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포스터.

영화 <공작>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예전에 한 사업가는 내게 "사업을 하며 만나는 사람 중 가장 쉽게 배신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돈만 밝히는 사기꾼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행동을 '주님의 일'이라던가, 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부류의 인간들이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가장 위험한 사기꾼들이란 자기 자신조차도 속인다는 것이 그 분 조언의 취지였다.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북풍 사건과 그 중심에서 암약한 공작원 흑금성을 모태로 한 영화 <공작>을 보면서 그 사업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흑금성(황정민 분)은 육군 정보부 출신의 군인이었지만 북한을 속이기 위해 실제 사업가로서 경력을 쌓고 사업가들이 말하는 표정과 말투를 따라하기 위해 비디오까지 수차례 돌려본다. 그래서 김정일을 면담하기 전 몸에 약물이 주입됐음에도 "누구 지령이긴요, 장사꾼이, 쩐주 지령이지"라고 말한다. 극중 북한의 외화벌이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리명운 차장(이성민 분)은 북한 군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더 남측과 교류를 넓히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오히려 각자의 조국과 하나의 민족에 진짜 의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모든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강변하던 안기부장(김응수 분)과 실장(조진웅 분)은 애꿎은 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북풍을 기획한다. 공화국을 수호하겠다며 모든 일에 FM을 강요하던 정무택(주지훈 분)이 오히려 제일 먼저 흑금성에게 영변 근처를 시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뒤로하고 북풍 기획에 찬성하고 뒤로 돈을 빼돌리는 작태를 보인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대다수 사람들은 '비즈니스적이다'라는 말을 마치 비도덕적이고 비정한 용례로 인식하고, '애국이다, 헌신이다'와 같은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영화 <공작>은 이 같은 생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제시함과 동시에, 무엇이 올바른 정치이고 또 비즈니스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인상적이었던 영화 <공작> 속 중국 모습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 CJ엔터테인먼트


서문이 좀 길었지만, 메시지 이외에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도 해야할 것 같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그 자체보다 화자의 목소리와 분위기 옷차림 등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수많은 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라면 당연히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구비해야 그 메시지에 대해서도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이 영화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한 번 생각할 동기를 충분히 부여할 만큼 훌륭했다. 주변에 중국에서 공부했거나 중국과 관련된 학업을 이어가는 이들은 영화 <공작>이 당시 중국의 장소와 시간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칭찬했다. 모든 영화가 과거 그 시대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화 <공작> 수준으로 해내는 영화는 많이 보지 못했다. '북적임' '더러움' '낡음' 같은 것을 스크린 위에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북한 음식점인 '고려관'으로 향하는 길목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낡은 간판과 이를 가리기 위한 화려한 색의 어색한 조화가 눈에 띄었다. 중국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세련된 지금과 달리, 고층 건물이 많지 않던 1990년대를 잘 표현했다고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알록달록했던 베이징의 밤을 화면에 담은 것도 좋았다. 배우들이 쓰는 중국어 성조가 매우 정확했던 점도 인상적이다.

장소와 시간의 재현에 대한 감탄은 극 중반의 주 무대인 북한에서 다시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그 수도 평양의 음산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잘 표현한 영화 속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북경이나 러시아에서도 동일하게 보았던 것처럼, 세밀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소비에트 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정돈된 도로와 건축물들이 눈에 띄었다.

김정일과 조우하는 공간 표현 역시 좋았다. 내가 방문했던 공산주의와 관련된 중국과 러시아의 박물관이나 정치 유적지들은 모두 그런 스타일이었으니 감독의 장면 묘사에 더욱 신뢰가 갔다. 또한 평양 뿐 아니라 영변 근방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을 묘사한 것 역시, 내가 그 시절 북한을 가본 적은 없으니 알 수는 없다만 연변의 빈촌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북한 이상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주었다.

반가웠던 이효리와 조명애 광고 촬영 재현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 CJ엔터테인먼트


1990년대 말 한국에 대한 재현도 적절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촌스러운 사무실 집기나 가전 제품까지, 마치 당시 사무실을 통째로 옮겨온 것처럼 훌륭하게 재현했다. 당시 참 신선했던, 이효리와 조명애의 광고 촬영을 재현한 것도 좋았다.

과한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복식에 대한 고증은 아쉽다. 이 영화에서 주요 고증 오류로 지적되는 김일성·김정일 배지 역시도 복식에 대한 부분 아닌가(영화에 등장한 배지는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이 만든 것이라, 90년대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답게 수트핏도 좀 루즈하고 넥타이도 촌스럽길 바랬다면 과한 욕심이었을까. 영화 <암살>에서 딱 떨어지는 슬림하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위스키에 불을 붙이는 조승우가 김원봉이라는 것을 알고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는데,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던 넑직한 소위 '아저씨 정장'과 칙칙한 색깔의 넥타이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총격 장면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는 대사만으로도 긴장감이 넘친다. 이미 흑금성 사건이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그 장면의 템포를 어떻게 채워가는가는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많은 감독들이 역사적 사건 앞에 억지로 자신의 색을 과하게 입히려다가 그 템포 조절에 실패하곤 한다. 각 장면을 촘촘하게 조율해내면서도 또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감독의 역량에 찬사를 보낸다.

자신을 매력적으로 어필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수많은 조폭 영화나 슬랩스틱 코미디들의 억지 웃음과 달리, 시대적 상황에 맞게 제공되는 이 영화의 개그도 역시 훌륭한 관전 포인트다.

억지로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그 이질적 소재를 자연스레 드러낸 것도 좋다. 북한 고위부 급 인사 두 명이 화려한 클럽에서 군무를 추는 장면과 시계를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개그도 재밌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 CJ엔터테인먼트


정치란 무엇이고 또 비즈니스란 무엇일까? 정치란 여러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최선인 길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는 자기 이익을 포기해야 하고 그것을 능숙하게 조율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다.

누군가는 최저임금을 올리고 주당 근무 시간을 제한하여 삶의 질을 올리고 내수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높은 자영업자 비율과 그보다 더 높은 폐업 비율을 예로 들며 이것이 오히려 독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대기업 주도의 경제에서 탈피하여 중소기업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재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북한도 그토록 목매는 외화를 벌어올 수 있는 대기업 상품이 중국의 제조업 굴기와 일본의 엔저에 따라 경쟁력이 악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경제 체질을 바꾸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치'를 하는 남북의 위정자들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김대중이 당선되면 남한이 북한에게 통째로 나라가 넘어간다고 말하고, 남한 상품이 들어오면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버린 자들은 막연한 믿음 앞에 같은 민족끼리 총질을 시키고, 국민들의 가난과 죽음을 도외시한다. 반문하는 사람에게 '국가와 민족'이나 '공화국과 사회주의'라는 질서를 강제로 들이민다. 북풍 협상이 타결되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한국 국회의원들과, '공화국을 위해서'라고 건배하는 보위부의 관료들은 모두 같은 우를 범한 것 아닌가.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야하는 위정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그저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편하게 해석해버린다.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를 하는 흑금성과 리차장이 오히려 가장 끈끈하게 엮이며 그나마 공동선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은 그것의 시작이 비즈니스여서일지도 모른다. 거래선을 튼다는 것은 결국 상대의 필요를 읽어내는 것이며, 여러 사람에게 많은 물건을 판다는 것은 여러 사람(대중)의 수요를 가장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남을 존중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외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정당하다는 오만 속에 '어리석은' 국민의 생각을 도외시하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긍정적인 가치 체계가 될 수 있다. 특히 오랜 기간 분단되어 이질적 가치 아래 대립하는 남과 북의 관계라면 말이다.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 CJ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핵심 요소는 흑금성의 정체를 리차장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이다. 그를 향한 비호란 이미 김정일의 재가가 떨어져 어쩔 수 없어져버린 비즈니스라는 공동의 목적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이 상호 간에 형성된 인간애일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쪽이든 상명하복이라는 관계 하에 일방적인 충성을 강조하고, 결국 그의 존재를 알림으로서 그를 제거하려 드는 안기부 실장과 굶어 죽는 인민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는 보위부 요원들의 작태와는 심하게 비교되는, 비즈시스적이되 가장 인간적이며 또한 남과 북 모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행동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는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사람보다 자기 신념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더 악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돈이란 모두에게 공통의 관심사이지만 신념이란 그 사람과 특정 집단에게만 통용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국민을 우습게 보고 그들에게 일방적인 충성만을 강요하고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던 과거의 역사를 더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왜 그들은 우리를 속이는가? 그것은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북한의 군사 도발에 질문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며 특히 자신이 가진 신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시의성과 시사성을 종합적으로 따지면, <공작>은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였다.

공작 흑금성 북풍 총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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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 blog.naver.com/admljy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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