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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들어와 학생운동 내부에서 싹이 터서 자라난 NL 계열은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나왔다. 특별히 이 해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를 투쟁의 계기로 삼아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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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학생운동에서의 첫 목소리는 3월 중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NL계열 후보로 나온 김중기에게서 나왔다. 그는 '남북청년학생 체육대회와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남북학생회담을 6월 10일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은 북한 학생들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오고, 남한 학생들은 한라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와서 8월 15일에 만나 대동제를 열자는 것이었다. 학생체육대회는 9월 15일부터 17일에 걸쳐 남의 서울대나 북의 김일성대에서 열자고 했다. 서울올림픽이 9월 17일 개막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은 서울올림픽을 통일의 축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서울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에게 받아들여져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라는 구호로 확장됐고 이 깃발 아래 전국 대학생들의 '조국통일운동'이 뜨겁게 타올랐다. 전대협은 이 열기를 모아 6월 9일 연세대에서 '6.10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이 집결을 차단하자 전남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로 분산 개최하여 오히려 열기를 확산시켰다.

6월 10일 연세대에서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이 열렸다.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이날 출정식에는 재야에서 문익환 민통련 의장, 지선, 진관 스님 등 각계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출정식이 끝나고 '통일선봉대'의 지휘에 따라 대학생 수만 명이 연세대학교를 출발해 판문점을 향해 행진을 벌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대학생들은 홍제동 부근에서 경찰의 봉쇄에 막히자 수천 명이 8차선 도로에 들어 누워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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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을 남북공동 주최로"

대학생들의 이러한 통일운동은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우선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 김대중은 "정부가 남북학생회담을 주선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영삼의 민주당도 동조했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과 노태우 정부도 학생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생들의 남북 교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대화 창구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처신을 택했다.

이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독려하며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치던 정부로서의 고육책이기도 했다. 앞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 등 서방이 불참하고, 84년 LA올림픽은 그에 대한 소련의 보복으로 동구권이 불참하는 반쪽 올림픽에 그쳤었다. 그래서 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에 대한 기대는 더욱 깊었다. 심지어 노태우 대통령은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선언)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편 재야 쪽에서는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이 통일 문제를 가장 선도적으로 치고 나왔다. 민통련은 이미 2월에 문 의장의 주창에 따라 '통일위원회'(위원장 김병걸)를 구성하고 통일문제에 대해 대중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6.10남북학생회담'을 들고 나오자 이에 대해 발 빠르게 움직여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등 원로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었다. 또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단체 68개가 연대하여 '조국통일의 대업을 앞당기기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여기에는 민청련도 참여했다.

NL과 거리 둔 민청련 지도부

그런데 민청련의 남북학생회담 지지 열기는 학생들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이는 민청련 지도부가 NL계열 학생운동에 대해 지지하지 않은 것과는 별도로,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운동 슬로건에 대해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지도부는 4.26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고, 특히 광주에 기반을 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 정세 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혀내는 투쟁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런 시기에 통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투쟁 역량을 분산시키고 전열을 흐트러트릴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광주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장 다가온 올림픽 이슈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심수 문제라든지 민중생존권 문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강했다. 그래서 광주를 투쟁의 1순위에 놓더라고 적어도 통일 문제가 그 다음 순서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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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림픽에 대한 민청련의 태도는 민중 생존권을 도외시하는 행사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전면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올림픽이 가진 반민중성을 폭로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학생들의 '공동올림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따라서 민청련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열기가 뜨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NL 학생운동에 대한 김성환 의장의 분석은 이러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4.19에 뒤이은 전 민중적 변혁의 열기가 정점에 도달한 '혁명'에 버금가는 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군사독재 정권은 사실상 흔들림이 없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자성이 운동세력 전반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이 미국이라는 존재였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규정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규정력에 착안하는 순간, 그 미국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있는 강력한 대항력으로서 북한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NL에서 '한국 사회의 변혁을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학생운동에서 막연하게 대안으로 보아온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적 대안체제인 소련 안에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즉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가 벌이고 있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소련이 진보적 대안 체제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었다.

이래저래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는 여러 계기들이 등장했고, 그것이 학생운동에서 NL이라는 노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김성환 의장은 그러한 계기들을 인정하면서도 김영환이 <강철서신>에서 이미 역사적으로 사실 규명이 완료된 박헌영에 대해 그가 '미제의 간첩'이라며 북한 측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운동 행태에 대해 찬성할 수는 없었다.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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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냐 통일이냐    

민청련 안에서 벌어진 논쟁의 양태는 6월에 간행된 <민주화의 길> 18호 논조에 반영됐다. 즉 투쟁 방침으로 광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민중생존권 지원투쟁 3가지를 제시했다. 운동 세력 전반을 아우르면서 단결을 지향하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이러한 나열식 투쟁방침은 현존하는 여러 경향성들을 그저 백화점식으로 모아놓은 것일 뿐 선명한 지도지침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때 올림픽을 두고 벌이던 내부 논쟁 중 누군가가  '운동적 패배주의냐, 패배주의적 운동이냐'라고 자조적으로 내뱉기도 했다. '운동적 패배주의'에서 '운동'이란 스포츠를 가리킨다. 온 민중이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는 판에 우리도 잠시 쉬고 그저 즐기자는 비관론이었다. 또 '패배주의적 운동'에서 '운동'은 민청련 운동을 뜻했는데 대중들이 열렬하게 즐기는 마당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청련 지도부의 내부 논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표현된 문구도 상당히 정치적으로 걸러진 표현을 사용했다. 즉 성명에서는 "우리는 애국 청년학생들의 열렬한 통일에의 의지로 추진되고 있는 남북학생 교류가 백번 정당함을 확인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6.10남북학생회담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길>에 실린 정세분석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공비리 척결투쟁을 중심으로 두어 올림픽 이후에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하고... 올림픽이라는 계기에 의해 활성화된 통일운동의 수준을 선도적인 선전전을 통해 유지하고, 학생들이 주장했던 내용이 좀 서툰 점이 있다 해도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이 기층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내용을 찾아 전 대중으로부터 적극적 호응을 받도록 한다... 올림픽 기간까지는 올림픽의 파급효과를 극소화할 수 있는 대처와 행사를 마련하되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감안하여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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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내부에서 성장한 NL

그러나 민청련의 조직 구성원은 각 대학 출신자들이었고, 따라서 당시 각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민청련 활동가들에게도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여러 계기들'은 강렬했다. 다시 말해서, 민청련 내부에서도 NL 계열의 노선에 대한 동조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1988년 6월에 들어서자 NL 노선을 자기 노선으로 삼는 민청련 활동가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 또한 민청련이 발행하는 기관지를 통해 반영됐다. <민주화의 길>에는 "조국통일운동의 신기원을 열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민중신문>에는 "공동올림픽은 민족대단결의 신기원" "공동올림픽으로 통일에의 한걸음을" 등 지도부의 방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논조의 기사들이 점차 지면을 차지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민청련의 노선과 민청련의 지도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내적 계기를 만들어나갔다.


태그:#민청련, #6.10남북학생회담, #공동올림픽,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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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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