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 메인포스터 _

▲ 영화 <변산> 메인포스터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변산>은 쇼미더머니 6년 도전자인 박정민이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코믹, 감동, 청춘물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감상이 부딪혔습니다. 개인주의와 가족·공동체 주의. 이 두 가지가 영화 속에서 상당한 부조화를 이뤄 영화의 메시지를 흐린 것 같습니다. 감동적이고, 유쾌한 요소가 많은 영화였지만 보고 난 후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으로 존재한 박정민이 보여준 청춘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박정민의 연기가 탁월해 더욱 돋보였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서사 속 학수의 순탄치 못했던 성장기가 그를 남들보다 유독 삐뚤어지게, 삐딱하게 그려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의 삶이 만들어낸 보통의 모습 같았습니다. 도박 중독과 바람에 가족을 떠난 아버지. 게다가 도피생활로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로 인해 병들어가는 아버지 앞에서의 무덤덤함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학수에게 학창시절에 좋은 감정을 남겨주지 못한 고향이 반갑지 않은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학수가 자신을 품어준 고향에 진저리 치는 모습, 오랜 친구들을 만나도 무덤덤한 모습, 아버지에게 'X발'이라고 읊조리는 모습까지. 나빠 보이지도, 딱해 보이지도, 삐뚤어져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낄 수 있었던 건 학수의 감정이 그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은 채 학수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학수의 감정과 행동은 가족, 친구, 고향이라는 공동체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1평짜리 고시원에서 6년째 래퍼의 꿈을 키우는 학수. 자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족도 고향도 없는 학수에게 여유와 온정을 바라는 것은 공동체라는 집단에서나 가능한 거지, 개인으로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입니다. 학수에게 끔찍한 기억만 남겨준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이유로 용서해야 할 이유도, 떠나고만 싶던 고향을 '고향'이라는 이유로 그리워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들은 학수가 공동체 속 구성원이 아닌, 오롯이 '개인'으로서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영화 <변산> 메인 예고편 _

▲ 영화 <변산> 메인 예고편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변산>의 클라이맥스는 학수가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는 건 한국 영화사에, 아니 드라마, 심지어 만화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만큼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학수의 주먹은 자신이 외면해왔던 감정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며, 이는 동시에 아버지를 용서 혹은 화해하는 매개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변산>의 서사 속 '개인'으로서 존재한 학수를 가장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에서 제정신인 주인공이 아버지를 때리는 건 유쾌하게, 아름답게 소비되기 힘듭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학수가 기억하기 싫은 고통과 감정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관객들에게 불쾌감 없이 전달 가능했던 이유는, 그 순간 아버지와 아들, 즉 가족이라는 관계를 떠나, 자신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긴 한 사람과 그 고통에 힘들었던 한 사람의 관계로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은 이가, 고통을 준 자에게 주먹을 날린 겁니다.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그래서 영화를 보며 개인주의 성격을 내포한 한국 영화가 나왔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춘이야기'를 다룬다는 <변산>에 아주 적절하다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청춘들은 공동체에 귀속되어 있기보단, 혹은 그러했던 기억보단 개개인으로 존재하면서 형성된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더 크기 때문입니다. 문 앞의 도어록, 도시의 익명성, 혼잡한 군중과 무수한 비인격적 접촉이 과거 공동체 사회와는 구별된 세상입니다. 최악의 취업난과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내 옆의 친구가 소중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소중하게 다뤄준 대중영화가 흔치 않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다수의 감정인데, 결론은 매번 공동체와 가족으로의 회귀였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변산>은 지금껏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던 '개인'을 위한 감정을 전면에 둔 영화이며, 그래서 더욱 청춘을 잘 그려낼 수 있겠다고 기대했습니다.

감정의 과잉 개입과 공동체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공동체가 학수의 감정에 개입합니다. 도박 중독, 바람, 가족을 떠나고 경찰을 피해 아내의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가족이니까', '아버지니까', '죽을병에 걸렸으니까' 용서하라는 고향 사람들. 별 좋은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고향은 소중한 것이라는 선미와 친구들. 고향(=공동체)은 개인에게 용서와 관용을 강요합니다. 더불어 공동체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개인으로 대변되던 학수와 고향이 보여주는 공동체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수가 고향의 따스함과 선미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깨닫고 납득하며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전환되는 부분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고향, 가족, 친구가 소중하다는 것은 인물들, 특히 선미의 대사 외에는 보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고향에 돌아와서 하는 일마다 꼬이고, 내내 발목만 잡힙니다. 그런데도 사랑해야만 하는 고향과 아버지라니.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선미의 대사들도, 이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무례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성장한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기억 속에서도 흐릿한 선미는 학수를 이래저래 판단하고 결단합니다. "비겁한 새끼, 언제까지 피해 다닐 거냐, 너는 정면을 안 본다", "그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고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버린 영혼이라 (노트) 안 주려고 했다." 종종 일침이라고 날리는 말들은 전혀 와 닿지도,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정신이 번쩍 들지도 않았습니다. 가까운 사이에도 쉽게 하지 못하는 말들을 짝사랑했다는 이유로, 함께 성장한 공동체 일원이라는 이유로 다 안다는 듯이 함부로 말할 순 없습니다. 보는 입장에서도 달가울 리 없고요. 선미라는 역할은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학수의 감정에 과잉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수는 이러한 선미의 말에 결국 영향을 받습니다. 깨닫습니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개연성이 부족하다

필자는 여기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 소중함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영화 속 고향은 돌아가야만 하는, 그리워야만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학수는 어느덧 소중함을 깨달아 버립니다.

처음부터 '공동체는 소중하고, 앞으로의 삶에 있어 원동력이 된다'와 '고향에 대한 부정적 마음,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은 마음은 극복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이미 정해진 채 개인주의가 강한 학수를 주인공에 두고 그 안에 이야기를 욱여넣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했듯 영화를 보는 내내 개인의 감정에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감상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해서 변하게 된 학수의 감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정해진 결론에 맞춰 그에 맞게 학수의 감정도 변화한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가족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꼭 고향이 아름답고 그리워야만 하나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가족과 고향의 소중함이라는 명제는 항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관객들이 따라오길 바라는 방향으로 해당 요인들을 섬세하게 그려 넣지 않는다면, 영화의 연결고리가 불친절하고 개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습니다. <변산>이 그린 아버지와 고향은 꼭 극복하고 해소해야만 할, 혹은 그리워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성세대를 위한 청춘영화?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그래서 오히려 <변산>은 기성세대를 위한 청춘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발 딛고 있는 도시와 고향의 확실한 분리를 겪고 있는 우리의 엄마 아빠 세대. 고향의 따스함과 가족의 소중함, 이웃의 정을 몸으로 체득했을 그들에게 <변산>은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겁니다. 기억에서 잠시 사라졌던 그때를 떠올리며 웃고 울 수 있는 그런 영화였을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청춘이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의 모습과 맞아떨어질 리 없습니다. 영화가 그려놓은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 마주해야 할 내면의 벽은 현실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청춘들이 일반적으로 겪고 공감하는 추억과 고민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_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그럼에도 인상적이었던 영화임은 확실합니다. 중간 중간 학수의 마음을 그려내는 섬세한 랩 가사와 갯벌에서의 유쾌한 싸움, 선미의 짝사랑과 학수의 짝사랑은 학생 때 읽은 소나기와 청소년 소설 반올림 시리즈를 읽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습니다. 유치하고 오글거려 더욱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변산>은 아름다운 문학 소설 같기도, 윗 문단들을 빌려 조금 더 섬세해진 삼류영화 같기도 했습니다.

변산 이준익 박정민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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