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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두 손을 맞잡고, 북미가 서로 칭찬까지 하는 변화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는 일이 자연스럽고 극단적인 대결 국면까지 가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던 한반도였다. 그런 한반도가 하루가 다르게 대화와 평화가 가능한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요즘 말로 '이거 실화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미친 놈'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 상상하는 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한반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과 달리 피로 물들고 있는 중동을 보면 미국에 기댄 평화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도 만일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고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꿈같은 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누구나 한 번쯤 어떤 사건을 두고 '아, 그때, 이랬으면, 누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해 봤을 것이다. <역사 추리 조선사>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사도세자의 뒤주까지, 가정과 추론으로 재구성한 조선 이야기'다.

저자 김종성은 "역사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향해 달리는 존재다"는 말로 럭비공처럼 튀는 역사를 재구성했다. 그는 역사적 순간에 등장한 각종 행위자들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피며 역사 속 사건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었을 각종 변수를 제시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승자가 미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패자의 관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우의 수를 따지고 기록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역사 추리 조선사>는 추리를 통해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유연한 외교력을 구사했던 고려에게 배워라

오늘날 우리는 강감찬 장군이 이끈 고려군이 10만 거란족을 물리친 귀주대첩을 알지만, 전쟁에 이긴 후에 고려가 요나라(거란)의 신하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고려는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했던 국왕의 친조와 강동육주 반환을 거부할 국력이 있었다.

그럼 고려는 왜 전쟁에 승리하고도 신하국이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라면 명분 때문에 곧 죽어도 오랑캐에 머리를 조아리려 하지 않았겠지만 고려는 상당히 실용적인 외교를 펼쳤던 나라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고만장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체 국력에서 요나라가 앞섰다는 현실을 고려는 인정했다.

"고려는 새로운 패권국이 출현하면 기존 패권국과의 관계를 과감히 청산했다. 유연한 외교력을 구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패권국이 자국을 침공하는 것만큼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는 군사력으로 자신을 지켜냈다." -24쪽


이처럼 고려는 외교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많은 국난을 극복해 왔다. 고려의 많은 국난 극복 사례는 오늘날 패권국 사이에 낀 분단국인 대한민국이 분명히 배울 게 있다. 실력을 겸비하되 유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저자 김종성은 위화도 회군 당시 숱한 국난을 극복했던 고려인들의 머릿속에는 1000년 가까운 한민족 왕조들의 기록이 입력되어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당대 고려인들에게 민족의식이 있었는지는 따지고 봐야 할 문제지만, 역대 왕조들을 떠올리며 자신들의 왕조가 500년은 훨씬 넘게 가리라 생각했을 거라는 저자의 주장은 흥미롭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기대는 역대 왕조 흥망사에 기초한다. 기원전 202년 건국된 한나라 이래 중국 중원에서 출현한 왕조 60개국 평균 수명인 64.8년에 비해 한민족 왕조들은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까지 웬만하면 1000년 가까이 생존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33년 건국된 고구려는 서기 668년 멸망했다. 900년간 존속한 것이다. 기원전 214년 건국된 백제는 서기 660년 멸망했다. 873년간 존속한 것이다.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세워져 서기 935년에 멸망했다. 991년간 존속한 것이다." -21쪽


저자는 정세 변화에 민감하고 강철 체력을 보유했던 고려가 위화도 회군 같은 돌발 변수만 없었다면 좀 더 오래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려인들이 자국의 기대수명을 높이 잡았을 것이라는 점, 여러 차례의 정세 변동을 극복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고려 왕조의 체력이 강했다는 점, 공민왕 시기에 진보적 지배층이 등장해 위기관리 능력이 높아졌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니

우리는 대개 이방원과 정몽주를 함께 이야기하면 하여가와 단심가를 먼저 떠올린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응수했다.

단심가를 읊은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정몽주가 우왕, 창왕, 두 명의 주군을 폐하고 창왕과 공양왕을 주군으로 옹립했던 역사를 까발린다. 더 나아가 군사부일체를 실천해야 할 선비가 임금뿐 아니라 스승까지 거역했다는 사실까지 주목하게 한다. 정몽주는 창왕 옹립 후에 스승 이색이 조민수와 손잡고 정몽주를 소외시키자 이성계, 정도전과 협력해 이색을 실각시켰다.

이쯤 되면 충절의 대명사인 정몽주는 군(君)과 사(師) 모두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보여주었다고 해도 충분하다. 정몽주 역시 현실적 이익, 권력 획득을 목표로 했던 여느 정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정몽주의 행적은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를 충절의 대명사로 추앙하는 것은 실제와 괴리된 일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43쪽 


한편 하여가만 놓고 보면 이방원은 절개라곤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훗날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태종 1년 1월 14일자(1401.1.28.) 태종실록에 따르면, 권근은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려면 이전 왕조의 충신을 포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 건의를 수용해 같은 해 11월 7일(1401.12.11.) 정몽주에게 영의정을 추증했다." -41쪽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신이 죽이기는 했지만 충절을 다한 인물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역사추리 조선사>를 통해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 알려진 속설들의 허구를 짚어낸다. 가령,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속설은 말 그대로 속설일 뿐이다. 그 속설은 전통적인 형제 관념을 고집하지 않고 서열보다는 능력을 중시했던 태종의 작품이다.

또한, 저자는 독자에게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주군에 대한 충의를 최고 가치로 치던 사대부들 사이에서 배신의 아이콘이 돼 버린 신숙주를 비방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묻는다. 주군에 대한 충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동료 인간에 대한 충의라고 단언한다.

"주군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보다는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 주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보다는 세상의 권리 보장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 -77쪽 


공자는 주군을 배신할지라도 세상에 충성할 사람을 높이 쳐주었다. 저자는 공자라면 신숙주에게도 후한 점수를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보다 왕과 같은 유력자 앞에 줄 서는 정치인들만 판치는 오늘날 한국 정치판에 <역사추리 조선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묻고 있다.

"누구를 위해 정치할 것인가?"


역사 추리 조선사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사도세자의 뒤주까지, 가정과 추론으로 재구성한 조선 이야기

김종성 지음, 인문서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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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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