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4년 9월 5일, 한국 축구대표팀의 사령탑으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공식 선임됐다. 당시 슈틸리케 감독의 영입을 주도한 것은 이용수 기술위원장이었다.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던 이용수 위원장이 직접 영입한 외국인 감독이라는 점에서 당시만 해도 축구 팬들의 기대감은 매우 컸다.

당시 이용수 위원장은 외국인 감독 선임의 기준으로 무려 7~8가지에 이른 구체적인 자격조건을 제시했다. 월드컵 예선이나 본선 경험, 클럽이나 대표팀에서의 국제대회 토너먼트 경험. 영어 구사 능력, 인성, 나이 등이 포함됐다. 자연히 히딩크의 뒤를 이을 만한 외국인 명장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형성됐다.

4년 전 슈틸리케 선임한 이용수 위원장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카타르와 원정경기에서 패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지난 14일 오후 인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카타르와 원정경기에서 패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지난 14일 오후 인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용수 위원장이 데려온 슈틸리케는 당시만 해도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도자였다. 선수 시절에는 독일 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이었지만, 지도자로서는 아프리카나 중동 등 세계 축구의 변방을 전전했으며 성공한 경력도 거의 없는 베일 속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슈틸리케는 이용수 위원장이 처음 제시했던 '외국인 감독의 자격조건' 면에서 대부분 미달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이용수 위원장은 슈틸리케의 영입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의 '인성과 태도'를 부각하는데 중점을 뒀다. 이용수 위원장이 독일인 슈틸리케를 위해 독일어 통역을 준비해야할지 질문하자 자신의 보좌역인 카를로스 아무르아 코치를 위하여 스페인어 통역만 준비해달라는 답변을 듣고 구성원을 배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감독의 능력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무관한 에피소드다. 당시 외국인 감독 선임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4년의 시간이 흘러 한국 축구는 또 한 번의 월드컵을 실패로 끝내고 나서 다시 새로운 외국인 감독을 찾아나서야하는 험난한 여정을 치르고 있다. 이번에 외국인 감독 영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김판곤 국가대표 감독선임위원장이다. 축구협회는 지난 7월부터 사실상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후보군들을 물색해왔다.

현재까지의 과정은 4년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김판곤 위원장은 능동적인 축구철학과 우수한 경력을 갖춘 지도자를 찾겠다고 공언했다. 월드컵 예선 통과 경험, 대륙별 대회나 리그 우승 경험 등을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역시 팬들에게 새로운 외국인 감독에 대한 눈높이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벌써 한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러 유명 감독 후보들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뿐, 좀처럼 윤곽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순위 감독 후보들과의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 유명 감독들은 하나둘씩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유력 후보 감독들 거론되지만... 사실 쉽지 않아

 16일(한국 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이란 선수들이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축구대표팀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2018.6.16.

16일(한국 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이란 선수들이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축구대표팀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2018.6.16. ⓒ 연합뉴스/EPA


4년 전 이용수 위원장이 실패한 이유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지키지도 못할 거창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외국인 감독에 대한 기대치만 올려놓은 데 비해 우선순위로 선정했던 감독 후보들과의 협상이 불발되면서 난처한 지경에 놓였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외국인 감독 중 한국행을 선뜻 원할 인물은 많지 않다.

내부 정보 보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감독 후보들이 줄줄이 언론에 공개되며 축구협회가 협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감독 후보 1순위였던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는 자신이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을 이용해 유럽 현지 재택근무, 세금 대납 등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다가 결국 협상이 결렬됐다. 결국 시간과 여론의 압박에 쫓기는 상황이 된 이용수 위원장은 당시 비싼 몸값에 궁색한 변명을 곁들이며 슈틸리케를 선택하고 말았다.

김판곤 위원장은 4년 전 교훈을 바탕으로 협상 내용을 비공개로 진행하고 있지만 벌써 유력 감독 후보들의 이름이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바히드 할릴호지치(보스니아), 카를로스 케이로스(포르투갈), 후안 카를로스 오소리오(콜롬비아), 키케 플로레스(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감독들이 줄줄이 물망에 올랐다. 최근에는 크로아티아 출신 슬라벤 빌리치 감독과 포르투갈 출신 파울루 벤투 감독의 이름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한국행 가능성은 미지수다. 거론되고 있는 감독 후보들의 이름값이나 최근 경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순위 후보들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않은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당장 축구 대표팀은 오는 9월 7일 코스타리카, 11일 칠레와 A매치가 예정되어 있다. 보통 A매치를 앞두고 약 2주 전에는 명단을 발표하는데 아직 감독도 정해지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이달 중 최대한 빨리 감독을 선임한다고 해도 직접 선수를 파악하고 선발할 시간이 부족하다. 4년 전에도 감독 선임이 늦어지면서 슈틸리케 감독은 2014년 9월 30일 우루과이전에서 벤치에 앉지 못했고 당시 신태용 코치가 '감독 대행' 신분으로 경기를 지휘해야 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감독 선임이 지체될수록 내년 1월로 다가온 아시안컵 준비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2014년의 시행착오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결국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감독선임이 늦어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축구에 진심으로 기여할 수 있고 헌신할 준비가 된 유능한 감독을 데려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판곤 위원장은 최근 유럽 출장을 마치고 16일 귀국했다. 4년 전 이용수 위원장의 실패를 거울삼아 축구 팬들이 만족할만한 선물을 제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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