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종서.

영화 <버닝>으로 영화 데뷔를 알린 배우 전종서. ⓒ CGV아트하우스


지난달 31일, 영화 <버닝>의 공식 홍보 일정이 마무리 됐다. 흥행 성적은 다소 아쉽다지만 이 작품이 남긴 몇 가지의 유산은 분명해 보였다. <시> 이후 8년 만에 복귀한 이창동 감독은 한국 상업영화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는 독창적인 개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영화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배우 전종서의 발견이 그렇다.

제 71회 칸영화제 기간 중 만났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첫 오디션에 첫 영화, 그리고 첫 주연으로 이제 막 영화계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진심으로 <버닝>을 껴안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삼청동의 모처에서 다시 한 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전종서가 만난 해미

<버닝>의 첫 장면은 한창 택배 일을 하는 종수(유아인)와 무심하게 상가 입구에서 춤을 추던 해미(전종서)가 종수를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쉽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인물들을 조명하며 영화는 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일들을 하나씩 암시한다. 분노를 가슴에 안고 사는 종수, 그리고 해미와 종수 사이에 끼어들어 일종의 게임을 즐기는 벤(스티븐 연)이 지극히 세속적 인물이라면 해미는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인생의 참 뜻을 찾으려 하는 일종의 구도자 같은 모습을 보인다. <버닝>은 바로 이 세 인물이 각각의 악기가 돼 앙상블을 이루는 합주 같은 영화인 셈.

해미의 정확한 직업명은 내레이터 모델. 그러니까 가게 홍보의 수단이자 사람들 앞에 전시돼 기꺼이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고된 서비스 업 중 하나다. 전종서는 "직업? 혹은 일?"이라며 해미의 업을 정의하기 위해 단어를 세심하게 골라 설명했다.

"내레이터 모델 그 자체가 생소했다. 그렇다고 제가 연기하게 될 이 캐릭터를 특별히 형상화시키진 않았다. 제가 만들어가야 하니까. (대본을 처음 읽고 났을 때) 귀엽고, 매력적이라는 느낌은 있었다. 시나리오에 이 친구의 성격이 어떤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진 않으니 처음엔 많이 헤맸다. 하지만 촬영할수록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제가 혼자 해미를 형상화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상대 배우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해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수가 주는 게 있었고, 벤이 주는 게 있었고, 해미의 방이 주는 게 있었다. 매회 마다 체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많은 스태프 분들이 만들어 주신 덕이기도 하다. 제가 만약 그런 머리, 그런 옷과 신발을 입거나 신지 않았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버닝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으로 훌쩍 떠난 해미는 자신의 방에 숱한 상징물을 남겨 두고 있었다. 가난하고 고된 경제 계급이지만 그 선에서 꿈 꿀 수 있는 소품들이 방에 가득했다. 아프리카 지도, 마그네틱, 책자들. 전종서의 방 또한 그러했다. "방 청소를 잘 하진 않는다"고 짐짓 웃어 보이면서도 그는 "인테리어 소품과 블라인드 색깔까지 신경을 많이 쓴다"며 "벽의 색은 올리브였다가 지금은 바이올렛과 인디 핑크, 그리고 말린 장미색인데 언제 또 마음의 변화가 있으면 바꿀 수도 있다"고 자신의 방을 잠시 묘사했다.

"해미의 가치관과 실제 제 가치관은 좀 다르긴 하지만 꿈을 꾼다는 건 닮아 있다. 해미처럼 저 역시 희망적인 꿈을 꾼다. 지금 제가 살아있는 순간이 가짜라고 믿고, 그 꿈이 현실이라고 믿을 때도 있다. 몽상하는 순간이 행복하거든. 동시에 전 굉장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삶의 자유로움, 그리고 불안함

칸영화제 당시 인터뷰에서 밝혔듯 전종서는 영화광이다. 단순히 취미를 넘어 그에게 배우라는 꿈을 갖게 한 매개체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캐나다에서 보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을 시기를 타지에서 보낸 그에게서 해미가 품고 있던 어떤 불안감을 주는 자유로운 감성이 엿보였다. 해미의 위태위태함은 알게 모르게 전종서의 이런 전사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해리포터>였고, 비디오로는 <악동클럽>이었다. 제 또래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왜 그걸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보다가 꽤 연체했다. 그걸 기점으로 다른 비디오들을 빌려보고, 반복해서 보다 또 연체하고. 나중엔 제 이름으로 대여가 안 돼서 부모님 이름으로 빌려야 했다(웃음). 어릴 땐 눈으로 부각되는 게 일단 배우니까 거기에 끌렸던 것 같다. 정말 단면인데 말이지... 한 장면을 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걸 그땐 몰랐으니까.  

초등학생 때 캐나다에 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기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은 한국에서 했고. 어릴 때부터 외국에 자주 가긴했다. 부모님께선 제가 여러 경험을 해보길 원하셨던 것 같다. 그림도 직접 보고, 먹을 것도 직접 먹고, 사람들도 직접 만나고 그랬다. 그 나라 가서 할 수 있는 경험을 직접 했던 건데 다양한 문화가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걸 그때 무렵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근데 그 영향이 좋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면도 있다. 마음이 항상 불안했거든. 진득하게 친구를 만나고 사귀고 싶었는데 환경이 바뀌곤 해서 그러지 못했던 아쉬움은 있다." 

일찌감치 접했던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 덕에 전종서는 쉽게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됐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너와 나 사이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고, 저 역시도 그렇게 대우받고 싶지 않다. (이 맥락에서 칸영화제 출국 당시 공항 사진 관련 기사이야기를 물었다-기자 주) 지금 상황에서 전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어떤 영향을 받는 것에 조심하고 있다. 관심과 비난의 화살은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감정이 진짜 나라는 사람에게 향한 것일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지극히 단면만 노출이 된 거잖나. 그런 면을 가지고 저를 바라본다 해도 저는 제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잘 알 것 같기에 (지금에선) 영향을 받진 않으려 한다."

 배우 전종서.

ⓒ CGV아트하우스


이제 막 20대 중반을 지나는 그에게 행복의 조건을 물었다. "행복을 찾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슬픔을 찾기도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불행을 자처하기도 하고, 분노를 찾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진 않으려 한다. 감정을 믿지 않고, 행복을 믿지 않는다. 슬픔이라는 건 어떤 순간 슬픔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많이 느끼고 교감하려 한다." 

<버닝>이 남긴 것들

쉽게 판단하지 않지만 기꺼이 소통하려는 자세. 이 감수성 충만한 배우가 첫 걸음을 뗐고, 이제 그 결과물인 <버닝>을 뒤로 할 때가 왔다. 무대인사, 인터뷰 등 공식 일정이 마무리 돼 가는 것에 전종서는 강한 아쉬움을 전했다. 첫 주연작, 이창동 감독의 발견, 칸영화제 진출이라는 외부의 평가 말고 그 스스로는 <버닝>으로 무엇을 얻었고, 어떤 과제를 안게 됐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얘기하기 벅찰 정도로 <버닝>은 제게 크다. 감독님, 스태프 분들, 아인 오빠, 스티븐 오빠, 많은 배우 분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는데 제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이 분들을 만났다는 자체가 정말 큰 경험이었다. 이 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일방적인 게 아니었다. 상대방의 진심을 느끼면서 첫 시작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정말 값진 것 같다. 일상에서도 사랑을 느끼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니까. 

이런 기적 같은 순간이 또 올까 싶다.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이 분들을 대했던 제 모습 그대로 임할 수 있을까. <버닝>을 통해 올바른 게 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그런 가치관을 갖고 건강한 마음을 갖고 연기에 임할 수 있다는 건 진짜 행운이다."

 배우 전종서.

ⓒ CGV아트하우스



전종서 버닝 유아인 스티븐 연 이창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