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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시립승화원 입구
 벽제시립승화원 입구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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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한 달 후에 결혼한다. 사연이 많아서 아들과 같이 살지 못했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내가 죽으면 관값 하라고 모아놓은 50만 원이 전부다. 그 돈을 아들 결혼식에 보태라고 내놓았다."

며칠 전 지인이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에 다녀와서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에 늙은 부모가 내놓은 돈이 자신의 장례비용이라니, 서글픔을 넘어 왠지 나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장례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죽은 사람과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시간'이다. 이미 육신은 죽었지만 그와 함께 살아생전 나누었던 모든 것과 '이별'하는 '예'를 갖추는 것이다. 망자가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편히 가세요(쉬세요)"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지난 6월 말,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 '나눔과나눔'의 사무국장인 박진옥씨를 만났다. 나는 쪽방 주민을 위한 공동체 만드는 일을 했고, 노숙인 아웃리치 활동을 했다. 그가 하는 일과 겹치는 게 많았다. 쪽방에 사는 주민들도 대부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기에 사망 시 무연고자로 시신을 위임할 때가 많다. 대화는 자연스레 장례 이야기로 흘렀다. 그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가 갖는 의미를 아래와 같이 말했다.

"장례라는 절차가 겉으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산 사람이 장례라는 형식을 통해 살아 있을 때 잘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추억을 곱씹고 마음의 위안을 받잖아요. 어떤 분들은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못할까 봐 불안해해요.

만약에 불이 난 건물에 갇혔다고 칩시다. 그런데, 소방관이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든든하잖아요. 소방관의 '인기척 소리'가 들리면 안심을 하죠. 마찬가지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분이나 쪽방에 계시는 분들에게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는 '나눔과나눔'은 '인기척'이에요."

되도록 장례식장에는 안 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의 말 중, '인기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역시 수많은 인기척 때문에 안심하고 사는 거니까. 결국 7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치르는 장례식에 가기로 결심했다. 장례식장은 시립벽제승화원이다.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이 함께한 장례

장례가 끝나고 무연고자 두 분의 유골함이 봉안되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장례가 끝나고 무연고자 두 분의 유골함이 봉안되기 위해 운구차에 실렸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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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장례는 두 분이었다. 김○○님(남·1968.3.6), 권○○님(여·1951.6.13).

김○○님은 서울시 동대문구의 한 여관에서 살았다. 2018년 6월 5일 새벽, 동대문구의 길가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미상이고, 누나가 한 분 계셨지만 시신 위임을 묻는 우편에 답변이 없어 무연고자가 되었다.

권○○님은 거주지가 불분명하신 분으로 2018년 7월 4일 경기도 남양주의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사인은 뇌경색으로 인한 패혈증이고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시신을 위임해 무연고자가 되었다.

시립벽제승화원에 도착하니 마침 두 분의 운구가 화장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인데 관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몸은 '얼음'이 되었다. 죽은 사람의 관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관을 둘러싼 사람들은 죽은 분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옆에 있는 다른 관에는 상복을 차려입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말이다.

두 분의 관을 화장로로 들여보냈다.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장례지원 지정 단체인 '우리의전'의 관계자 두 명,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염불봉사단 5명, '나눔과나눔'의 자소리 팀장, 배민 활동가, 자원봉사자 한 명, 그리고 나. 11명이 두 분 무연고 사망자의 유족인 셈이다.

고인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2층 유가족 대기실로 올라갔다. 30여 분 넋을 기리는 염불에 함께 했다. 생소했고, 마음은 착잡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슬픈 마음과 위로를 전하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구경꾼(?)으로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화장이 끝나고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 했다. 수골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권○○님의 수골을 쓸어 담으며 유리편 너머의 화부가 마이크로 말했다.

"장애인이었답니다. 여기 보이는 것이 인공관절입니다."

내 몸은 한 번 더 '얼음'이 되었다. 인공관절을 하고 장애인으로 외롭게 살다가 가족이 장례를 치르지 못해 이곳으로 오셨다. 사는 동안 그분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만큼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두 분의 유골함에는 2018-188, 2018-189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2018은 올해의 연도이고 뒤에 쓰인 188, 189는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서울시에서 치른 무연고 사망자의 숫자다(나눔과나눔이 치른 장례는 이보다 5명이 적은 184명이다).

유골함은 이승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기 위해 밥과 국, 몇 가지 반찬이 차려진 상 위에 놓였다. 유골함 옆에는 영정사진 대신 지방을 세웠다. 시립벽제승화원에는 '유택동산'이라 곳이 있다. 그곳에서 고인의 이름이 쓰인 지방을 태우는 것으로 장례는 끝났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다

유택동산에서 지방과 지전(노잣돈)을 태우는 모습. 장례의 마지막 순서다.
 유택동산에서 지방과 지전(노잣돈)을 태우는 모습. 장례의 마지막 순서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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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나눔'은 "아픈 기억 마디마디를 매일 통증처럼 느낀다.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라는 위안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분들 가시는 길에 꽃상여는 아니어도 소박한 상여를 예쁘게 차려 보내드리고 싶다'는 포부로 2011년도에 장례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무연고자 장례를 치렀다. 올해부터는 '우리의전'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장례를 치른다. '나눔과나눔'은 구청을 통해 얻은 고인의 사연을 회원 게시판에 올린다. 장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 자원봉사자를 확인하고 유가족과 지인에게 참여를 독려한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후덥지근한 날씨만큼 마음이 착잡했다. '나눔과나눔'의 배민 활동가, 전략사업팀장을 맡고 있는 자소리 활동가와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했으나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눔과나눔'의 활동가들은 도대체 무슨 계기로 다른 일도 아니고 무연고자 장례를 치르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그 얘기를 듣고 싶어서 자소리 활동가를 붙잡았다.

"저는 마포구 망원동의 '릴라'라는 마을예술 창작소에서 2013년부터 음악회(거리공연)를 했어요. 노래를 만들어서 기타를 치고 불렀죠. 한편으로는 이주 청소년에게 기타를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제가 십대에 굉장히 방황을 많이 했거든요.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2014년 '릴라'공간에 '나눔과나눔'이 들어왔어요.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어요. 2015년 12월에 홈리스 추모제에 참여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2016년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죠. 현재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왜 이렇게 무연고 장례가 많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만히 보니 장례 안에 온갖 사회문제가 들어있는 거예요.

처음엔 무연고자가 노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50~60대가 가장 많았어요. 100세 시대에 50~60대면 젊은 축에 속하는 나이죠. 그렇다면 50~60대가 가장 많은 이유는 뭐지? 과연 자연사일까? 아니더라고요. 앞서 말한 온갖 사회문제란, 고립과 빈곤, 노숙, 철거, 불안정한 주거생활 등이 그 배경이죠.


한국 사회는 IMF를 겪으면서 빈곤층이 급속히 늘어나요. 직업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고 단절되고…. 그런 생활이 지속되니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시는 거죠. 오랫동안 단절된 가족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유가족은 당황스럽죠. 장례비용도 부담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신을 위임하는 거예요. 가장 가슴이 아플 때는 영아 무연고 사망자가 올 때예요. 며칠 전에도 영아 사망자가 왔거든요.

처음에는 장례 치른 얘기를 아내에게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울다가 나중엔 화가 났어요. '사람이 사랑해서 살다가 나중에 헤어지면 그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울지 않아요. 이 일을 하면서 더 굳게 마음먹었어요.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무연고 사망자 장례지원을 알릴 수 있죠.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장례 치르면서 쓴 글을 묶어서 책을 내고 싶어요."


'나눔과나눔'이 치른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5년에 40명이었다. 2016년에는 183명, 2017년에는 288명으로 가장 많았다. 서울시의 통계는 이보다 더 많다고 한다. 2년 6개월 동안 늘어나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자소리 활동가는 더욱 단단해졌을까. 아니면 무연고 사망자를 양산하는 사회를 원망하고 있을까.

이야기하는 중간중간에 자신이 겪었던 질풍노도의 삶을 풀어놓았다. 당시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미산 마을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치유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안정된 삶을 찾았다고 한다.

'나눔과나눔'을 통해 장례를 치른 분들도 공동체를 만났다면, 더 견고한 사회 안전망이 있었다면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다. 죽은 이를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는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때로는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나눔과나눔'의 장례지원은 '인간의 존엄성'과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하는 활동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존경스러운 이유다.


태그:#무연고 사망자, #나눔과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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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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