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영화 '랜드 오브 마인' ⓒ 싸이더스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끔 사람들과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다행히 집근처의 지하철이 서울시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 그 곳으로 대피하면 된다는 사람, 도로가 막혀있을 테니 자전거로 탈출을 감행하겠다는 사람, 차라리 산으로 올라가 동굴 같은 곳에 숨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사람 등등. 공통점은 대부분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인데 나의 대답은 다르다. 보통 나는 가족들에게 전화해 작별인사를 나누고 사둔 술중 가장 비싼 것을 마시고 취해 잠든 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대량살상 무기가 동원되는 현대전에서 과연 살아남는 게 가능은 할까 싶어서다. 차라리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음이 다가오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또 다른 이유는 전쟁 이후의 세상을 마주할 자신이 차마 없기 때문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된 나라에서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에 오밀조밀 지어둔 원자력 발전소가 과연 전쟁통 속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사람이다. 전쟁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까지 파괴한다. 간접적으로나마 그 영향이 전후 세대에까지 이어져 올 만큼 힘은 막강하다. 듣자하니 한 보수 성향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다고 한다. '전쟁을 대비해 비상용품을 챙겨둘 필요가 없다, 그냥 밖에 나가서 여자들이 준비해 둔 것을 뺏으면 된다'.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 모양인데 이후는 어떨까. 나는 이런 정서가 보편이 된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영화 '랜드 오브 마인' ⓒ 싸이더스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난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전쟁 당시 독일군이 설치한 지뢰를 포로들이 직접 해체하도록 했던 실화를 다루고 있는데 영화에 등장하다시피 이 일을 맡은 이들은 대부분 소년병이었다. 그래서 <랜드 오브 마인>이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관람을 권하기는 망설여진다. 지뢰의 해체는 실패할 경우 사망 혹은 최소 끔찍한 신체 훼손이라는 결과를 전제로 한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에는 적어도 성인인 인물이 사망하거나 고통 받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에선 누가 봐도 어린 남자아이들이 카메라 앞에 선다. 그래서 작품 내내 캐릭터들이 지뢰를 만지는 모습을 보는 건 긴장 정도가 아니라 극도의 괴로움을 유발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길 반복했다.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 끔찍한 일이 어쩌다 발생했을까. 소년병들을 지휘해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맡은 덴마크 군인 칼은 책임자인 에베 대위에게 왜 숙련된 성인 포로들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보냈는지 항의한다. 그러자 대위는 전쟁에 나설 나이면 전후 처리도 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독일이 한 짓을 기억해, 우리는 훨씬 나은 거야'. 아마 당시 어린 소년들을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시킨 대부분의 덴마크 군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저 한 마디의 말이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버리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마주했던 적만큼 끔찍해지지 않는다면 모든 행동은 합리화된다. 인간성의 기준에 선함과 옳음이 아니라 거대한 악이 놓이게 된다. 그만큼 추악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영화 '랜드 오브 마인' ⓒ 싸이더스


그들은 독일인이다

전쟁에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 위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이 놓인다. 때문에 덴마크에서 벌어진 독일의 식민지배와 잔혹 행위가 성인인 군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대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들까지 치르도록 요구된다. 이들이 어리고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도록 만들거나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채 노역을 시켜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점은 고려 사항이 아니다. 소년병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사람이기 이전에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 소년병들을 처음 만난 칼은 유일하게 딱 한 명의 캐릭터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해서이다. 하지만 칼에게 그 소년병은 미안함조차 느낄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그래야지 그는 소년, 아이, 양심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잔혹한 독일인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적대국의 사람은 개별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단지 그 나라의 국민, 혹은 그로 표상되는 '악한 존재'로만 여겨지게 된다. 그 악한 존재는 어리든 아프든 신체가 불편하든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여 있든 상관 없이 어떻게 대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 방식이 비인간적일지라도. 이같은 극도의 대상화는 그만큼의 간극과 거리가 있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는 이 영화에서 사실상 악역을 맡은 에베 대위가 소년들과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 주로 등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후반부 겨우 생존한 몇 안 되는 소년들을 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정을 통보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독일인이야", "독일인들은 선량하지 않아"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영화 '랜드 오브 마인' ⓒ 싸이더스


죽음이 유일한 탈출구인 삶

하지만 근거리에서 소년들을 지휘했던 칼은 달랐다. 그는 어린 소년들이 사지를 넘나들며 지뢰를 해체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실수로 쥐똥을 먹고 아끼던 동료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의 초반 그는 몸이 아파 지뢰 해체 작업에 나설 수 없다는 호소에 독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말로 대응한다. 그리고 결국 그 캐릭터는 지뢰 위에 구토하다 폭발로 부상을 입고 사망하고 만다. 나는 그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어떤 짓에 동참하고 있는지 깨달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강력한 적대의 감정이 무엇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점차 소년들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물론 이 과정이 위기에 봉착하는 순간도 등장하지만 그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자신도 원치 않게 파괴되었던 인간성을 회복해 나간다.

사족과 같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글을 닫고자 한다. <랜드 오브 마인>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다수 등장하지만 나의 뇌리에 가장 깊숙이 박혔던 순간은 소년병 에른스트의 마지막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인 웨너를 지뢰 해체 작업도중 잃고 만다. 여기에 상황이 엎친 데 덮친 겪일까 소년들에게 호의를 보이던 칼도 실수로 미처 해체되지 못한 지뢰에 자신의 개가 죽자 태도가 돌변하고 만다. 태어나 평생을 함께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죽음을 향한 극한의 공포가 되돌아온 시점, 에른스트는 지뢰 매설지역에 들어간 소녀를 구하는데 동참하지만 다시 안전지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소년병과 칼을 등지고 지뢰 매립지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

영화 '랜드 오브 마인' ⓒ 싸이더스


돌아올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주인공들에게 짓는 에른스트의 표정은 묘하다. 처음에는 주저하는 듯하다 이내 굳은 결심이 얼굴에 드러나고, 이어서 안도감과 해방감 그리고 회한이 교차하여 나타난다. 사실 앞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에 대해 줄줄이 풀어썼지만 사실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소년이 그런 표정을 하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면, 우리가 그 일을 반복해야할 이유가 세상에 하나라도 있을까. 전쟁이 앞으로 살아가야할 시간이 더 많을 누군가가 이미 삶에 질려버리고 죽음을 유일한 탈출구로 삼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저 장면에서 가슴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잊지 못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 전쟁 인간성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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