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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터에서 말살림을 돌아보면 아직 우리 손으로 새말을 짓거나 가꾸는 힘이 모자라지 싶습니다. 손수 짓거나 스스로 가꾸려는 마음이 퍽 모자라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오는 분이 많은데,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말을 지어서 쓰자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구나 싶기도 해요. 정치나 행정, 초·중·고등학교하고 대학교뿐 아니라, 글을 쓰는 이까지, 제 나름대로 깜냥을 빛내어 말 한 마디를 새롭게 길어올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서양 삶말이 있습니다. 저는 '속담(俗談)'이 아닌 '삶말'로 고쳐서 쓰는데요, 한자 '속(俗)'은 '속되다'처럼 여느 사람들을 낮거나 하찮게 보는 마음을 담아요.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는 말은 낮거나 하찮게 보면서, 힘을 거머쥔 이들이 쓰는 한자를 높이려는 기운이 서린 '속담'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속담이란 수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삶자리에서 길어올린 짧은 말이에요. 삶을 지으면서 느끼거나 배운 이야기를 짤막히 간추렸기에 속담이라면, 이는 '삶이야기', 곧 '삶말'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삶말은 때로는 '삶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양 삶말 "새 술은 새 부대에"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새로 맞아들이는 살림에 새로운 말을 붙여야 어울리겠구나 싶어요. 현대문명이라는 새로운 살림을 굳이 영어나 일본 한자말로 이름을 붙이기보다 우리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볼 수 있습니다. '삐삐'나 '손전화·집전화' 같은 말이 태어나듯이, '집밥'이나 '손글씨·손톱꽃' 같은 말도 태어나듯이, '나들목'이나 '맞이방·마을쉼터' 같은 말도 짓듯이, 서둘러 바깥살림을 들이기보다는 찬찬히 바깥살림을 헤아려 우리 나름대로 즐길 길을 살피면 얼마든지 멋지거나 좋거나 알맞거나 훌륭하거나 곱게 새말을 우리 슬기로 지을 만합니다.

서두르기에 한국말로 새롭게 짓는 길을 안 걷는달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바깥살림을 끌어들이려 하다 보니, 스스로 말을 짓는 마음을 잊는달 수 있어요. 한동안 느긋이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마음을 기울이면, 누구나 어떤 것에든 알맞게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삶말에서도 '부대(負袋)'는 일본 한자말이에요. '포(包)·포대(包袋)'도 한국말은 아닙니다.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말은 따로 있습니다. 예부터 누구나 흔히 쓰던 한국말이 있으니, 서양 삶말을 우리 삶자리로 받아들일 적에도 이 대목을 더 헤아릴 수 있으면 좋아요.

한국말은 '자루'입니다. "새 술은 새 자루에"라 하면 됩니다. '자루'는 쓰임새가 넓으니, '비닐 봉지'는 '비닐 자루'라 하면 되어요.

 홈리스. 노숙자. 노숙인. 떨꺼둥이. 한뎃잠이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먹고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어떤 이름으로 가리켜야 알맞을까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불쑥 '홈리스(homeless)'라는 영어가 들어왔고, 왜 영어를 쓰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나타나자 '노숙자(露宿者)'라는 한자말로 이름을 바꾸더니, '-자(者)'라는 한자가 낮춤말이라 하면서, 다시 '노숙인(露宿人)'으로 바꾸었지요.

서둘러 말을 들여오려 하니 이렇게 뒤죽박죽이 됩니다. 더구나 서둘러 들여온 말을 놓고서 제대로 가다듬거나 손질하거나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데요, 이리저리 바꾸어도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홈리스·노숙자·노숙인'을 바라보던 어느 두레에서 '떨꺼둥이'라는 오랜 말이 있는데 구태여 영어나 한자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밝힌 적 있어요. 서울에서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지내는 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두레에서 '떨꺼둥이'란 말을 찾아냈지요.

그런데 '-둥이'란 말끝, '떨꺼-'란 앞말, 이 두 가지가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어요. 말은 삶결을 고스란히 담는데, 이러한 말결을 바라보지 못할 적에는 오랜 말이 있어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안 받아들이더군요.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데·한뎃잠'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한뎃잠이'란 낱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한데에서 지내니 '한뎃잠이'라 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어 '한뎃잠벗·한뎃잠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새말짓기를 멈추어도 됩니다. '떨꺼둥이·한뎃잠이'로 넉넉하다고 여겨도 되지요. 그리고 더 헤아리면서 새말을 지어도 됩니다. 길지 않으면서 뜻을 잘 담을 만한 결을 살핀다면, "길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비슷한 틀로 다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리면 되어요. 이를테면 "들에서 사는 사람"이나 "집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자, 들에서 사는 일을 무엇이라 할까요? '들살이'라 합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면 무엇이라 할까요? '집살림'이라 합니다. 들에서는 '들살이·들살림'이지요. 집에서는 '집살이·집살림'입니다. 그러면 '들살이·들살림'에서는 '들살이벗·들살이님'에다가 '들살림이·들살림벗·들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집살이·집살림'에서는 '집살이벗·집살이님'하고 '집살림이·집살림벗·집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요.

이제 길에서는 '길살이·길살림'이라는 말을 얻어요. 이다음으로는 '길살이벗·길살이님'하고 '길살림이·길살림벗·길살림님' 같은 말을 얻습니다.

말을 새로 짓기는 쉽습니다. 삶을 새로 짓기도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늘 어렵습니다. 씨앗을 심는 손길도 처음에는 낯설거나 어려울는지 몰라도, 한 걸음 딛고 두 걸음 딛다 보면 매우 쉬운 줄 알 수 있어요. 옛날부터 누구나 씨앗을 심어 흙을 보살피면서 먹을거리를 얻고 누렸어요. 이처럼 말이라는 씨앗도 누구나 마음밭에 심어 즐겁게 돌보면서 새롭게 열매를 거두듯, 알맞거나 좋은 새말을 얻을 만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을 새로 지으면, 곁따라 다른 새로운 말을 두루 얻어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생각해 보셔요. '길살이벗'이나 '길살림님'인 이들은 길에서 지내는 이웃이니 '길이웃'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길에서는 '길삶'을 짓습니다. 길삶을 짓는 이를 두고서 수수하게 '길벗·길님'이라 해도 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굳이 '길살이벗·길살림님'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단출히 '길벗·길님'이라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수수하며 단출한 이름을 쓸 만했어요. 집에서 살건 길에서 살건 모두 같은 사람이요 목숨이며 사랑이거든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길벗이나 길님이라 한다면, 이때에 몇 가지 새말을 저절로 얻습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집벗·집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한자말 '가족'이든 한국 한자말 '식구'이든 고이 내려놓고서 오늘날에 걸맞게 새로운 이름으로 서로 부를 수 있습니다. '집벗님'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눈을 돌려 숲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별에는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푸나무가 있고, 벌레하고 짐승하고 새가 있어요. 풀밭을 바라보며 '풀벗·풀님·풀벗님'을 그립니다. 숲을 마주하며 '숲벗·숲님·숲벗님'을 생각합니다.

이름을 불러 주셔요. 아무 이름이나 부르지 말고, 마음을 담아 사랑으로 지은 이름을 불러 주셔요. 이름을 지어 보아요. 아무 이름이나 짓지 말고, 생각을 실어 슬기롭게 이름 하나 지어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늘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듣는 이름은 늘 우리 생각을 북돋웁니다. 흔한 살림이나 작은 세간에도 아무 이름이 아닌, 제대로 마음을 쏟아서 이름을 붙일 적에 삶이 새롭게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이웃한테 어떤 이름을 붙이면 즐거울까요? 벗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 반가울까요? 우리 이름은 우리 삶이요 사랑이며 슬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8년 6월호에도 함께 싣습니다.



태그:#숲에서 짓는 글살림, #숲말, #한국말, #우리말, #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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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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