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비포 선라이즈> 영화 포스터

<비포 선라이즈> 영화 포스터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여행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우연은 운명이 되고, 사소한 찰나가 소중한 추억으로 각인되는, 기차나 버스, 비행기에 타는 순간부터 내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을까? 기대 반, 걱정 반. 혹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처럼 특별한 만남이 내게도 오지 않을까? 대부분 실망으로 끝나는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인 상상.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을 해 보았을 상상이다.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 서로의 눈빛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인 순간들이지만 가끔 드물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우리의 눈길이 깊게 들어가게 되는 때가 있다. 기차에서 말다툼하는 커플을 피해 자리를 옮긴 셀린을 향한 제시의 눈길처럼.

그의 눈길은 카메라의 줌인과 함께 셀린에게 한발 다가가고 그가 들이마신 호흡은 그녀에게 한마디 건넬 용기를 준다. 다행히 제시의 한 마디는 적절한 타이밍에 나왔고 셀린은 그의 용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의 말에 한 마디를 더 얹어서 건넨다.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대화는 이기는 데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공을 주고받는 데에만 관심 있는 테니스 선수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이 날 줄을 모른다.

관객이 제시와 셀린의 이야기에 열광한 이유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비포 선라이즈>가 개봉했을 때, 두 주인공의 대화로만 가득한 영화에 관객들은 처음엔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풋풋하고 예쁜 두 청춘의 하룻밤에 빠져들었고 후에 시리즈로 나온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도 충성도를 보이며 제시와 셀린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국적도 성별도 다른 두 사람이 낯선 장소에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모습은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서 교감하는 즐거움을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었다. 또 제시와 셀린의 인연이 정말 (흔히 보아왔던 로맨스)영화처럼 계속되기를 응원하게 만들었다.

두 주인공의 자연스럽고 지적인 대화가 관객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분명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매력에 있을 것이다. 단지 연기를 잘해서라 아니라 이들의 대사가 마치 인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인데, 실제로 감독은 이들 배우의 생각을 대사에 반영했으며 이후 시리즈에서는 두 배우가 작가로서 시나리오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0년, 20년이 지났다고 치자. 너는 결혼을 했고, 그 결혼 생활이 예전만큼 재밌지는 않아. 그래서 남편을 탓하면서 예전에 만난 남자들을 떠올리는 거야. 그때 그 남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면서.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바로 나야."

제시의 이 말에 셀린은 그를 따라 기차에서 내린다. 아무리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 해도 셀린이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계획에 없던 일탈을 하는 것에 관객이 설득당할 것인가의 문제는 셀린이 그에게 설득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었다. 그러나 제시의 대사는 성공적이었고 극적인 전개 없이도 영화적 판타지를 더하며 영화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은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비포 선라이즈>에는 인상적인 대사들이 참 많다. 그만큼 대사의 양이 방대한데 영화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대사들 중에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완성된 대사가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이야기 전개를 위한 대사가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사는 일상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삶과 사랑에 대한 주인공들의 고민은 결국 일상과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 이들에게 주어진 하룻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대화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공간이 변하면 그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당연히 바뀌게 마련이지만 그 흐름이 배경에 크게 지배받지는 않는다. 비엔나가 아니라 프라하, 혹은 로마였어도 영화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만난 연극배우들, 카페에서 만난 손금 읽어주는 여자, 거리에서 춤을 추는 댄서, 시를 지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거지 시인 등등.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순간들은 그들이 발걸음을 내딛고 시선을 돌리는 매 순간마다 존재한다. 다른 생각은 반목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의 더 큰 세상을 보게 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청춘은 서로에게 매료되어 간다.

이 영화의 매력이 대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추려고 해도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서로에 대한 호감, 그 디테일한 묘사가 보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데, 전차에서 셀린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려는 제시의 조심스러운 손동작과 레코드 가게에서 어색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해 서로를 보는 수줍은 표정,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 '어떡하지, 네가 점점 더 좋아져' 하는 눈빛이 보는 사람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안에 있을 거야."

비엔나의 좁은 골목, 셀린의 고백에 제시는 마치 이 시간이 마법이라고 느끼는 듯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그들을 보는 관객은 부디 이 예쁜 두 사람이 연인으로 맺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꿈같은 하룻밤이 지나고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두 사람은 20대 초반이기에 할 수 있는 로맨틱한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이들이 떠나고 난 후, 마치 두 사람의 지난 밤은 현실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북적였던 비엔나의 아침은 고요하기만 하다.

영화만큼 주목 받은 두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두 사람의 재회에 대한 답 없이 끝이 난 영화에 관객들은 아쉬워하며 각자 나름의 결말을 만들기도 했는데(감독은 "재회 여부에 대한 관객의 해석은 각자의 연애사에 달려있다"라고 말 한 적 있다), 감독은 9년 후 파리에서 이들을 재회시키며 꿈을 현실로 완성했다.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와 함께 한 '비포 시리즈'는 (극)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를 뛰어 넘으며 영화를 영화에 머물게 하지 않고 20여년의 세월과 함께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영화 개봉 후 영화의 결말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두 주인공을 연기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에단 호크는 몇몇 저예산 영화의 주연과 메이저 영화의 조연을 오가며 청춘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을 때였고, 줄리 델피는 고다르, 키에슬로프스키, 까락스 등 유럽 거장들의 영화 출연 이후 미국 독립영화에도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을 때였다.

아역 때부터 연기를 해 온 두 배우는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과 연출 활동도 활발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합예술인으로서 연극과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도 활약을 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다재다능한 두 사람의 커리어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비포 선셋>에서 9년 만에 재회한 제시와 셀린이 9년 후, <비포 미드나잇>(2013)에서 함께 가정을 꾸린 모습을 본 관객들은 아마도 궁금할 것이다. '비포 시리즈'가 완결 되었다고는 하나 과연 이들의 2022년을 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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