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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아스 데 레치발로(Murias de Rechivakdo) 사설 알베르게에서의 저녁 식사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Murias de Rechivakdo) 사설 알베르게에서의 저녁 식사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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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난로가 있는 사설 알베르게

열아홉 번째 목적지로 잡은 마을은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3.5km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다. 한적한 시골 공립(municipal) 알베르게 직원은 한결, 가톨릭 사제 같은 분위기를 띤다(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래선지 엄격하고 성실하며 청렴한 아우라를 풍긴다.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Murias de Rechivakdo) 공립 알베르게 직원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마른 체구에 키가 컸다. 긴 머리를 뒤로 묶어 그렇지 않아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 부각되었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사무적이고 정확한 일처리, 독신 남성만이 풍길 것 같은 약간은 동양 여성에 대한 일종의 나르시시즘적인 경향(이들의 친절을 이렇게 폄하해서는 안 되지만)이 있는 것도 같았다.

20개 넘은 침대가 있었지만 겨우 네 명만 묵었다.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자 여자 순례자였다. 시골이었고 공립 알베르게는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조용하게 쉬고 싶은 내게는 최고의 안식처였다.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 공립 알베르게에서 빨래를 널고
 무리아스 데 레치발로 공립 알베르게에서 빨래를 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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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도착해서 샤워를 미루고 빨래를 먼저 했다. 샤워하면 으레 발바닥 소독을 해야 했다. 소독도 바로 할 수 없었다. 젖은 발을 햇볕에 충분히 말려야 했다. 넉넉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예 소독 시간을 독서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신발 속에서 풀려난 발은 더 이상 걷지 않겠다고 시위를 벌였다. 어찌나 통증이 나대는지 다시 신발 속에 구겨넣을 수조차 없었다. 신발을 신을 수 없으니 밖으로 나서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거즈를 떼지 않았다. 맥주 한 잔 마시고, 울적한 마음을 다스린 뒤에 샤워하고 소독해도 늦게 않겠지 싶었다.

알베르게를 나서려고 하자 직원이 나를 불러세웠다. 영어를 할 수 없는 그였다. 손짓으로 '추워지니 점퍼를 걸치고 가라'고 했다. 먼 들판에서 시작한 바람이 제법 세게 불고 있었고 나는 반팔 차림이었다. 나는 빨랫줄에 널린 빨래를 가리켰다. 옷이 없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점퍼를 들고 왔다. 

햇살은 있지만 우리나라 가을처럼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아침 일찍 나서면 손이 시리었다. 소매를 길게 내려 손가락을 감싼 다음 스틱을 쥐었다. 오늘 아침은 콧물까지 훌쩍거렸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또한 응달진 곳에 내린 눈이 얼어버린 것과 같은 모양새로 창공 80%를 덮어버렸다. 하늘이 떨어지면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조각조각 보이는 푸른 하늘을 위안 삼아 걸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2km 전에는 비까지 뿌려 우비를 꺼내입어야 했다.

그가 건넨 점퍼에는 온기가 있었다. 따뜻한 점퍼에 몸을 감싸고 발을 약간 절면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마을 길 옆, 화목 난로가 있는 건물을 점 찍어 놓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봤다. 나는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불을 쬐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위로를 받곤 했다. 과장되게 말하면 엄마의 자궁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랄까. 그래선지 본능적으로 끌렸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의 평온이 먼저 찾아왔다. 그 평온함에 이끌렸다. 마침 저녁 식사 하는 곳도 찾아야 했다.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없었다.

구름 형상만 보고도 심심하지 않았던 하루
 구름 형상만 보고도 심심하지 않았던 하루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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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입구에 섰다.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건물 안쪽에 마련된 조그마한 정원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한구석에 바도 있었다. 식사까지 제공하는 듯했다. 지나칠 때는 알지 못했는데 이곳도 알베르게였다. 공립이 아닌 사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생맥주 한 잔의 사색
 생맥주 한 잔의 사색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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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하면 사설보다는 공립 알베르게를 고집한다. 공립이 사설보다 싸지만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날 정도는 아니다(공립이 사설 알베르게 보다 더 비싼 곳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설보다는 공립 알베르게가 더 오래되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진짜(?)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머물렀겠지 싶었다. 그들이 남겨 두고 간 체온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존경심이었다.

사설 알베르게 여자 직원은 무척 친절했다. 공립에 머무르기 때문에 저녁 식사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했다. 저녁 식사가 해결되자 나는 생맥주 한 잔 들고 그곳 정원 의자에 앉았다. 건물이 정원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다. 창문도 정원을 향해 나 있었다. 우리나라 황토 건물처럼 흙집이었다. 그래선지 집과 아주 먼, 스페인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앉아 있어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We are on Camino(우리는 까미노 위에 있다)

아스트로가(Astorga)
 아스트로가(Astor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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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스토르가에 도착하기 전에 데이비드를 우연히 만났다.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Santo Toribio) 언덕에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온 듯했다. 며칠 만에 봤는데 그새 수염이 많이 자라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왜 신발을 바꾸지 않았냐고 또 물었다.

레온(Leon)에서 신발을 살 거라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사야할 신발 브랜드가 없었다고 했다. 어중간한 신발을 사느니 그동안 길들였던 신발이 더 낫지 않겠니? 라고 되물었다. 데이비드는 레온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났냐고 연이어 물었다. 프란체스코. 부르고스. 병원. 신발. 그리고 발바닥 때문에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한, 레온에서의 고독이 밀려왔다. 나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프란체스코를 레온에서 봤다고 했다. 데미안도 레온에서 머물렀을 거라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몇 걸음 앞서 가던 그가 뭔가 생각난 듯 돌아보았다. 활짝 웃으면서 내게 제안했다. "아스토르가에서 파스타를 먹으면서 잠깐 쉬려고 해. 같이 파스타를 먹을 거니?" 그의 옆에는 동행자가 있었다. 왜 까미노 친구를 만들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답하듯 그보다 더 길쭉한(?) 순례자였다(서양인들 체구가 다 그렇다).

잠시, 요 잘 생긴 젊은 친구들과 파스타와 생맥주를 마시면서 한바탕 수다를 떨까, 라고 망설였지만 내 느린 걸음처럼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싶었다. 나는 살짝 웃기만 했다. 그들은 아스토르가 광장 식당의 북적함 속으로 그들의 긴 다리처럼 재빠르게 사라졌고 나는 물집 잡힌 왼발을 쉬기 위해 카테드랄 광장(Plaza Catedral) 의자에 앉아 배낭을 내려놓고 양말을 벗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가우디 건축물(Palacio Episcopal)과 대성당 박물관(Museo de Catedral)의 하늘로 날아갈 듯한 아름다움을 탐하면서 광장을 활보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현재의 사람들과 과거의 건물이 바로 한 공간 한 시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볼 수 없지만 바로 옆의 다른 시공간에서도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가우디를 조용히 호출했다. 그의 독신 생활과 연인, 유아기적 상상력(누군가가 그의 건축물 곡선을 두고 모 책에서 이렇게 평했다)을 생각하다가 지금 내가, 제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도. 이렇게 차례차례 사람들을 불렀다가 보내주기를 반복했다.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 언덕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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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알베르게에서 맥주를 마시는 시간에도 양말 벗은 맨 발등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시공간을 뛰어 넘은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그리고 데이비드한테 문자를 받았다.

'~We are on Camino, so it is possible, that we meet again. You can never know.'

데이비드가 보낸 문자처럼,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그것은 신만이 아는 것일까. 인생이라는 까미노(camino : '길'이라는 뜻) 위에서, 아직도 진행하고 있는 인생의 길 위에서, 언젠가는 혹은 조만간 만나게 될 누구, 그리고 헤어질 그 누구, 그 누구 중에서 내 속의 '나'는 몇 번째일까. 여러 감정들과 생각들이 겹쳤다. 나는 나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나를 제대로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데이비드에게 문자를 보냈다.

'When can I meet 'me'? Is this possible?'

평안한 저녁 식사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 사설 알베르게에서의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음식도 사람도 훌륭했다. 맞은편에 앉은 프랑스 청년은 5월 10일 시작하여 생장에서 800km 전에 있는 도시에서부터 지금껏 걸어왔다고 했다. 옆에 앉은 마리아호세라는 스페인 여자는 레온에서 시작하여 고작 이틀 걸었다고 했다(그녀를 몇 번 더 만난다). 학교 선생인데 20일 기간으로 잡고 와서 레온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마리아호세는 배려심이 많았다. 많은 질문 중에 하나는 왜 한국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향해 가느냐였다. 내가 제일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였다. 나는 내 경우만 말했다. 오고 싶었고 걷고 싶어서 걷는다고. 무엇보다 다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대화하는 데에 훨씬 편했다. 그들은 내일 넘어야할 산에 대한 걱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내일 걱정은 내일 하기로 했다. 오늘 따뜻함을 먹었으니 포만감을 안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바람에 잘 마른 옷을 걷은 뒤에 말이다. 그리고 내일 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오늘처럼 무사할 거라고 내게 속삭였다. 까미노 위에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나를 도울 것이기에.

오르비고 다리(Pente de Orbigo)
 오르비고 다리(Pente de Orb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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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프레그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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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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