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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면 보이는 것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고은 〈그 꽃〉전문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언덕도 산도 그리고 인생도.

본격적으로 등산에 재미를 붙이게 된 시기는 2016년 가을부터였다. 그해 봄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내 걷기 성장 단계는 유아기이다. 하지만 하산길의 중요성 만큼은 누구보다 더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경험 많은 선생 덕이었다. 올라가는 것보다 쉬운 듯 하지만 되레 어려운 길이라고. 단숨에 뛰어갈 수 있을 듯 하지만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등산을 나이 들어서까지 오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하산길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올라가는 것보다 더 시간을 들이고 관절에 신경을 써야 하는, 정점을 찍었다는 자만심을 던져 버리는 사람만이 다음 정상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진리. 그 진리는 겸손의 길이며 최선의 길일 것이다. 낮은 곳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눈이라면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외양. 그것은 '당신'만의 착각일 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서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고 있는 '그 꽃' 같은.  

폰세바돈(Foncebadon)을 떠나며
 폰세바돈(Foncebadon)을 떠나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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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1,505m에 세워진 철 십자가(Cruz de Ferro). 순례자 성 야고보의 길의 영원한 상징 중 하나이다. 다들 걸음을 멈췄다.
 고도 1,505m에 세워진 철 십자가(Cruz de Ferro). 순례자 성 야고보의 길의 영원한 상징 중 하나이다. 다들 걸음을 멈췄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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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십자가 정점을 찍고 1505m를 내려와야 했다. 하산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더딜 수밖에 없었다. 왼쪽 피부가 벗겨진 발바닥에 혹시 무리가 갈까봐 의식적으로 그곳에 힘을 싣지 않으려고 했다. 스틱에 과도하게 힘을 실었다. 자연스럽게 발에 힘을 달리 주다 보니 절뚝이게 되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지나치고 지나쳐 갔다. 내가 쉬지 않고 걷는 동안 그들과 거리를 좁혀 놓으면 그들은 바에서 수다를 떨면서 음료수를 마시고도 나를 또 지나치고 지나쳐 갔다.

길바닥에 점을 찍는 듯한 걸음걸이로 풍경을 담았다. 느린 걸음만큼 풍경은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고도를 내려오면서 지나치거나 잠깐 머물렀던 마을들은, 아름다운 경관과 어울릴 만큼 명품 마을이었다.

전날 폰세바돈(Foncebadon) 보다 만하린(Manjarn)에서 잘까 싶었다. 철 십자가를 지나 내려오는 그곳은 흡사 길 잃은 순례자를 위한 움막 같았다. 편의 시설이라고는 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깊고 깊은 산 속, 옛날옛날 아주 옛날, 과거 보러 가는 선비를 유혹하기 위해 꼬리 아흔아홉개 달린 여우가 호롱불 켜고 오두막에서 기다릴 것 같은 분위기(아, 나는 그런 곳에서 잘 수 있을 정도로 모험심이 뛰어나다).
고도 1,400m 높이에 있는 만하린(Manjarin) 알베르게
 고도 1,400m 높이에 있는 만하린(Manjarin) 알베르게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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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아세보(Acebo)는 산중턱에 요새처럼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연석이 무리해서라도 산을 넘어 아세보에서 자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는 폰세바돈에서 머무르려고 했지만 빈 침대가 없어서 아세보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하산길에 마주친 마을은 골목길도 완만한 경사로였다. 초입에 있는 바에서 몇몇 순례자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을 자체가 순례자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제공하고 있었다(물론 돈을 내야 하지만). 잿빛 돌담은 단단하고 견고하게 보였다. 산 중턱 마을이라 경관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햇살 아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다리 하나 없는 개가 골목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천국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동물과 사람과의 평화로운 공존. 그런 곳이 내게는 천국이었다. 
고도 1,200m 정도에 있는 아세보(Acebo) 마을 골목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는 개. 자세히 보니 다리 하나가 없다.
 고도 1,200m 정도에 있는 아세보(Acebo) 마을 골목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는 개. 자세히 보니 다리 하나가 없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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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는 고향 할머니가 맞이해주는 것처럼 포근했다. 입구에 낡은 통나무집을 지나면 잘 가꾸어진 길과 주택들이 나왔다. 반들반들한 돌담과 돌계단. 마을 역사와 함께 했을 노거수들은 마을의 수호신처럼 보였다. 마주치는 사람들 표정도 온화했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 초입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 초입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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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6km 즈음 내려 간 마을인, 몰리나세카(Molinaseca)는 세련된 시골 마을이라고 할까. 순례자들에게는 최고의 휴양지였다. 마을 입구 다리(순례자 다리 : Puente de Peregrinos) 아래로 맑은 천이 흘렀다. 이미 배낭을 벗어 던진 수영복 차림의 순례자들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이 늘어서 있는 천 주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몰리나세카(Molinaseca)
 몰리나세카(Molinaseca)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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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를 건너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은 바와 슈퍼마켓이 있었다. 다음 마을을 오늘 종착지로 정했다. 그만 여기서 머무를까? 갈등이 일 정도로 마을 풍경은 나를 유혹했다. 아픈 발바닥을 쉴 겸, 마을 마지막 바에서 생맥주를 한 잔 시키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을 벗어나면 목적지까지 8km 주도로를 걸어가야 한다. 2시간 정도 걸리는 땡볕 길이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들이키며 정오가 지난 시간, 먼 도로 너머로 일렁거리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대체, 나를 이 땡볕에 걷게 만드는 원동력은 뭘까.

전에는 욕심도 내 편이라고 여겼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노력들이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정당화된 욕심과 주변의 칭찬은 더 과감하게 내 자신을 몰아붙이게 하였다. 다행히도 건강한 몸이어서 잘 버텨냈을 뿐이다. 그렇지만 길을 걸으니 달랐다. 오로지 내 두 다리의 힘으로만 오랜 시간 걸어야 하니 몸에 집중할 수 있다. 몸의 작은 변화도 감지가 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줄어드니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만했다. 욕심은 도시나 이곳이나 똑같이 달콤해 보였다. 조금만 더 빨리, 더 많이 걸으면 유럽의 땅끝 마을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욕심은 한계를 넘어서 몸을 망쳐 버렸다.

오전에 생각했던 나의 장점? 쳇! 욕심 앞에서는 다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다. 긍정적이 아닌 비합리적인 낙천주의자다. 먹고 자는데 불편이 없고 쉽게 환경에 동화되는 것이 장점이 되는 것은 육체적으로 건강했을 때의 이야기다.

- 김진세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이봄, p.287


어느 날 슬럼프에 빠진 정신과 의사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다. 그도 나처럼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릎 관절 통증 때문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그를 추동하는 힘인 '욕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욕망(차이는 있지만 '욕심'을 '욕망'이라고 바꿔 부르기로 한다). 욕망은 나를 키우면서도 나를 망치게 하는 두 얼굴이다. 또한 나를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살면서 욕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단호한 'No!'이다. 불가능하기에 영리한 공존법을 터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나' 가 '나'를 이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은 마음을 비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비우는 힘. 비울수록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힘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하산길에서의 겸손한 마음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꽃'에 눈길을 줄 수 있듯이 말이다.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진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이글거리는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 속에서 조금 더 걷자고 속삭였다. 아지랑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듦을 알면 내 속의 사소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좀 더 고생을 해도 괜찮을 나이라고.

결코 끝나지 않을 길처럼 질문도 답도 멈추지 않을 그 길을 나는 걷기 시작했다.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했다.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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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페라다 (Ponferrade)

목적지인 폰페라다(Ponferrade) 공립 알베르게는 후기 평이 좋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머물지 말라고도 했다. 나쁜 평가와 달리 기부금으로 운영 되는 그곳(기부금 명목으로 5유로를 받았다)은 깔끔한 4인실에 넓은 주방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국 순례자들을 전부 만났다. H 단체 순례자들(4명), 한국 중년 남자들(아직도 '성'을 알지 못한다), 젊은 친구들, 그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 두 명의 여자 순례자들. 그들 중 한 명은 이탈리아에서 요리사로 근무했단다. 그래선지 그녀의 음식 솜씨는 뛰어났다. 염치 불구하고 그녀들과 합석했다.

길 위에 있는 기부금 통
 길 위에 있는 기부금 통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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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래 전에 헤어진 하와이 출신 스펜서를 만났다. 그동안의 노곤함이 온 몸에 묻어 있었다. 발목이 좋지 않아 내일은 15km만 걷는다고 했다. 나는 한국 순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그와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찍 잠들었다.  

전날, 폰세바돈 알베르게에서 잘 때 맞은 편 침대를 나이 든 프랑스 여자가 사용했다. 밤 사이 왼쪽 발바닥이 울어서 깨어났다. 왼쪽 발바닥은 서럽게 울고 있는데 팔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자고 있는 그녀의 코는 메조소프라노 가수가 되어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정부터 거의 새벽까지 잠들 수 없었다.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침낭을 들고 바깥에서 잠을 잤다는 마틴 만큼이나 나도 예민해져 있었다. 침낭을 들고 바깥에서 잘 용기는 없었다. 코고는 소리를 시계 초침 삼아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깊은 잠은 코발트블루 빛 바다였다. 먼 수평선 너머로 돛단배가 들까불까하며 내 눈꺼풀을 잡아 끌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돛단배에 내 모든 것을 던졌다. 하나, 둘, 셋. 나는 점점 깊은 심해로 달음박질치고 있었고 그 다음은 암막 커튼이었다.

폰페라다(Ponferrada)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순례자들과
 폰페라다(Ponferrada)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순례자들과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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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프레그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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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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