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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삼덕동 대구형무소 터, 텅 빈 채로 주차장이 되어 있다.
 대구시 삼덕동 대구형무소 터, 텅 빈 채로 주차장이 되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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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요리사는 돼지처럼 던져져 결박을 당했고 (일본) 기마병은 "죽여라!" 하고 소리쳤다. 대구에선 이미 3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8명이 다쳤다. (중략) 죄수 가운데는 15살 소년 두 명과 나환자(한센병 환자)도 한 명 있었다. 두 소년은 키가 너무 작아 판사가 이들의 정수리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구형무소엔 5000명이 수감돼 있었다. 재령에서 온 파이팅 박사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학생이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오는 것을 본 노인이 다른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라고 했다.


위의 인용문은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기독교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인 브루엔의 <아, 대구! 브루엔 선교사의 한국 생활 40년>(대구 남산교회, 2014)에 실려 있는 1919년 3월 8일 대구독립만세운동 목격담 중 일부이다.

대구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진홍 독립지사를 기리는 비석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세워져 있다.
 대구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진홍 독립지사를 기리는 비석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세워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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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당시 대구형무소에 5000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갇혀 있었다는 증언이 눈길을 끈다. 대구형무소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의 장진홍 의사 등 무수한 독립투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순국 성지이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는 안내판 하나 없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구형무소 터

의열단 단원 이원록도 장진홍 의사의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대구형무소에 3년 동안 갇혀 지냈다. 죄수번호가 264번이었다. 이때부터 이원록은 264의 한글 발음 '이육사'를 필명으로 삼았다.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절명하는 그 순간까지 민족지사의 양심을 지키며 꿋꿋하게 일제에 맞섰던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절창을 남겨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던 이육사를 기려 안동에는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이육사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인의 친필 원고와 안경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던 이육사를 기려 안동에는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이육사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인의 친필 원고와 안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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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다. 전남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은 1917년 서울 휘문의숙에 진학했다. 당시 휘문의숙에는 선배인 홍사용과 박종화, 후배인 정지용과 이태준 등이 다니고 있었다. 그는 3 .1운동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재차 만세운동을 모의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구형무소로 끌려와 여섯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도 이곳에서

부산의 항일투사 박재혁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 서장을 폭사시켰다. 그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단식 끝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1920년 12월 27일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또 다른 의열단원 최수봉 지사도 1921년 7월 8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시인 김영랑의 강진 생가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시인 김영랑의 강진 생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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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부자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 역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은 담양과 장성 일대에서, 아들 양상기 의병장은 화순 동복 일대에서 1908년 군사를 일으켜 활동했다. 그러나 끝내 일본에 체포되어 아버지는 1910년 5월 30일, 아들은 1910년 8월 1일 각각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제에 맞서 싸운 아버지와 아들이 불과 두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특히 아들 양상기 의병장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조기홍 의사,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조기홍 지사도 대구형무소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사는 임시정부의 특파원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문서를 제작하여 대구 시내 사립학교들과 상점에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치렀다. 지사는 출옥 후 폭탄을 제조하여 비슬산에 숨겨둔 채 기회를 노리던 중 다시 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8월 2일 순국했다. 8월 2일! 독립을 쟁취하는 8월 15일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져 있는 조기홍 독립지사의 묘소. 조 의사도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져 있는 조기홍 독립지사의 묘소. 조 의사도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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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의 25세 청년 박창오도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 조영기, 청년 손조동, 김두석, 김두봉, 김상대, 박순오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흑우(黑友)연맹 운동을 하다 1928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그 역시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경북 예천에서 1932년 11월 비밀결사 무명당(無名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김기석 지사도 출옥 이후 1년 만에 세상을 떴다. 일제의 지독한 고문은 서른살 청년의 목숨도 참혹하게 앗아갔던 것이다.

25세, 30세 청년 지사들도 고문 당해 순국

계성학교 5학년 때 대구3.8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대구대학교 설립자 이영식도 대구형무소에서 감옥을 살았다. 대구에서 3‧.만세운동을 한 뒤 칠곡 인동의 진평교회에 숨어지내던 이영식은 3월 13일 400여 군중을 이끌고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는 궐석 재판에서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나 서울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 동안 수감됐다. 출옥 후 그는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살고 싶으면 얌전히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경고문을 보냈다가 대구형무소에서 또 다시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동화사의 젊은 스님들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던 심검당 앞을 스님 한 분이 지나가고 있다.
 동화사의 젊은 스님들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던 심검당 앞을 스님 한 분이 지나가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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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0일 대구 덕산정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동화사 지방학림(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승들도 대구형무소에서 10개월씩 옥살이를 했다. 학승들은 3월 29일 동화사 포교당인 반월당 보현사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다음날의 시위를 준비했다.

보현사는 아미산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집 밖으로 나오면 대구형무소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열아홉에서 스물셋 사이의 청년 스님들은 대구형무소 붉은 지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일이면 일제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시간을 썩혀야 한다. 어쩌면 오늘이 밤하늘에 빛나는 저 푸른 별들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젊은이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동화사 청년 스님들의 혼이 남아 있는 심검당과 보현사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린 손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던 1919년의 동화사 젊은이들이 일제의 지독한 고문을 받아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범벅으로 변했던 장소 대구형무소... 지금은 주차장이 됐다. 지나가는 시민들 어느 누구도 이곳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피투성이 역사가 서린 대구형무소 터인 줄 알지 못하는 기색이다. 머잖아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면 더욱 까맣게 모든 것은 잊혀지리.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진다.

보현사(동화사 포교당, 사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동화사의 청년 스님들은 모두 잡혀서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보현사(동화사 포교당, 사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동화사의 청년 스님들은 모두 잡혀서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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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구형무소, #박상진, #장진홍, #이육사, #보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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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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