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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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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오후, 검은 옷을 입은 125명의 여성들이 보신각 앞에 모여 '낙태약'을 먹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먹은 것은 '낙태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퍼포먼스를 기획한 주최 측은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적힌 파란색 종이 상자에 인공임신중단약물 미프진(미페프리스톤)과 비타민을 넣었다. 미리 약속한 일부 참가자는 미프진을 먹고, 다른 참가자들은 비타민을 먹었다. 누가 미프진을 먹었는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현행법 상 미프진의 유통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불법행위'를 한 것은 17일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지침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보건복지부는 17일 임신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임신중단수술을 한 의사에게 1개월의 자격정지 처분을 내리는 부분을 보다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아야 자격정지가 이뤄졌는데 행정처분규칙 개정으로 법원 판결 없이 복지부가 산부인과 의사들에 대해 자격정지를 내릴 수 있게 돼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산부인과 의사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의 전면 거부를 선언했다. 일부 병원은 '우리 병원은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써 붙이기도 했다. 논란이 일자 보건복지부 장관은 2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낙태죄에 대한 헌재 판결이 있을 때까지 처분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

현행 낙태죄 재고한다더니... 말 바꾼 정부?

처벌이 유예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처벌 유예 시기를 '헌재 판단이 나올 때까지'로 밝힌 만큼, 헌재 판단이 나오면 또다시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개정안이 추진됐다가 취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9월,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하고 시술한 의료인의 자격정지를 1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여성단체가 폴란드의 '검은 시위'를 차용한 한국판 검은 시위를 벌이면서 개정안이 무효화됐다.

정부는 임신중단에 대한 해결책은커녕 실태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한 해 임신중단건수가 100만 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2010년 조사에서 한 해 임신중단건수가 16만 건이라고 밝혔다. 한 눈에 봐도 크게 차이 나는 수치다. 이마저도 8년 전 조사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정부는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작년 12월 '미프진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하면서다. 답변 영상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현행 낙태죄에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다"며 현재의 낙태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관련 기사 : 낙태죄 폐지, 조국의 '친절한' 답변에 빠진 세 가지).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개정안은 당시 청와대의 답변과는 상반되는 방향이다. 현행 낙태죄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개정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답변을 한 지 9개월이 지났지만, 약속했던 실태조사가 시작됐는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등 구체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정부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열린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 모습.
 지난 8월 8일 열린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 모습.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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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국가 중 23개국이 '허용', 시대 역행하는 한국

OECD 30개 국가 중 23개국이 임신 초기의 인공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임신중단이 불법이었던 국가들도 점점 불법 조항을 폐기하는 추세다. 한국에서 열린 '검은 시위'의 모티브가 됐던 폴란드는 2016년 임신중절을 전면금지하는 법안이 상정되자 여성들이 집단 행동에 나서면서 법을 폐기했다. 지난해에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임신중단이 합법화됐다.

한국에서도 낙태죄는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원영석 산부인과의사회 총무이사는 28일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낙태죄는 현실적으로 괴리가 있고 의학적인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다'며 "모순된 법을 가지고 의사를 도덕적이다, 비도덕적이다 판단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이 때문에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당초 헌법재판소는 올해 7월 경 낙태죄 처벌에 관한 형법과 관련 모자보건법이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지만 한 차례 결정을 유보했다. 논란이 예상되는 문제인 만큼 헌법재판소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미루는 사안에서 보건복지부가 갑작스럽게 개정안을 발표한 것은 더 문제라는 반응이 많다. 정의당은 24일 논평을 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시국에 오히려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는 보건복지부의 시대착오적인 행태에 유감을 표한다"고 비판했다.

 작년 12월, 정부가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도입' 청원에 대한 답변을 발표한 바 있다.
 작년 12월, 정부가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도입' 청원에 대한 답변을 발표한 바 있다.
ⓒ 청와대 유튜브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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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는 현실인데... 정부는 '탁상행정'

고래 싸움에 당장 등이 터지는 것은 임신중단이 필요한 여성들이다. 임신중단 수술은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불법이기 때문에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고, 단속을 피하기 위해 수십 만 원에 달하는 수술 비용은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입원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술 후 문제가 생겨도 후속 조치를 바로 받기 어렵다.

이마저도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임신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은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해야 한다. 여성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게시판에는 'ㄴㅌ(낙태라는 단어의 자음을 딴 것)'를 도와달라는 글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중절이 가능한 병원을 알려주거나,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중절 비용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도움의 의사를 표하는 것은 임신 중단이 여성들에게는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없는 젊은 여성이 임신으로 인해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실감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임신중절수술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수많은 여성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낙태약' 퍼포먼스를 기획한 단체 '페미당당'이 125명을 퍼포먼스 무대에 세운 것은 이들이 퍼포먼스를 벌이는 한 시간 동안 한국에서는 125명이 임신중단을 하고 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신중단 125인 선언>을 통해 "임신중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행해진 수술로, 수많은 보통의 여성들이 다양한 이유로 임신중단을 선택한다"면서 "접수대에서 거부당해 여러 산부인과를 전전하는 여성이 더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낙태죄 폐지에 관한 콘텐츠를 만든다는 펀딩에는 하루 동안 천 만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다.
 낙태죄 폐지에 관한 콘텐츠를 만든다는 펀딩에는 하루 동안 천 만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다.
ⓒ 텀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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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들은 지난해부터 임신중단과 관련한 집회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오프라인 뿐 아니라 온란인에서도 임신중단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28일,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 올라온 뉴미디어 <닷페이스>의 <세탁소의 여자들>프로젝트는 후원 모집 첫날만에 10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다. 출판사 <봄알람>과 함께 유럽의 임신중단 현황과 관련된 웹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해 '임신중단과 미프진 도입'에 대한 국민청원에도 23만 명이 넘는 이들이 청원했다. 임신중단에 관련된 정보를 접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수요가 어느정도인지 보여주는 지표다. 이런 상황에도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정부는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탁상행정'을 펼치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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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 언론을 공부하는 여성 청년. 페미니즘, 노동, 철거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읽고 쓰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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