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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하는 '덕후'

최근 언론 보도에서 본 "'역사덕후',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대목은 그대로 지나치기가 어렵다. '덕후'란 일본어인 '오타쿠, 御宅(おたく)'의 발음을 변형시켜 만들어진 용어다. 보면 볼수록 괴이한 조어(造語)다.

우리의 언론 기사 중에는 '축구 덕후'부터 시작하여 '예능 덕후', 'TV 덕후', '아이돌 덕후' 그리고 '명품백 덕후', '빵 덕후'까지 실로 온갖 '덕후'가 출현하고 있다. 한자까지 붙여 '덕후(德厚)'라고 변형되기도 하고, '덕질'이란 말도 파생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역사 덕후'? 형용모순이고 모욕이다

'역사 덕후'. 이 말은 형용 모순이고 그 자체로 모욕이자 치욕의 표현이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일제 강점기 식민지 역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 역사에 관심을 크게 가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민족적 비극을 잘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듯 우리 민족사에서 특정한 의식과 가치관을 지니는 '역사'라는 용어와 일본에서 비롯된 '덕후'라는 용어를 결합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무신경함의 극치라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일국의 대통령을 수식하는 용어로서 사용하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일에 속한다.

특히 서두에 언급한 보도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공공언어 개선 추진방안' 보고와 관련된 기사다. 당시 문 대통령은 새롭게 만들어져 국민들이 알기 어려운 영어 용어나 여러 가지 조어를 최대한 우리 한글과 쉬운 용어로 바꿀 것을 주문한 바 있었다. '역사 덕후'라는 용어는 그 취지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언어판(言語版) 식민지 근대화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언어의 사회성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대로 한다면, '동해' 명칭 문제도 세계에서 다수에게 통용되는 '일본해'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곧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언어판(言語版)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지금도 뉴라이트 인사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관되게 주창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영향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이 발전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모두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일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국가 차원의 올바른 언어 정책 시행이 시급하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재하기 어렵고, 끝내 멸망하게 된다. 정체성이란 민족이 유지하기 위한 생명이며, 민족으로서 반드시 끝까지 견지해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그 정신 그리하여 정체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란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어의 사회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민족 정체성의 표현인 언어란 반드시 국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규범화해나가야만 한다.

프랑스어가 프랑스 국어로서 그 아름다운 가치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설치 등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심에 의한 치밀한 언어 정책 덕분이다. 정부 각 부처마다 '전문용어위원회'가 설치되어 새로 유입되는 외국어나 외래어에 적절한 번역용어를 지정하거나 새로 출현한 물건이나 개념을 지칭할 단어를 제정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강력하고도 올바른 언어 정책 시행이 시급하다.

'덕후' 용어의 범람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 사용에 대한 언론 방송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 이 분야 종사자들의 주의가 각별히 요청된다. 그리고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긴 비극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언어를 사용하고 가꿔나갈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태그:#역사덕후 문재인, #덕후, #언어, #언론방송,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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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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