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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노인이 가득한 퇴근길 지하철

8월 초의 일이다. 외부 업무를 보고 오후 6시경 도곡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한 손에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들고, 땀으로 끈적해진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빈자리를 빠르게 찾았다. 자리가 없다.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매달리듯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런데 지친 직장인으로 혼잡해야 할 지하철이 어딘가 이상하다.

어르신들의 '지하철 피서'
 어르신들의 '지하철 피서'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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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약자석부터 일반석, 심지어 임산부석까지 어르신들이 많이 앉아 계신다. 회사가 밀집한 지역을 지나는 지하철인데, 게다가 퇴근시간인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환승역을 지나도 자리에 앉은 어르신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집으로 도착하기까지 강남역과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 갈아탈 때마다 비슷한 풍경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도착지인 8호선 종점인 암사역까지 결국 서서 왔다. 지상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의 긴 줄 끄트머리에 붙어 섰다. 그때 한 할아버지의 통화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냐구? 나? 지하철이지... 더운데 어딜 가긴 어딜 가. 너무 더워서 지하철 타고 갔다가 왔다가 종일 그랬지. 지하철은 에어컨 쌩쌩 나오잖아."

아, 그래서 그랬구나. 에스컬레이터의 긴 줄의 반 이상도 어르신들이었다. 그들에겐 지하철이 무더위 쉼터였던 것이다. 은행, 주민센터 등이 무더위 쉼터로 개방이 되었다지만 비록 땅 속이라 하더라도 이곳 저곳 다니며 사람 구경할 수 있는 지하철이 뜨거운 여름날을 보내기 좋은 장소인가 보다.

[장면 2]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지 않는 사람들

어르신들로 북적대는 패스트푸드점
 어르신들로 북적대는 패스트푸드점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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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삼남매의 방학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이 뜨거운 날 '삼식이' 셋을 챙겨 먹이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난 너무 더워 입맛도 없는데 한창 자라는 아이들은 매일매일 먹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40도 폭염에 뭘 해줄 엄두가 나지 않아, 은근슬쩍 '삼식이'들은 아점(아침과 점심)과 점저(점심과 저녁)를 먹는 '두식이'가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며칠 전부터 노래하는 햄버거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점'으로 복숭아와 옥수수를 먹은 아이들과 오후 2시를 넘겨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을 넘긴 시각인데 빈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단체 손님이라도 왔나?

우리가 간 곳은 꽤 큰 규모의 패스트푸드 매장이었다. 가끔 올 때 마다 빈자리가 더 많은 매장인데 오늘은 빈자리가 없다. 청소년들의 방학 특수를 누리나 하며 둘러보는데, 세상에나 손님의 95%가 할머니들이다. 나머지 5%는 할아버지들. 빈자리를 찾아 서성대는 우리를 본 할아버지 두 분이 일어나신다. 드디어 빈자리가 났다. 주문도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얼른 자리를 맡게 했다.

햄버거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았다. 음료수나 커피를 시킨 테이블이 대부분이다. 매장에서 팔지 않는 과자류가 올라와 있는 테이블도 꽤 보인다. 편하게 신발을 벗고 의자 위로 다리를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

냉기가 사라진 음료잔과 테이블 분위기로 보아 매장에 들어온 지 1시간은 족히 지난 듯하다. 아이스크림을 추가 주문해 아이처럼 맛있게 드시며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을 보자 웃음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이 두 명이 매장 안으로 들어와 혼자 앉아있던 할머니에게 다가간다. 학원을 마치고 온 손자들인 듯하다. 할머니는 감자튀김을 추가 주문한다. 그러고 보니 몇몇 테이블에 손자들과 함께 있는 어르신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오랜만에 먹는 햄버거가 맛있다며 쉬지 않고 먹던 아이들이 햄버거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그제야 이야기 한다.

"엄마, 그런데 여기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여긴 햄버거집인데."
"엄마, 여기 커피 세일한다. 2000원인데 1200원이래. 엄마도 먹어."


과연 그렇다. 끼니 때를 지났다는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가족들이 일터와 학교로 모두 나가서, 혹은 모두 출가 후 혼자 살아서 이 무더운 날 에어컨을 켤 엄두가 나지 않는, 에어컨이 없는 어르신들.

햄버거가 입에 썩 맞지는 않지만 일반 카페보다 음료 가격이 저렴하고, 서빙을 하는 직원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매장도 넓어 빈자리가 많은 패스트푸드점. 어르신들에겐 무더위쉼터로 개방한 관공서보다 이곳이 무더위 쉼터로 더 만만하고 편하지 않았을까?

비싸지 않은 음료값을 지불해 공간과 시간을 샀으니 부담도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또 어린 손자들도 좋아하는 곳이니 달걀이 부화한다는 40도 여름날 이만한 곳이 없다.

폭염 그리고 초고령사회

폭염은 노인에게 위험하다
 폭염은 노인에게 위험하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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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이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패스트푸드점 무더위 쉼터. 무더위가 바꿔놓은 일상의 풍경에 이런 저런 생각이 지나간다. 아이들도 평소와 다른 햄버거집 풍경이 낯선 듯 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싼 할머니 부대의 수다는 에어컨 바람 소리를 가뿐히 누른 지 오래.

아이들처럼 나 역시 오랜만에 먹은 햄버거가 맛있었지만, 사실 주위의 소음 때문에 코로 먹는지 귀로 먹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후 3시, 매장 밖의 불볕더위를 실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피해보고 싶었지만 소음과 빈자리가 날 때까지 서 있는 아이와 함께 온 모녀 3대의 눈길이 나를 콕콕 찔렀다.

지하철과 패스트푸드점에서 본 낯선 풍경은 난생 처음 겪은 40도 폭염만큼 충격적이었다. 111년만의 기록적인 폭염이라 하지만 지구는 점점 더 뜨거운 여름을 토해낼 것이다. 나 또한 머지않아 지하철과 1200원짜리 커피가 있는 패스트푸드점 에어컨 아래에서 더위를 피할 수밖에 없는 노인이 되어 있겠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

초고령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층은 곧 전체 인구의 1/4을 차지할 것이고, 우리는 오늘과 같은 풍경을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게 될 것이다. 폭염 여름 한철이 아닌 일상의 곳곳에서 이와 같은 현실을 마주할 것이다.

폭염에 대한 대책도, 초고령사회에 대한 방안도 고민하게 되는 더운 여름이다.


태그:#폭염,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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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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