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스틸 컷.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스틸 컷. ⓒ 명필름


'판문점' 하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남북이 회담하는 장면도 떠오르고, 남쪽 경비병들이 선글라스 끼고 서 있는 장면도 떠오른다. 배우 이병헌과 송강호가 각각 남북 군인으로 등장한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스틸 컷에도 선글라스를 착용한 이병헌의 모습이 담겨 있다.

북한 전문 잡지 <민족 21> 2001년 8월호 기사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유엔사령부 관할인 판문점을 방문할 때의 주의사항이다.

"<방문자 서약서(유엔사 규정 551~5)>에는 '방문객들은 유엔군측 위신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사복을 착용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규정에 따르면, 청바지는 물론 반바지도 입을 수 없다. 미니스커트와 소매 없는 옷도 입을 수 없고 샌들도 안 된다. 머리를 빨갛거나 노랗게 염색한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안 된다."

튀는 복장을 해서도 안 되고, 머리를 염색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유엔사에 속한 한국 헌병들은 튀는 외양을 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머리를 물들이는 것은 안 된다면서 안경은 검게 물들이도록 하고 있다.

위 기사를 쓴 유병문 기자는 여타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남북회담 설명회에 참석하고자 판문점을 방문했다. 통일부가 주관하는 행사였다. 이때 이곳을 방문한 기자들도 선글라스를 착용한 이유가 궁금했다. 기자 중 하나가 질문했다. 왜 쓰고 있냐고. 그 답변이 인상적이어서 위 기사의 제목도 '판문점 경비병이 선글라스를 쓴 이유'로 정해졌다. 답변은 이렇다.

"북쪽 병사들과 눈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편도 아닌데 서로 마주보고 있으려니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눈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보다는 눈을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남쪽 군인이 안 써주면 북쪽 군인이라도 써야 할지 모른다. 남한 군인이 맨눈으로 쳐다보면, 북쪽 병사도 불편할 것이다.

과거엔 판적교·판문교·판문평 등으로 불린 '판문점'

정상회담 하루 앞둔 판문점  2018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나게 될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정상회담 하루 앞둔 판문점 2018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나게 될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이처럼 오늘날의 판문점에는 편치 않은 공기가 감돌지만, 과거엔 달랐다. 불편이 느껴지는 장소가 아니라 편히 쉬는 장소였다. 이곳 지명에서도 그런 사실이 드러난다.

이곳은 과거에는 판적교(板積橋)·판문교(板門橋)·판문평(板門平) 등으로 불렸다. 일례로, 음력으로 문종 1년 1월 18일자(양력 1451년 2월 19일자) <문종실록>에는 3436명의 보병·기병이 "개성부 판문평(板門平)에 주둔했다"고 말한다. 평(平)은 평야나 평지를 지칭했다.

판(板)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곳 지명이 널빤지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널빤지로 연결된 다리나 널빤지로 제작된 대문과 관련되는 지명이다. 이런 한자식 지명뿐 아니라, 널문이란 우리말 지명도 함께 사용됐다. 외부인들이 보기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판문점(板門店)이란 명칭은 이곳의 숙박업소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1951년 휴전회담이 시작될 당시, 이곳엔 주막이 있었다. 옛날에는 이 주막을 판문점으로 불렀던 듯하다. 현대 한국에서는 점(店)이란 한자가 주로 '가게'로 번역되지만, 옛날 한국과 중국에서는 숙박업소를 겸한 술집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막은 대개 이런 곳이었다.

사극의 영향으로 인해, 주막을 뜻하는 店이 동네 곳곳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읍성(도시)과 읍성을 연결하는 큰 길목에 가야만 店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읍성 내부의 번화가에 가야 店을 만날 수 있었다.

1653년 표류해 13년간 조선에 살면서 제주·전라·충청·경기·한양을 여행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인 이때까지도 한양으로 통하는 대로변에 가야 주막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주막은 지금의 술집이라기보다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었다. 과거의 판문점도 그런 곳에 가까웠다. 잠시나마 쉬었다 가는 장소였다. 그래서 불편함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고 말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의주와 한양을 잇는 도로가 있었던 장소다.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이 도로의 총연장 거리는 1050리(약 412km)였다. 판문점 주막은 그 도로가 지나가는 곳의 휴게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 서쪽에 개성부 읍성이 있었으니 대부분의 여행자는 개성에서 쉬지, 여기서 쉬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 한산한 휴게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주택이 몇 채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상시 한산했던 이곳이 주목 받았던 때는...

 1953년 당시의 판문점. 천막 있는 곳이 회담장이다.

1953년 당시의 판문점. 천막 있는 곳이 회담장이다. ⓒ 국가기록원


조선 영조 때 송상기라는 관료가 있었다. 호는 옥오재(玉吾齋)이고 문장력이 출중했다. 만 40세 때인 1697년 사신단 일원이 되어 청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때 개성 쪽으로 올라가면서 그가 지은 시가 있다. 개성부 서북쪽 천마산(天麻山)과 개성부 동남쪽 판문교 근처가 언급된 것을 볼 때, 지금의 판문점 근처를 지나 북상하면서 지은 시로 보인다. <옥오재집>에 나오는 시다.

천마산 바라보니 우뚝 솟고
사신 길에 방울 울리는 말(馬) 날래다
물가에 이르러 저녁 바람에 졸음 깨니
석양이 판문교 너머로 지려 한다

천마산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판문교에 이르기까지 살짝 '졸음운전'을 했던 모양이다. 판문교가 있는 물가 근처에 와서야 졸음이 깼다고 했다. 산과 하천과 교량만 눈에 들어오고 잠깐 졸기까지 했던 것은, 이곳에 시선을 끌 만한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산한 휴게소에다 집 몇 채만 있을 뿐, 그 외에는 특기할 만한 게 없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평상시에는 좀 한산했을 이곳이 역사적 주목을 받은 때가 있다. 한국전쟁 때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야기다. 선조 임금이 한양을 떠나 의주로 피신하면서 이 근처에 잠시 체류했다. 선조 25년 5월 1일(양력 1592년 6월 10일)이었다. <선조실록>은 이 날 벌어진 중요 사건 중 하나를 이렇게 말한다.

"주상께서 동파관을 떠나 판문에서 점심을 드셨다."

 본문에 인용된 <선조실록>.

본문에 인용된 <선조실록>. ⓒ 김종성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보다 426년 먼저, 선조가 이곳에서 임금 자격으로 점심식사를 했던 것이다. 개성 서북쪽의 풍덕군 군수가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북쪽 먹거리인 황해도 음식이 선조의 식탁에 올라갔을 것이다.

선조가 점심에 이어 저녁식사까지 하고 갔다면 2018년 4월 27일의 두 정상과 '타이 기록'을 이뤘겠지만, 그는 여기서 두 끼 식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피신해야 했다. 실록에 따르면, 그날 저녁에는 개성에 있었다.  

평민들은 보통 두 끼를 먹었지만, 왕들은 자주 식사했다. 왕의 식사는 실록에 거론될 만큼의 중요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이 날의 점심은 중요한 의미를 띠었던 모양이다. 전쟁 중의 급박한 어떤 사정 때문에 큰 의미를 띠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실록에 기록됐을 것이다.

옛날 판문점 일대는 남과 북을 이어주는 곳

그때 당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교해보면 나름의 의미를 갖는 그날 선조의 행보가 있다. 남쪽 한양에서 올라온 선조는 그날 점심 식사를 한 뒤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점심 뒤에 '월북'한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온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에서 두 끼 식사를 한 뒤 북쪽으로 되돌아간다. 남쪽에서 올라간 문재인 대통령은 남쪽으로 도로 내려온다. 남쪽에서 올라간 선조 임금은 판문점 인근에서 식사한 뒤 그대로 북상했다. 지금 같으면 '월북'이다. 여담이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렇게 한다면 대단한 사달이 날 것이다.

지금의 판문점은 남과 북의 소통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로막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남에서 올라간 대통령과 북에서 내려온 위원장은 그곳에서 발길을 되돌려야 한다. 하지만, 선조의 행보에서도 드러나듯이, 옛날 판문점 일대는 남과 북을 이어주는 곳이었다. 작은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되돌아가는 장소가 아니라 그냥 통과하는 곳이었다. 

선조는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판문점을 통과해 그대로 '월북'했지만, 앞으로는 이런 행보가 아주 자연스럽게 비쳐져야 한다. 판문점까지 갔다가 도로 내려오거나 도로 올라가는 게 정상적이지 않고, 남에서 판문점을 지나 그대로 '월북'하고 북에서 판문점을 지나 그대로 '월남'하는 게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날이 빨리 와야 한다. 그런 날이 오면, 그곳에서 병사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불편하게 서 있어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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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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