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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은 예전의 모습과 달라졌지만 아취 있던 옛 풍경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 석파정 석파정은 예전의 모습과 달라졌지만 아취 있던 옛 풍경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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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제일의 정원이었던 석파정, 이곳의 첫인상은 맑음이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서면 정갈하기 그지없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부암동을 처음 찾는 이들이 '세상에,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라며 짧은 감탄사를 뱉곤 하는데 이곳 석파정에선 한껏 더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석파정은 예전과 달리 계곡물도 다소 메말랐고 건물도 더러 없어졌다. 그럼에도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하얀 너럭바위, 깊고 푸른 계곡, 밝고 따사로운 뜰, 품격 있는 건물들, 둘레를 빙 둘러싼 해묵은 노송들에서 예전의 아취 있던 풍경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사랑채 옆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수백 년 된 소나무는 또 얼마나 우람한가. '삼계동(三溪洞)' 바위 각자는 지금도 선명하다.
조선말의 화가 이한철이 그린 그림으로, 석파정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석파정도 병풍 조선말의 화가 이한철이 그린 그림으로, 석파정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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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의 품격과 사랑스런 별당

석파정은 북악산과 인왕산의 산기슭 계곡에 있다. 석파정은 19세기 말 격동의 시대에 왕과 왕실 사람들, 세도가들이 찾았던 비밀의 정원이었다. 예전의 석파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조선말의 화가 이한철이 그린 <석파정도 병풍>을 보면 석파정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계류를 바라보며 들어앉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은 당시 상류계층의 정원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보여준다.

석파정은 진입 공간, 사랑마당, 안마당, 후원, 별채, 별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진입 공간에 문간채가 있었다. 해방 직후에 편찬된 <서울시사>를 보면 석파정은 개울을 건너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미술관에서 곧장 정원으로 진입하는 지금보다 훨씬 극적이고 운치 있게 석파정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계곡 큰 암반에는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라 뜻의 ‘소수운렴암’ 바위 각자가 새겨 있다.
▲ 소수운렴암 계곡 큰 암반에는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라 뜻의 ‘소수운렴암’ 바위 각자가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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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을 건너면 대문과 문간채가 있고, 다시 급경사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에 하얀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큰 암반에는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라 뜻의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바위 각자가 그윽하게 새겨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으로는 안채가 보이고 사랑채와 별채가 옆과 뒤로 이어진다. 예전 이곳에는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연못이 2개 있었는데, 사랑채 앞 연못은 메워졌고, 지금은 위의 연못만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다.

안채와 그 뒤의 별채 사이에는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장대석으로 쌓아 올려 한층 품격을 높이고 있다. 아마도 흥선대원군이 왕실에서 조영한 축조 기법을 이곳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그 뒤의 별채 사이에는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장대석으로 쌓아 올려 한층 품격을 높이고 있다.
▲ 석파정 화계 안채와 그 뒤의 별채 사이에는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장대석으로 쌓아 올려 한층 품격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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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58년에 자기 집 뒤뜰 바위 언덕으로 건물을 옮겼다.
▲ 석파정 별당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58년에 자기 집 뒤뜰 바위 언덕으로 건물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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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옆에는 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없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58년에 자기 집(지금의 홍지동 세검정 삼거리 부근) 뒤뜰 바위 언덕으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석파랑이라는 한정식집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무척 사랑스럽다. 우리의 전통식과 중국식 건축 기법이 조화로운 아담한 건물이다.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양옆에 방이 있으며 앞뒤로 툇마루를 둔 아주 단순한 구조이다. 우리 건축에선 볼 수 없는 서쪽 벽의 둥근 만월창(滿月窓)과 북쪽 벽의 반월창(半月窓)이 인상적이다. 이 별당 건물이 석파정에 있을 때 흥선대원군 자신은 큰방을 쓰고, 손님에겐 건넌방을 내어줬으며, 대청은 자신이 난초를 칠 때 이용했다고 한다.
석파정 별당의 인상적인 만월창.
▲ 석파정 별당의 만월창 석파정 별당의 인상적인 만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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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은 봄날 꽃과 가을 단풍이 유독 아름답다. 그때가 아니라면 비 내리는 날에 석파정을 찾는 게 좋다.
▲ 석파정 석파정은 봄날 꽃과 가을 단풍이 유독 아름답다. 그때가 아니라면 비 내리는 날에 석파정을 찾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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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을 바라보는 누각

석파정은 봄날 꽃과 가을 단풍이 유독 아름답다. 그때가 아니라면 비 내리는 날에 석파정을 찾을 일이다. 석파정 별채에 앉아 인왕산에 드리운 안개와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그 운치는 계절을 넘어선다. 비록 흥선대원군 당시의 장대한 풍광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품격 있는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석파정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은 계곡 깊숙이 숨어 있는 정자일 것이다.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점점 깊어지는 계곡 한가운데에 들어앉은 아름다운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다.

정자의 이름은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그 뜻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 쯤으로 풀이하면 될까. 가을날 온통 붉은 단풍에 둘러싸인 이 정자를 바라보다 넋을 잃지 않을 사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으로 석파정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이다.
▲ 유수성중관풍루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으로 석파정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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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에서 가장 깊숙한 공간에 있는 중국풍의 건물로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
▲ 유수성중관풍루 석파정에서 가장 깊숙한 공간에 있는 중국풍의 건물로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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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생김새가 우리 정자와는 너무나 다르다. 뒤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린 계류 한가운데에 꺾은 절선형의 다리를 놓고 기둥을 세워 평대를 쌓은 건물은 그야말로 파격이다. 정자 내부에도 마루나 방을 들이지 않고 난간만 둘렀다. 지붕 또한 기와 대신 사모지붕에 동판을 덮었다.

사실 이 특이한 건물은 조선말의 시대적 분위기가 담긴 중국풍의 건물이다. 아무래도 이 정자는 은둔자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야심가의 공간으로 보인다. 이 정자에선 주변 자연의 풍광을 읊으며 풍류를 즐기기보다는 무언가 은밀한 밀담을 주고받는 장소로 제격일 것 같다.

흥선대원군 이후에 석파정은 왕실 후예들에게 대물림됐다. 이희(李喜, 이재면, 고종의 형)에서 이준(李埈), 이우(李堣) 등으로 소유권이 세습됐다가 한국전쟁 뒤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비아 고아원과 병원 등으로 사용됐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서울미술관을 통해야만 석파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석파정 인근에 백사동천으로 알려진 백사실 계곡이 있다.
▲ 백석동천 석파정 인근에 백사동천으로 알려진 백사실 계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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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암동의 별서들

석파정 가까운 곳에 안평대군이 조성한 무계정사 터와 부암정(윤웅렬 별장)이 있다. 인근에는 백사동천으로 알려진 백사실 계곡이 있다. 예로부터 이곳 일대가 서울의 이름난 경승지였음을 알 수 있다. 북악산을 넘어가면 성락원이라는 유명한 옛 정원도 있다. 일 년에 두어 번 개방할 뿐이다.


태그:#석파정, #흥선대원군, #삼계동, #부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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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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