳 도화동천에 올라 인왕산의 전경을 비스듬히 올려보며 구도를 잡았을 것이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그의 책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우리는 강희언의 <인왕산도>에서 늦은 봄의 평화로운 인왕산 전경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떠한 암시도 받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이 작품을 <인왕제색도>와 대척점에 두고 우열을 평가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오히려 좌측 위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평이 이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으로 느껴진다.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작품은 매번 지도와 너무 비슷해서 너무 무미건조한 점이 걱정이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충분히 사실적이면서 또한 화가의 여러 법식을 잃지 않았다(寫眞景者 每患似乎地圖 而此幅旣得十分逼眞 此不失畵家諸法 豹菴)"고 평하고 있다.

고지도 형식의 그림을 그렸음에도 회화적 본질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실제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인왕산의 전모를 다 담으려 지도처럼 골짜기를 빠뜨리지 않고 그리려 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세의 표현이나 음영의 처리, 먹의 운용 등 여러 회화적인 면을 놓치지 않고 잘 다루고 있다.

이러한 면은 강희언이 당시에 청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유행한 서양화법을 능숙하게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품이 작음에도 골짜기의 표현이 정교하고 원근이 잘 살아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면이다. 또한 푸른색으로 처리한 하늘의 표현은 다른 회화 그림에서는 보기 어려운 서양화법의 면모를 보여주는 신선한 면이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인 <북궐조무(北闕朝霧)>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원근 표현을 보면 이러한 서양화법의 면모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단순히 전통적 지도 회화 기법이라기보다는, 서구식 개념의 과학적 인식의 실경산수였을 것으로 높게 평가할 수도 있는 다른 세계의 것이다.

인왕산인 우석 황종하의 <호랑이>
 

민중의 수호신이 된 인왕산 호랑이 ⓒ 황종하

인왕산에는 자연을 즐기고 서화를 즐기는 등 예술적 향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습과는 상반된 또 다른 모습의 이중적 면모도 전한다. 다름 아닌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호환(虎患)'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영조 때에도 여러 번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상하게 했으며, 고종 때에는 경복궁에까지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호랑이의 대부분이 인왕산에서 내려온 것이라 한다.

이런 호환으로 유명하게 된 인왕산 호랑이는 사람들 사이에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론 신앙의 대상이 되어 점차 '벽사(辟邪, 귀신을 물리친다)'의 의미로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미술 현장에도 영향을 준다.

호환의 소문이 많을수록 호랑이 그림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호랑이를 그리는 작가들도 속속 등장하였다. 사실 호랑이는 단군 신화에 등장하고, 호랑이 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속에도 등장하는 등 오래 전부터 있었다. 조선시대 회화 중에도 호랑이가 자주 등장한다.

김홍도나 심사정(沈師正)의 호랑이 그림은 치밀한 필치로 극사실 화법에 가까운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이들의 뒤를 이어 김양기(金良驥), 이한철(李漢喆), 유숙 등도 호랑이 그림에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 호랑이 그림의 계보를 형성한다. 일제강점기가 되고 경복궁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다시 돌자 '인왕산 호랑이'라는 별명은 더욱 유명해진다. 그럴수록 호랑이 그림은 더욱 수요자가 늘어났다.

이런 호랑이 그림의 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한 미술이 바로 민화이다. 조선후기 민화에 호랑이를 소재로 한 것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벽사의 의미가 사회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상업적으로 호랑이를 그리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이름을 넣지 않고 그림을 그리던 민화 작가들 중에 어떤 이는 호랑이를 그리고 '인왕산인(仁王山人)'이라 서명을 하는 이까지 생겨났다. 사람들 사이에 '인왕산'이 호랑이의 대명사가 되자 호를 '인왕산인'이라 쓴 것이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이들 중에도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호랑이 화가'가 개성 출신의 우석(又石) 황종하(黃宗河, 1887~1954)이다. 그 또한 별호가 '인왕산인'이다. 그의 호랑이 그림은 생동감이 강해 많은 이들이 집의 수호신으로 집에 걸고 싶어했다.

황종하의 동생인 우청(又淸) 황성하(黃成河)도 호랑이를 잘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 유명하였다. 이들 외에도 호랑이 그림의 수요가 많아 여러 화가들이 생업을 위해 호랑이를 그렸다. 전북 출신의 소재(昭齋) 이상길(李相吉), 난곡(蘭谷) 서병갑(徐丙甲), 광주 출신으로 부산에서 활동한 소재(小齋) 유삼규(柳三圭) 등이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렇게 많은 호랑이 그림이 그려지고, 호랑이가 벽사의 의미로 사용되어가며, 인왕산은 점차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해졌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겨지며 이러한 종교적인 색채는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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