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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안 자는 것이 아니라 못 자는 것.
 불면. 안 자는 것이 아니라 못 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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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테오도르 폰타네

난 이제야 알았네, 다들 어떻게 이를 마주하는지,
나는 눈을 뜬 채 누워있고, 잠은 나를 피해가네,
오직 스쳐 지나갈 뿐인 그는 나에게 속삭이네:
"걱정하지 마, 내가 너의 안식을 갖고 있을게,
그리고 내가 먼저 다시 집에 들어가서,
그렇게 네게 모든 걸 한 번에 갚아줄게."

모처럼 찾아온 화창한 날씨에 봄나들이를 갔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집에서 혼자 그동안 밀린 잠을 보충하며 주말을 보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면과의 사투를 짧게 그려낸 독일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 1819~1898)의 시 <잠>(Schlaf)을 읽어 보자.

우리가 정말 피곤하고 졸려서 마침내 침대에 누우면, 신기하게도 하필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날 때가 있다. 어서 꿀잠에 푹 빠져들고 싶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눈은 말똥말똥해져서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만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상황을 폰타네는 그의 시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가 만약 21세기 시인이었다면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안 와서 스마트폰을 잠깐 만지작거리다, 어느새 인터넷 검색에 빠져들어 밤잠을 다 설치게 되는 상황도 그의 시에 포함시켜야 했을 것이다.

잠이 보약이라고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고 나면 실컷 잘 수 있는 게 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 자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면의 존재론적 의미와 그 가치를 칭송한 철학자가 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던 리투아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불면증을 찬양하며>(Éloge de l´insomnie)라는 1976년 세미나 에세이에서, 우리의 의식(conscience)과 존재(être) 사이의 제3의 원시적인 현상으로서 불면에 대해 논의한다.

그에 따르면, 불면은 수면의 반대말도 아니며 수면에 반대되는 자연 현상이라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잠을 잔다는 것은 눈 뜨기 전의 상태, 혹은 곧 잠에서 깨어날 상태이기에, 수면이란 곧 기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 정도가 되고 만다.

하지만 불면은 안 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못 자는 것이므로, 이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각성 상태(veille sans intentionnalité)다. 그래서 어떤 행위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고 어떤 물리적인 형태를 띄지도 않으며,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불면은 비자발적이고 어떤 방향성도 없지만, 그 자체로 각성된 상태이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의식을 의식할 수는 있게 된다. 즉, 내가 잠을 못 자는 이유를 콕 집어내지는 못 하더라도 내가 지금 잠을 못 자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과 존재는 불면의 최초 각성 상태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변형된 것이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불면증에 대한 논의없이 우리의 의식과 존재의 일반적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레비나스의 주장이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딱히 위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어지럽고 현학적인 주장이 가득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숙면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Fontane, Theodor, 1895/1998, "Schlaf", 본문 인용된 시는 필자 번역, Gedichte in einem Band, Insel Verlag Frankfurt am  Main und Leipzig. 
Levinas, Emmanuel, 1976/1993, "Éloge de l´insomnie", Dieu, la Mort et le Temps, Bernard Grasset: 236-241.


태그:#불면증, #테오도르 폰타네, #레비나스,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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