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한 장면

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한 장면 ⓒ 와이드 릴리즈(주)


21세기를 살아가면서 19세기 유럽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은 19세기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몽주의와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물질문명은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의 결과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촉발된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은 19세기 내내 지속된다. 1810년 프로이센의 훔볼트 대학을 계기로 근대대학이 형성된다.

유럽을 대표하는 세 나라가 경제와 정치, 대학의 밑그림을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신생국들이 뒤를 따른다. 그런 연유로 21세기 세계는 어디가나 비슷한 풍경이 겹친다. 그것이 국민국가든, 대학이든, 정치체제든 기본적인 형태는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세계화의 본원적인 흐름은 19세기 영국과 프랑스, 도이칠란트에서 시작된 셈이다.

19세기 유럽을 이해하는 열쇠로 내가 생각하는 서책은 <종의 기원>(1859), <레미제라블>(1862), <자본론>(1867) 세 권이다. 공교롭게도 저자들은 영국의 다윈, 프랑스의 위고, 도이칠란트의 마르크스(1818~1883)다. 그것들은 자연과학과 사회-정치소설, 그리고 사회과학의 백미로 현대까지도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지 않은 명실상부한 고전이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개봉한 영화 <청년 마르크스>가 상영되고 있다. 아이티 출신으로 훔볼트 대학을 졸업한 라울 펙 감독은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2016)로 유명세를 탔다. 미국의 킹, 에버스, 엑스 같은 흑인 인권운동가를 다룬 기록영화다. 

영화의 시공간

프랑스, 도이칠란트, 벨기에 합작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1843년부터 1848년까지 유럽 곳곳을 배경으로 한다. 마르크스는 1842년 10월 쾰른에서 발행되던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된다. 신문사에 입사한 지 9개월 만의 일이다. 마르크스는 당대 프로이센의 경제와 사회문제 전반에 관한 다채로운 논설을 쓴다. 빈민주택, 산림벌채, 공산주의 등이 본보기다.

그는 정열적인 집필로 <라인 신문>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성공하지만, 프로이센 당국은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논조를 빌미로 1843년 4월 신문을 폐간시킨다. 마르크스는 즉시 파리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한다. 경찰의 급습으로 호송마차에 오른 마르크스에게 아르놀트 루게가 <도이칠란트-프랑스 연보>를 발간해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를 말할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를 떠올린다. 바늘과 실처럼 평생 교감하고 행동한 두 사람. 엥겔스는 맨체스터의 직물공장을 소유한 아버지 덕에 영국 노동자들의 지독한 노동조건을 몸소 경험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맨체스터와 리즈의 노동계급 실태>를 집필한다. 루게의 집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천재성에 대한 상호인정과 교감에서 비롯한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출신이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꿈꾸는 엥겔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乖離)를 뼈저리게 느끼는 청년으로 등장한다. <청년 마르크스>는 이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동지가 되는지 속도감 있게 펼쳐낸다. 온종일 퍼마시고 체스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는 장면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홀로 혹은 함께 경험하는 유럽은 쾰른과 맨체스터를 기점으로 파리와 브뤼셀, 리옹과 베를린, 런던 등지로 이어진다. 그들의 행선지에서 우리는 피에르 프루동 (1809~1865), 빌헬름 바이틀링(1808~1871), 미하일 바쿠닌(1814~1876) 같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대표자들과 만난다. 이로써 영화는 당대좌파 인물도를 그려나간다.

사랑과 결혼

 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한 장면

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한 장면 ⓒ 와이드 릴리즈(주)


1843년 6월 마르크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한다. 예니는 트리어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딸이자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이다. 지적인 예니는 마르크스처럼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들이 세 나라 언어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마치 "유럽은 한 지붕 아래!"라는 구호를 입증하듯!

남편과 격렬한 애정행각을 즐기는 예니는 사회변혁과 전복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자 혁명적 기질을 가진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는 엥겔스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난 끔직한 권태에서 도망쳤어요. 행복을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해요. 기존질서와 구세계에 대한 저항 말이에요. 구세계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요."

엥겔스의 아내 메리 번스는 엥겔스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 여공이었다. 가혹한 노동조건에 저항하여 목소리를 높였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메리. 그녀의 당당함과 자신감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지는 엥겔스. 사장의 아들과 여공의 결합이라는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가 전개된다. 하지만 메리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의 강고한 투사로 그려진다.

다른 한편으로 메리는 예니와 판이한 인생살이를 살아간다. 남편들과 함께 온 해변에서 그들은 아이들과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냐는 예니의 물음에 메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여동생 리지는 열일곱 살인데 걔가 프리드리히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 반드시 그러고 싶어 하니까요. 나는 아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꿈꾸거든요."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꿈꾼 세상

25세의 마르크스와 23세의 엥겔스가 처음 만난 1843년. 베를린 유학시절 심취했던 헤겔철학과 거리를 두면서 나름의 철학적-사상적 기반을 찾고 있던 마르크스. 임금노예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가혹한 일상과 자신의 신분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며 출구를 모색하던 엥겔스. 그들의 공통분모는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그저 여러 가지로 해석했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

훔볼트 대학에 새겨진 글귀이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의 문구다. 여기서 방점은 해석이 아니라, 변혁에 찍힌다. 변혁의 핵심은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에 있다. 그들이 자본가와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그로 인한 불평등과 불이익이 존재하는 한 해방투쟁은 지속돼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는 바이틀링의 발언에 마르크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그런 선한 의지에 공감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세계변혁 없는 노동해방은 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1848년 출간된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절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유하는 인식의 고갱이다.

184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집필된 <공산당선언> 서문은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한다.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 문장보다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제1장 첫 문장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을 알리면서 막을 내린다.

21세기 청년들과 영화의 함의

19세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를 거치면서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야기한다. 전후세계는 서구와 미국, 일본의 중심부 국가들과 그들을 에워싼 반주변부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포진한 주변부 국가들로 나뉘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멸하고 신자본주의가 창궐하면서 세계는 20:80에서 1:99의 사회로 재편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거론되는 2018년 시점에서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꿈꾼 불평등의 해소와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자문해본다.   

20~30대 청년으로 장성한 후에도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지 못하는 세대를 '캥거루족'이라 부른다. 이것은 과도할 뿐 아니라, 유통과 소멸주기가 신속해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청년세대의 실태를 표현한다. 하루 버티기도 버겁다는 21세기 청년들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청춘을 다룬 영화는 무겁고 현란할 듯하다.

그들이 대면한 19세기처럼 21세기도 여전히 불의하고 부당하며 불평등한 관계들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와 영화로 분식되는 계급갈등과 투쟁양상은 그대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동일한 출발선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 <청년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예니 폰 베스트팔렌 메리 번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