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세브레이로 향하는 길

깊은 계곡으로 노랫소리가 퍼졌다. 흡사 교관이 선창하고 뒤따라오는 훈련병이 후창하는 군가처럼 들리기도 했다. 뒤에 알게 된 정보지만 마드리드(Madrid) 출신 학생(우리나라로 하면 중학생 정도), 단체 도보 여행객이었다.

노래로 에너지를 활성화 시키는 저 움직임은? 해발 1300m 고지에 있는 오세브레이로(O'cebreiro)로 가는 길이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힘들 때 부르는 도보 행진곡과 청소년들의 생기.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나를 정겹게 했다.
오세브레이로 향하는 길
 오세브레이로 향하는 길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레온과 갈리시아 자치주(自治州)가 나눠지는 지점에서 이들 단체객들을 먼저 보내려고 나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뒤따라오는 그들이 신경 쓰였다. 계속 속도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나를 지나쳐 가는 그들은 한 마디씩 유쾌한 인사를 건네고 갔다. 싱그러운 아침 이슬처럼 지친 기색은 없었다. 곧 그들도 멈춰 서더니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서 있자 같이 찍자고 졸랐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들을 엉덩이에 다시 달고 계속 오르막길을 올랐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평평한 길에 닿았다. 한 숨 돌릴 수 있는 길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기타 소리에 맞춘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런 고지에서 연주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올라가자 페도라를 쓴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사연 적힌 메모와 뒤집어 놓은 모자가 보였다. 까미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오세브레이로를 10분 남겨 둔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
 오세브레이로를 10분 남겨 둔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나는 아예 배낭과 신발을 벗고 그 옆에 앉았다. 쉴 곳을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다. 산 속에서 듣는 생음악이라니, 얼마나 상쾌한가. 단체객을 먼저 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단체객도 주춤하더니 몇은 동전을 모자에 넣고 갔다. 그들이 사라진 그 길은 고요로 채워졌다. 아침 햇살은 먼 산등성이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눈앞에 펼쳐진 계곡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나는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 음악 한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남자의 음성은 햇별 속에서 반짝거리면서 빛났다. 음악만이 고요한 산야에 울러 퍼졌다. 한곡이 끝나고 약간의 틈이 있었지만 남자는 내게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음악이 끝난 그 틈을 즐기며 한곡만 듣고 일어나려는 마음을 접었다. 마침내 노래가 시작되었고 끝났다. 나는 신발을 신고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뒤집어 놓은 모자 속에 1유로를 넣었다.

그곳에서 십분을 걸어 오세브레이로(O'cebreiro)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왜 오세브레이로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래된 성당 아래로 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편의 시설이 있었다. 경치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곳은 순례길(까미노 데 산티아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세브레이로의 기적(Santo Milagro)

오세브레이로에는 현존하는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있다.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Real)은 연대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세브레이로의 기적(Santo Milagro)'이라고 불리는 기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기적은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에 일어났다. 독실하나 가난한 소작농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보라 속을 헤치면서 주일을 지키려고 온다. 수도사는 신심이 그리 깊지 않았다. 험한 날씨에 목숨까지 걸고 올라온 소작농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도사가 성찬식을 행하는 순간, 면병은 그리스도의 살로 바뀌었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바뀌었다. 성당 안에 있는 마리아상도 이 기적적인 광경에 머리를 숙였다.

그 예배당은 농부와, 그 기적으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된 수도사가 세웠다. 그들의 이름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웃해 있는 마을 교회 묘지에 이름 없는 비석 두 개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것이 수도사의 무덤이고 농부의 것인지는 구별할 수 없다.

오세브레이로(O'cebreiro)
 오세브레이로(O'cebreiro)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또한, 1986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에 감화되어 첫 작품인 <순례자>를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파울로 코엘료가 깨달음을 얻은(마스터에게 검을 받은) 마을이기도 하다. 전세계 168개국 73개 언어로 번역되어 1억 3천 5백만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한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도 이 길을 걸었다(그는 오세브레이로에서 멈췄다. 이곳에서 검을 받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얻은 큰 수확은 자신의 꿈을 '꿈'으로만 두지 않고 실천했다는 데에 있다. 그의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다. 안정적인 생활에서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했다. 이 길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들을 더는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막 깨달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만족스러운 급여와 심리적인 안정, 내가 익히 알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바뀌어야 했다. 내 꿈을 좇아야 했다. 비록 그것이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늘 마음 속으로 바라왔으나 뛰어들 용기를 내지 못했던 꿈, 그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p.341


나는 성당에 들르기 전 성당이 보이는 바에 앉아서 콜라 한 잔을 시켰다. 피곤한 다리를 먼저 풀고 싶었다. 왼쪽 발바닥 물집이 나아가자 이번에는 왼쪽 발목이 밤마다 울었다. 나 좀 봐주라고, 돌아가면서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투정부리는 몸을 살살 어루만지며 눈보라가 치는 날 이 험한 길을 올라왔을 농부와 내가 조금 후에 걷게 될 길고 긴 하산길을 교차시켰다. 올라오면 반드시 내려가야 할 이치. 아프면 언젠가는 나을 이치. 떠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때. 요요처럼, 생각들을 먼 곳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왔다가 다시 던졌다. 솜씨가 좋지 않아 요요가 이마를 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곳

하산하는 길목에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Hospital de la Condesa)라는 마을이 있다. 오래 전에는 산티아고를 향하는 순례자들만을 위한 곳이었다. 이들이 편히 쉬어 갈 수 있게끔 병원(오늘날의 병원은 아니지만)도 운영했다. 마을 이름도 'Hospital'이 들어간다. 지금은 돌 지붕으로 만들어진 종탑과 산티아고를 받쳐 든 십자가가 남은 볼거리이다.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Hospital de la Condesa) 돌 종탑 안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Hospital de la Condesa) 돌 종탑 안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나는 돌로 된 종탑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지친 발을 꺼내고 왼쪽 발목을 주물렀다. 혹시나 마을 이름처럼 내게 완치의 은총(?)을 내려줄까 싶어서였다. 아무도 종탑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기도를 드리는 심정으로 종탑 안의 서늘한 공기를 만끽한 나는 다음 고지로 향했다. 오늘 목적지(Fonfria), 3.5km 지점에 있는 포이오 고개(Alto do Poio, 1335m)를 넘어야 했다. 하산하는 순례자를 짜증나게 하는,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이다. 그곳을 숨 가쁘게 오르면 오아시스처럼 바가 나타난다. 그 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꼭, 쉬어가야 할 필수코스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쉬었다. 그리고 아주 평화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황소만한 개 두 마리가 손님들 발아래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의 공존. 이런 풍경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집을 지키고 있을 강아지 세 녀석이 동시에 그리워지면서 말이다.

포이오 고개(Alto do Poio ; 1,3335m) Bar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개
 포이오 고개(Alto do Poio ; 1,3335m) Bar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개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목적지인 폰프리아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는 숙소 앞뜰을 점령하고 있는 청소년 단체 팀과 조우했다. 그 나이 때의 활기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 봄,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알게 된 둘레길 사무실 직원이 내게 도보여행에 관한 책자를 보내주었다.

그 중 지리산 둘레길에서 운영하는 '이음단'이라는 단체에서 청소년들과 둘레길을 완주했다는 내용의 글을 접했다. 이들을 보니 그들의 희망적인 후기가 떠올랐다. 새벽 안개를 헤치며, 봄비에 젖은 산수유 물결을 보며 재를 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먼 이국의 시골 마을까지 처들어왔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도 내가 머물렀던 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세브레이로에서 마침내 코엘료에게 검을 주고 떠나는 그의 마스터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pp.332~333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 #프레그리노, #까미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