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로맨스엔 관심이 없다. 사랑하지만 안타깝게 헤어지고, 평생을 서로 그리워하면서 사는 사랑 이야기에 더 끌린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체실 비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그린다. 

젊은 역사학도인 에드워드(빌리 하울)와 재능 넘치는 바이올리니스트 플로렌스(시얼샤 로넌)는 서로 사랑하지만 오해와 성급함, 소통 부족, 이기심 등이 얽히면서 가장 행복해야 할 초야에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그들이 신혼여행을 온 체실 비치에서 일어나는 현재와 과거 연애 시절을 교차 편집하며 전개된다. 

<체실 비치에서>는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그의 앞선 작품 <속죄>도 <어톤먼트>(2007)로 영화화된 바 있는데, 이 작품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노스탤지어를 그렸듯 <체실 비치에서>도 같은 주제를 탐구하고 변주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 혹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이언 매큐언이 최근 작품에서 일관되게 천착해온 모티브다. 동시에 문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 마지막 부분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본문 197쪽, 문학동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이자 주제를 응축한 밀도 있는 문장이다. <체실 비치에서>의 연출을 맡은 도미닉 쿡 감독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치명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 순간이나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에 천착한다"고도 표현했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성에 대한 무지와 오해 속에 어처구니없이 헤어지고 만다. 그렇게 헤어지고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움과 후회 속에 산다. 에드워드는 바람 부는 체실 비치에서 플로렌스를 부를 수 있었고, 따라갈 수도 있었다. 설득할 수 있었고,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데엔 두 사람 다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 같다. 에드워드는 다혈질의 급한 성격이었고, 플로렌스는 결벽적이고 경솔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까지 겹쳤다. 둘 다 순진하고 소심하고 너무 진지했다. 영화에선 시대의 분위기도 둘의 선택과 파국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보수적인 시대의 끝자락이었던 1962년을 배경으로 삼았다. 자유와 해방, 낡은 관습과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한 새 시대가 목전에 와 있었는데 이들은 아직 낡은 가치에 얽매여 있었다.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가 전개될수록 젊은 연인의 운명에 감정이입하면서 안타까움이 짙어지지만, 개연성이 떨어지고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에드워드는 신혼여행 이후라도 신부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을 그가 몰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에서라면, 사랑하는 두 사람이 헤어질 이유가 없다. 사랑은 언제나 길을 찾기 때문이다. 진정한 애정과 신뢰가 있는 커플이라면 서로 대화하면서 오해를 풀 기회를 만들었을 것이고, 상대가 오해 속에 원망하고 괴로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디테일을 잘 살린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 흡인력이 강했던 전작 <어톤먼트>에 비하면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설득력이 떨어지고 다소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전작에선 누명과 전쟁이, 이 작품에선 미숙함, 소통 부족, 보수적 시대상이 젊은 연인을 갈라놓는 장해물로 기능했는데,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어톤먼트>에선 원작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시나리오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선 직접 각본을 집필하고 제작까지 참여했다. 보통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으면, 원작 작가가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예술이라며 불만족을 표시하는 일도 가끔 있지만, 이 작품은 작가가 각본은 물론 제작까지 참여하면서 작가의 의도가 영화 곳곳에 세심하게 잘 반영된 듯 보인다. 소설의 주제를 비롯, 여러 요소가 영화에 무리없이 잘 녹아들었다. 특히 결말 부분이 소설과 약간 다른데, 영화다운 에피소드이기에 기존 팬들이 저항감을 느끼기 보단 원작이 줬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200쪽 남짓의 중편소설을 영화화한지라 원작의 내용과 캐릭터 등이 축약 혹은 생략 없이 충실하게 잘 반영된 점도 소설팬들을 만족시키리라 본다.  

대신 소설의 심리 묘사와 깊은 성찰, 빛나는 문장은 배우의 연기, 미장센, 사운드 트랙 등으로 표현됐다. 영화는 소설처럼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기에 여타 다양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다.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어딘지 어색하고 설명적으로 보인다) 특히 배경과 구도, 인물과 사물의 배치, 의상, 소품 등을 통해 한 폭의 그림처럼 정성 들이고 신경 쓴 쇼트(shot)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플로렌스가 에드워드를 찾아오는 길고 먼 산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 부는 체실 비치 등이 그것이다. 영화의 포스터만 접해도 이 작품이 화폭을 연상시키는 쇼트가 많은 영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노예 12년>의 디피(DP·Director of Photography, 촬영과 조명을 함께 맡는 전문 스태프)였던 숀 밥빗이 촬영했다. 그는 <노예 12년>에서 미국 남부의 대자연을 무심한 듯 아름답게 담아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소설 속의 여러 장소를 찾아 가장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해냈다. 특히 '시대극'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필름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여전히 장르적 판단이나 작가의 미학과 선택, 영화의 톤에 따라 필름을 찾는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체실 비치에서>스틸컷.

<체실 비치에서>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이렇게 여러 요소를 활용해 1960년대 초의 분위기를 살리고 끌어올린다. 이 영화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음악'과 '의상'이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장면마다 음악이 자주 사용됐는데, 여주인공이 바이올리니스트로 설정된 것답게 현악 소나타가 화면을 온통 휘감는다. 이것이 영화의 분위기와 격을 살리고 높인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엔 록음악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는데, 이것은 시대와 가치의 변화를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또 플로렌스가 입었던 우아한 원피스와 카디건, 신혼여행에서 입었던 짙은 블루색 투피스, 에드워드가 아무렇게나 걸쳤던 낡고, 크고, 우스꽝스러운 옷들은 시대를 반영하고, 그들의 캐릭터와 사회적 위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더 나아가 앞날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작가와 원작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애초에 연출자로 이안 감독이나 샘 멘데스 감독이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한데 낙점을 받은 것은 영국의 연극 연출가인 도미닉 쿡이었다. 그는 연극 연출뿐 아니라 영화 편집기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화 편집 일을 한 경험도 있고, BBC 드라마를 한 편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연출을 해 본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견이지만 실력은 있되, 영화 경력은 많지 않은 감독을 일부러 찾은 것 같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이 연출을 맡으면, 영화가 잘 나올 순 있겠지만 독자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원작 작가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 감독과 작가가 기싸움을 벌이면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는 좀 더 이언 매큐언의 세계와 의지에 기울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20일 개봉. 러닝타임 110분. 15세 이상 관람가.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체실비치에서 시얼샤로넌 빌리하울 이언매큐언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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