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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규탄연대
▲ 레진규탄연대 레진규탄연대
ⓒ 레진규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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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들이 '힘없는 개인이 뭘 할 수 있냐', '작가라는 게 원래 힘들고 고달픈 직업이다' 등의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불행을 긍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들이 업계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다."

'웹툰 블랙리스트 의혹', '웹소설 일방 종료' 등 논란에 대해 레진엔터테인먼트(이하 레진)가 12일 작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레진은 한희성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과 함께 '레진코믹스 작가연대(레진규탄연대)'와 상호 합의한 사항을 공개했다.

대표의 공식 사과와 함께 작가들이 받아낸 합의는 ▲미치 작가와 은송 작가에 대한 레진의 소송 취하 ▲지체상금제도(지각비)로 차감한 3억 4천만 원과 지연이자 전액 반환 등이다. 이외에도 불공정하다고 지적돼왔던 계약서도 변경된다. 연재 작가들을 옭아맸던 과도한 비밀유지조항이 표준계약서 수준으로 변경되고 계약서에 공정한 프로모션을 위한 조항 등이 들어간다. 이로써 앞으로 레진에서 연재할 작가들의 처우가 진일보한 것이다.(관련기사: 웹툰 1위 '레진' 대표, '웹툰작가 블랙리스트' 인정·사과)

이 같은 사과와 합의, 계약서 변경은 거저 얻어낸 것이 아니다. 웹소설 일방 종료 논란은 지난해 8월, 웹툰작가 블랙리스트 의혹은 지난해 12월 제기됐다. 피해작가들이 혼자 싸우거나 숨죽이기보다 삼삼오오 모여 투쟁해 쟁취한 '승리'다.

어깨를 짓눌렀던 '레진 투쟁'의 무게감

작가들이 레진과 합의문에 서명하기 전날인 5일 레진규탄연대 소속 미치·은송·비담 작가 3인을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만났다. 블랙리스트 문건에 이름이 거론된 웹툰작가 은송은 "대표 명의의 사과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가들끼리 전화하면서 펑펑 울었다"라며 "지난 1년간 우리가 겪은 일들에 대한 분노, 피로도, 기쁨 등이 다 섞여 나온 눈물이다"라고 했다.

웹툰작가 미치에게 '레진 투쟁'은 업계 전체를 어깨에 이고 있는 것 같은 묵직함 그 자체였다. 그는 "은송 작가와 제가 레진과의 소송에서 지는 게 둘의 패배가 아닌 작가 전체, 업계 전체의 패배로 비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며 "웹툰 업계 전반에 '불공정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퍼지면 어쩌나하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라고 말했다. 그 압박감에서 이제야 벗어나게 된 것이다.

웹소설작가 비담은 "웹소설 사태가 있던 지난해 8월부터 약 1년의 시간이 흘렀다"라며 "웹소설, 웹툰 미정산, 블랙리스트 등 논란이 일 때마다 작가들은 대표의 사과를 요구했는데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대표가 사과했다는 점에서 작가들이 이룬 쾌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6개월에서 1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투쟁의 시간이었다. 블랙리스트로 이름이 거론되고 소송을 당하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쳤다. 레진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한 달쯤 지났던 2월 어느날 은송 작가는 집 계단에 올라가다 말고 쪼그려 앉아 30분을 멍하니 있기도 했다. 하지만 버텼다. 그 원동력은 '레진규탄연대'였다.

웹툰·웹소설 작가 120여 명이 모인 '레규연'... 업계 최초

레진규탄연대(이하 레규연)는 지난 1월 웹툰작가·웹소설 작가 120여 명이 모여 만든 연대체다. 레규연의 시작은 지난해 8월 웹소설 강제종료 사태였다. 웹소설 작가 일부가 서비스를 강제 종료한 레진에 항의했고 이에 연대하는 웹툰작가들이 SNS를 통해 레진을 비판하는 글들을 올렸다. 웹툰·웹소설 작가들을 잇는 선이 생긴 것이다.

선은 점차 굵어졌다. 연대로 묶였다. 약 4개월 뒤인 지난해 12월 은송·미치 작가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는 기사가 나가고 난 뒤, 두 작가는 '레진블랙리스트반대 연대'라는 SNS계정을 만들고 함께 연대해 줄 작가들을 찾았다. 그렇게 30~40명의 작가들이 단체카톡방에 모였다.

논란이 이어지자 레진은 작가간담회를 열어 설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웹소설 작가들은 제외했다. 이를 계기로 간담회가 열리는 당일 레진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자는 이야기가 웹툰·웹소설 작가들 사이에서 나왔고 시위를 준비하는 오픈채팅 방이 생기게 됐다. 이 방에 '레진블랙리스트 반대 연대'와 웹소설 작가 등이 들어오면서 '레진규탄연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레규연은 레진에서 웹툰, 웹소설을 연재했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 혹은 그 마저도 없는 타플랫폼 연재 작가들이 모인 것으로 업계 최초다. 플랫폼이나 에이전시 등을 통해 계약을 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웹툰·웹소설 작가들이 뭉치기 쉽지 않은게 사실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있는 이들이 단단히 뭉친 것은 같은 업계에서 일한다는 동지의식이었다.

비담 작가는 "두 작가가 당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다들 뭉쳤던 것 같다"라며 "웹툰 작가를 홀대하는 플랫폼이 웹소설 작가를 제대로 대우할리 만무하다. 웹툰, 웹소설 단어만 달라질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실제로 레진의 여러 제도들을 다른 플랫폼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한파 속 시위와 연재 종료 등으로 레진과 맞서 싸운 레규연
레진규탄연대에서 만든 팸플릿 등 자료
▲ 레진규탄연대 레진규탄연대에서 만든 팸플릿 등 자료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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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규연의 첫 활동은 체감온도 영하 20도에 달하는 추위를 견뎌내는 일이었다. 웹툰·웹소설 작가와 독자 등 100여명은 지난 1월 11일 서울 논현동 레진 본사 앞에 서서 "레진은 해명하라"라고 외쳤다. 4시간 넘게 이어진 시위가 끝나자, 500ml 페트병에 든 생수는 쾅쾅 얼어있었다.

비담 작가는 "레규연 작가님들은 혹여 시위로 화장실이 더러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레진 사옥 화장실 변기까지 닦았다"라며 "외국어에 능통한 작가님들은 레진 관련 기사들을 번역해 해외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비공개 간담회가 열렸던 같은 달 16일, 레규연은 1인시위에 나섰다. 은송 작가는 이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은송 작가는 "레규연 작가님들은 간담회가 열리는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모여 1인 시위 순서와 간담회 때 할 질문 등에 대해 논의했다"라며 "규모가 꽤 있는 카페였는데 50여 명의 연대 작가님들로 가득 차있었다"라고 했다. 그는 "한 쪽에서는 작가님들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간담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블랙리스트로 지정하고 압박을 줬던 기업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 사실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저와 함께 시민들에게 팸플릿을 나눠주고 1인시위를 해준 연대 작가님들이 계셔서 간담회장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미치 작가도 "간담회 때 레진 측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블랙리스트는 없다'라고 이야기했다"라며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난 피해 준 적 없다'라고 당당히 말한 것이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고 당시의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그 장면들이 상처로 남았다"라며 "혼자였으면 버티지 못 했다. 레규연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라고 했다.

오프라인에서만 연대한 게 아니다. 온라인상에서도 생계를 건 연대가 이어졌다. 블랙리스트 논란이 제기됐던 지난해 12월 웹툰 공동작업팀인 킬러웨일 작가들이 두 작가에 대한 연대의 뜻으로 장기휴재 선언을 했다. 이를 시작으로 <도령의 가족> <새디스틱 뷰티> <어니언도쿄> 등 다수 작품들이 연재 중단에 들어갔다. 연재로 수익을 얻는 작가들에게는 생계를 건 선언이다. 인기 작품의 경우 수천 만 원 상당의 수익을 포기하는 행위다.

비담 작가는 "작가들이 휴재를 공지하면서 '작가의 말'을 통해 레진 관련 청와대 청원을 참고해달라는 식의 내용을 남겼는데 사라졌다"라면서 "이 이슈에 관심있는 독자가 아니면 작가들이 무책임하게 연재를 그만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작가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연재 중단을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동료 작가들의 생계를 건 연대는 피해 작가들을 일어서게 하는 힘이었다.

이 같은 연대의 결과는 레진과의 합의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합의문에는 블랙리스트 피해 작가에 대한 사과만 있지 않다. 갑작스러운 웹소설 서비스 종료에 대한 사과, 지각비 반환, 계약서상 불공정한 부분들의 수정 등이 들어갔다.

비담 작가는 "미치 작가님은 지각비를 거의 내지 않았다"라며 "그런데도 레진과의 합의 테이블에서 위 내용들을 소송 취하보다 더 강조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이제 레진에서 연재를 하지 않겠지만, 지금 연재를 하고 계시거나 앞으로 하실 작가분들의 처우 개선이 우리에게는 중요했다"라고 덧붙였다.

"뭉치면 강하다"..."언제든 시위할 준비 돼 있어"

'레진 불공정행위 피해작가연대' 소속 작가와 독자 등 100여명이 11일 오후 웹툰 서비스업체 레진코믹스의 논현동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열어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웹툰·웹소설 작가들,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시위 '레진 불공정행위 피해작가연대' 소속 작가와 독자 등 100여명이 11일 오후 웹툰 서비스업체 레진코믹스의 논현동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열어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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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규연은 작가들에게 '승리의 기억'이 됐다. 미치 작가는 "누군가는 말해봤자 안 바뀐다고 이야기한다"라면서 "하지만 이번 레규연 활동을 하면서 뭉치면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바꾸려면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했다.

은송 작가도 "작가 개개인이 연결돼, 큰 힘으로 발전해 업계를 바꾼 시발점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라며 "혹여 다른 플랫폼이나 다른 업계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 사례를 보면서 힘을 얻어갔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비담 작가는 "웹소설 사태 때는 외면하거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던 언론, 국회, 정부기관, 사회단체 등이 웹소설·웹툰이 뭉치니까 관심을 보여줬다"라며 "을지로위원회, 참여연대, 경제민주화네트워크, 민변 등 많은 단체가 도와줬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뭉칠 때 강해진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다.

세 작가는 레진에게 전하는 경고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미치 작가] "다시는 작가들을 고소하지 말아라."

[은송 작가] "레진에서 남아 연재하는 작가님들께 제발 잘해달라. 우리는 언제든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비담 작가] "불공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우비를 공동구매 할 것이다. 여름 폭우에도 시위할 준비는 돼있다."




태그:#레진, #한희성, #레규연, #웹툰 블랙리스트, #웹소설 강제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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