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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다음날 마을 뒤로 보이는 프라델라 봉(930m)을 넘어야 했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다음날 마을 뒤로 보이는 프라델라 봉(930m)을 넘어야 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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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면서 길을 찾게 된 그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서 순례자들이 멈추는 이유가 있다. 그 다음 여정을 오세브레이로(O'cebreiro)로 정하기 때문이다. 1300m 고지에 있는 그곳은 순례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 있다(다음 편에 다룰 예정). 순례자들에게는 명소 중에 명소다. 하지만 30km 이상 올라가야 하는 힘든 길이다. 

하지만 내게는 무리였다. 내 계획은 이러했다. 먼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도착한다, 마을 뒤 프라델라 봉(930m)를 넘고 다시 600m 지점까지 내려간 다음에 하룻밤 잘 곳을 찾는다, 다음날 오전에 오세브레이로로 올라간다…. 오세브레이로는 레온(Leon) 주와 갈리시아(Galicia) 주 경게지역이기도 하다.

나는 갈리시아 주에 빨리 닿기를 빌었다. 갈리시아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발카르세 계곡과 오세브레이로는 앞으로 경험하게 될 독특한 갈리시아 문화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준다. 첫 번째 순례지는 대서양 너머에서 서풍이 불어오는 갈리시아 산맥이다. 날씨는 급변하여 비가 자주 오고 소나기와 뇌우가 있기도 하며 두터운 산 안개가 끼기도 한다. 이런 날씨는 산 계곡물과 깊은 강의 토대가 된다. 시골 벌판에 작고 친숙한 들이 있고 양이나 돼지, 거위, 닭과 더불어 소가 풀을 뜯는 목장이 있다.

진하고 뜨거운 수프와 풍부한 채소, 고기 스튜 같은 음식들이 안개로 덮인 날씨 속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해안과 더 가깝기 때문에 파프리카를 곁들여 삶은 문어와 조개 요리 등 해산물 요리들이 탁월하다. 거친 풍미의 이 지역 레드 와인이 대부분의 요리와 함께 나오고, 역시나 몸 안에 온기를 가득 채워준다. - 존 브리얼리 <산티아고 가이드북>, 넥서스BOOKS, p.333~334


육식을 즐기지 않는 나는 너무 간절하게 해물 요리가 먹고 싶었다. 우리나라 된장국과 비슷한 맛을 내는 뜨거운 스프도 문어 요리도…. 

나는 계획한 대로 비야프랑카(Villafranca del Bierzo)까지 오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여정 중에서 제일 고된 하루였다. 걸어야할 길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왼쪽 발바닥 피부가 벗겨져서, 걸을 때 양쪽 다리에 힘을 균등하게 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만만치 않은 배낭 무게가 더해졌다. 나는 며칠 전부터 절면서 걸어야 했다. 불균형한 힘 분산을 스틱으로 대신하면서 말이다.

이런 내 걸음걸이가 왼쪽 발목에 되레 무리를 준 듯했다. 왼쪽 발목이, 발목이 접질렀을 때처럼 급작스런 통증을 유발시켰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할 수 없었다.
걸으면서 마주치는 장식물(그림)들
 걸으면서 마주치는 장식물(그림)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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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이 있었다. 전날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H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4명이 한 팀이 되어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레온에서 4인실을 독방처럼 사용했을 때 옆방에 묵었고 그 뒤로도 몇 번 부딪쳤지만 말 걸 틈조차 주지 않아 혹시 사이비 종교 수련회를 왔나, 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보던 이들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에 비해 표정이 없어서 자칫 화를 내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라도 그들 분위기는 냉냉했다.

이들 중 한 명인 '그녀(사진 찍기를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본명은 밝히지 않고 '그녀'라고만 지칭한다)'는 배낭을 다음 알베르게까지 매번 보내버려서(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허리가방과 물병 하나만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순례자라기보다는 동네 마실 나온 '편한 마나님' 같아서 되레 친하지 않은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홀가분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걸음은 느려서 늘 일행보다 50m 즈음 뒤처졌다. 뒤처진 그녀를 며칠 전에 봤지만 다른 세 명과 한 팀이라는 것은 어제 폰페라다에 왔을 때에야 알았다.  

폰페라다를 떠날 때 우연찮게 같은 시간대에 걷게 되었다. 그녀는 으레 무리에서 떨어졌다. 나와 보폭이 거의 같아서 나는 아주 간단한 인삿말을 건넸다. 별 기대를 하지 않은 말 건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주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주는 것이 아닌가. 몇 마디 더 말을 섞게 되었다. 

'아, 그녀도 그동안 외로웠구나.'

번뜩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내 짐작이 맞았다. 그녀는 처음, 팀원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신 속에 이는 감정을 어느 정도 초월한 상태였다. 팀원과 떨어져서 걷게 된 것은  걷기 시작한지 5일 뒤부터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서 걸음이 느려졌고 물집이 잠잠해질 즈음에는 고관절에 이상이 생겼다. 심지어는 변기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치골 통증을 동반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뒤부터 그녀는 배낭을 보내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라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일정을 존중해줘야 했다. 어떻게든 하루 정해진 코스를 가야 했다. 그것이 그녀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녀는 일행들과 보폭을 맞출 수 없게 되자 목적지인 알베르게만 알려달라 하고는 현지 가이드북을 사고 휴대폰 데이터를 충전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혼자 걷기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녀에게 득이 되었다.

"생각해봐요.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도 인솔한 대로 멍하니 따라 다녔겠죠. 아프고 혼자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길을 찾드라구요. 길치인 내가 혼자 길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거예요."

그녀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했다. 나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말이 통했다.

"어느 날 말이에요. 정말 갈증이 났는데 물이 없었어요. 물론 살 곳도 없었죠. 내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나봐요. 나를 지나쳐가는 외국인이 그가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네는 거예요. 한 모금 마시고 감사하다며 건넸죠. 그러자 그는 그것을 가지라고 자기한테 한 병 더 있다고 하잖아요? 아, 천사가 따로 없더군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바에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길가 과실수에 호기심을 보이며 설익은 그것을 맛보기도 했다. 종교는 없지만 혼자 아닌 혼자가 되면서부터 그녀는 눈에 보이는 성당이라는 성당에는 다 들어갔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제일 마음이 편했다. 나도 그녀와 걷는 도중 성당이 보이면 들어갔다. 동행이 있다는 것, 그것도 내밀한 속 이야기를 '공통된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분명 있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 하기 9km 전에서 본, 사설 알베르게에서 나는 묵었을 것이다. 조그마한 시골 도로변에 있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기자기한 알베르게를 봤을 때 얼마나 내 가슴이 뛰었던가. 그런 곳에서 한번 즈음 꼭 자보고 싶었던 나였다. 그녀를 따라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나는 멈출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나도 어느 사이 H팀원이 되어 있었다. 하루 정해진 코스를 어떻게든 완주해야 하는.
길 위에 있는 돌 낙서
 길 위에 있는 돌 낙서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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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9일 째 되던 날, 레데시아에서 만났던 독일인 여자 순례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리하지 않고 걷고 싶은 만큼 걸었고 바에 앉아 오늘 잘 곳을 정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여유로워 보였던가. 그때 나는 워싱턴 D.C. 출신 맥스와 동행하고 있었고 그는 산티아고까지 26일에 완주할 계획이었다. 나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끝내고 싶었다. 우리는 욕심이 맞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우습게도 발에 물집이 생기고 나서부터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하나씩하나씩 그동안 나를 재촉하고 결박했던 끈들을 끊어냈다고나 할까. 급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50일 일정으로 한국을 떠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왼쪽 발목이 맨발로 유리조각을 밟을 때처럼 아팠다. 아침에는 느낄 수 없었던 통증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거였다. 발바닥 피부가 벗겨진 것은 한두 시간 걷다보면 마비가 되었다. 하지만 발목 통증은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웠다. 나는 양손에 쥔 스틱에 더 힘을 주었다. 진짜 절름발이가 되었다. 점막과 같은 공기는 내 피부에 척척 달라붙었다. 쉬고 싶을 때 쉬었지만 남은 거리를 생각해서 오래 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려는 아주 섬세했고 따뜻했다.

뜨거운 포도밭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는 코스를 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그늘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시골 승강장처럼 한 면이 터진 사각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그늘에서 쉬려면 콘크리트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곳에서 지린내가 나서 잠깐 멈추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왼쪽 발목에 가능한 힘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왼쪽 스틱을 쥔 손에 과도한 힘을 싣고 있었다. 스틱 끝으로 돌멩이를 짚었는데 돌멩이가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균형을 잃은 나는 재빨리 스틱을 손에서 놓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스틱이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지만 스틱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몸을 가다듬고 그것을 주우려고 하자 그녀가 먼저 주워서 내게 건넸다. 실은 몸을 숙이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외국인들과 동행을 했고 사소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사적인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에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만지지 않았다. 혼자 해내기를 바라는 듯했다. 아마도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리라.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한 그들은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땅에 떨어진 스틱을 얼른 주워서 내 손에 쥐어 주는 그 사소한 동작이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며 걸으면서 내내 수다를 떨었던 것보다 더 한국적이었다고나 할까. 또 다시 새삼스러워졌다. 하지만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탓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내 의지대로 멈추지를 못한다. 여기서 쉬고 싶으니 먼저 가시는 게 어떨까요? 이런 한 마디 말조차 할 용기가 없지 않는가.'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 TV에서 봤을 때만 그림 같은 집이다. 직접 걸으면서 보는 저 집은….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 TV에서 봤을 때만 그림 같은 집이다. 직접 걸으면서 보는 저 집은….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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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공립 알베르게까지 온 것은 온전히 그녀의 덕이면서 나의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도착해서도 내가 머물고 싶었던 조그마한 길가 알베르게 앞에 내놓은 나무 의자가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곳에 앉아 발을 말리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아주 달콤했다. 내가 그곳에 머물렀다면 그녀 혼자 목적지까지 걸어야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전제로 평소와 달리 더 천천히 나를 이끌며 걸어왔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미안했던 거였다.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왔을 때 2층 침대를 배정 받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밟는 게 발바닥이 아플 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접수처로 가서 어디든 상관 없으니 1층 침대를 달라고 했다.

1층 침대가 복도 한켠 움푹 들어간 곳에 있다(늦게 와서 다른 룸은 다 찼다). 내가 침대를 바꾸자 그녀도 내 옆 침대로 왔다. 알베르게는 이런 풍경도 익숙하다. 안이 밖이 되기도 밖이 안이 되기도 한다. 편한 잠자리를 원한다면 애초부터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건강하게 걷는 부러움
특이한 새 둥지
 특이한 새 둥지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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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알베르게에서 H팀 회원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말을 조금만 섞어도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인 것을). 리더인 훈이 다리 아픈 나를 대신해 약국과 슈퍼를 대신 가줬다. 나는 곧 작은 약방을 차릴 것처럼 약이 많아졌다. 거즈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발목을 압박할 붕대가 필요했다. 다행히 약국에 있었다.

식사 뒤 오래된 중세 마을을 그들과 함께 산책하기로 했는데 나는 100m 정도에서 멈췄다. 도저히 유리조각이 서걱거리는 듯한 발목으로 걷기가 힘들었다. 그들을 보내고 현지인들 단골 바에 앉아서 콜라를 마셨다. 그때, 거의 이틀 앞서간 거리에 있는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에 있다는 연석이 사진을 보내왔다. 데미안과 둘이 찍은 거였다.

사진 속 두 남자, 사정없이 탔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 한가득이었다. 걷고 난 뒤의 쾌감을 온 얼굴로 발산하고 있었다. 둘 다 이미 취했다고 연석이 덧붙이면서 데미안이 내 안부를 묻더라고 말했다.

나도 저곳에 있었을 것을. 내내 내 걸음걸이에 집중하자고 했으면서 그들의 건강한 다리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러워하는 내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건강하게 완주하라는 안부를 전하고는 알베르게로 돌아와버렸다.

그리고 지금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있다. 아래층 식당에서 내일 여정의 힘듦에 대해 한바탕 떠들던 순례자들이 다들 잠들었다. 열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여기저기에서 코고는 소리가 파고를 만들고 있었다. 피곤했을 이들 영혼은 오늘 어디에서 잠들까. 온전히 이곳에 있을까.

고요가 찾아오자 갑작스런 상념이 끼어들었다. 상념이 내 잠을 빼앗아갈까봐 나도, 눈을 감았다. 내 몸과 영혼도 '쉼'을 주어야 했다. 맞은편 침대에 있는 그녀도 벌써 쌔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5시에 일어나서 출발한다고 했다(복도 침대에서 잠든 그녀가 온통 배드버그에 물렸다는 것을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에야 알았다. 나는 말짱했다. 아직까지 미스테리이다. 왜 나를 피해가는지).

나는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5시. 나는 그 시간에 출발할 수 없겠지. 내일 제대로나 걸을 수 있을까. 불안이 스멀스멀 바퀴벌레처럼 기어왔지만 쫓아낼 힘조차 없었다.  

폰페라다(Ponferrade)를 떠나며
 폰페라다(Ponferrade)를 떠나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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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 #까미노 , #프레그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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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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