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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이 제주4.3의 진실에 대해 열강을 하고 있다.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이 제주4.3의 진실에 대해 열강을 하고 있다.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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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것...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지난달 31일 토요일 오후 4시 대구민예총 초청으로 대구 향촌동 소재 대구문학관을 찾은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의 말이다.

노작가가 어눌한 말투로 알린 제주4.3의 진실

현기영 선생은 유년기인 7살 무렵 제주4.3을 몸소 겪었다. 현 선생은 작가가 되어 그 잊지 못할 아픔의 역사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일관되게 알려온 작가다. 당신이 몸소 겪은 일이기에 그가 이날 강연에서 내뱉는 언어의 무게는 남달랐다.

시종 어눌한 말투로 느릿느릿 4.3의 진실을 알리는 노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청중의 귀는 쫑긋 열려 있었고, 공기는 무거웠다.

노작가는 4.3 이후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면서 말 더듬는 버릇은 유년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해서 청중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문단 데뷔 후에 더는 글을 못 쓰겠더라. 그런데 술을 마시니 가슴이 좀 터지더라. 말 더듬는 버릇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7살 때의 기억 때문이다. 국가폭력의 실상을 그대로 겪은 어른들은 더욱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노작가의 어눌한 말투로 전해지는 4.3의 실상은 처참했고, 이날 모인 30여 명의 청중의 공감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제주4.3의 진실을 알린 최초의 문학작품인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이 대구에 와서 제주4.3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제주4.3의 진실을 알린 최초의 문학작품인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선생이 대구에 와서 제주4.3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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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해수욕장, 성산포 터진목, 정방폭포 등등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너분숭이 애기묘에 꽃이 피었더라. 넋이 꽃으로 핀 것이다... 당시 3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다. 진혼, 넋을 달래줘야 한다. 억울함을 달래줘야 한다. 잘 위령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가 망하는 길이다."

1948년 3월 1일 미군정에 의해 기용된 친일파들과 당시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의 폭정에 못 이긴 제주도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그 사건이 빌미가 되어 4월 3일 무장봉기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로 인해 1954년까지 제주도민 3만이 희생된 사건이 제주4.3사건의 개요다.   

"1947년 3.1절에 좋은 나라 만들기 위해서 모여 보자. 그래서 북국민학교에 도민들이 모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총격으로 3명이 죽고, 10명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당시 군경이 발포는 정당하다 하니까 총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관과 경찰까지 파업을 벌였다... 탄압이 시작되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고문으로 세 명이 죽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죽으니 서서 싸우자 하면서...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게 뭐가 빨갱이냐? 당시 무장봉기란 것도 일본이 버리고 간 30정의 구식 총과 죽창이 전부였다. 가족이 죽어나는데 죽을 줄 알아도 달려드는 것이 인간이다. 훗날 군경의 한 간부는 '고양이에게 쫓긴 쥐가 뒤돌아서 고양이 코를 문 격이 제주4.3이다'고 했다" 

1978년 <순이삼촌> 발표로 모진 고문을 겪어

이승만 정부로부터 이어지는 우익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온 좌익세력에 의한 봉기가 아니라, 주민들의 자발적 생존투쟁과 민주주의 항거란 설명이다.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요구가 왜 좌익 활동으로 매도되어야 하냐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국가가 양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건이 제주4.3의 진실이란 것이다.

노 작가는 이런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군사독재 정권이 발악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1978년 제주4.3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했고, 그 때문에 당시 보안사(기무사의 전신)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한다.

"<순이삼촌>을 1978년에 작품으로 발표했다. 발표 후 보안사에 끌려가 3일 동안 고문당했다. 그리고  한 달간 보안사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화탕지옥의 시간이었다." 

당시의 고문의 처참한 현장은 오늘에 사는 우리는 간혹 스크린 등을 통해 재현되는 장면으로 짐작할 뿐, 그 아픔을 결코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화탕지옥을 경험을 하고 다시 글을 쓴다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일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노작가는 한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고 고백했다. 
현기영 선생의 강연을 이날 모인 40여 명의 대구 청중들이 경청하고 있다.
 현기영 선생의 강연을 이날 모인 40여 명의 대구 청중들이 경청하고 있다.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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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로운 슬픔, 해결될 수 있는 슬픔이 문학이다. 그러나 4.3의 슬픔은 문학이 되지 않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일이다. 문학으로 표현이 너무 어려웠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을 겪고, 그로 인해 모진 고문 그리고 이어지는 열패감까지 그는 도대체 그 힘겨운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기무사에서 나와서 술로 허송세월 보내는데, '순이삼촌'이 홀연히 나타나 "너 왜 이러고 있냐?" 했다. 그래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시절을 헤어나올 수 있었다"

제주4.3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는 것

유년시절의 기억은 평생을 간다. 그것도 이런 학살의 기억은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작가는 평생을 이 기억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리라.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에 이렇게 써있다 하더라. '아우슈비츠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제주4.3을 망각하는 것...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강연 후 현기영 선생이 청중에게 자신의 책 <순이삼촌>에 저자 사인을 해주고 있다.
 강연 후 현기영 선생이 청중에게 자신의 책 <순이삼촌>에 저자 사인을 해주고 있다.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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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가의 말처럼 제주4.3의 아픔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되니까 말이다. 70년 전 제주 땅의 비극이 오늘날에도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제주4.3을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기에.

4월 3일 오늘은 제주 4.3항쟁 70년이 되는 날이다. 기념식이 열리고 추모제가 열리는 것은 제주4.3이 잊혀지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의 간절한 염원의 발로다. 아니 당시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3만 넋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날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아울러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이다.

그것은 노작가의 바람이자, 이 땅을 살아가는 평화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일 것이다. 다행히 촛불항쟁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어쩌면 지금이 4.3의 진실을 규명할 철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노작가의 바람을 문재인 정부가 깊이 새겨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평화뉴스>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제주4.3, #민간인 학살, #현기영 , #순이삼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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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깎이지 않아야 하고, 강은 흘러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의 모색합니다. 생태주의 인문교양 잡지 녹색평론을 거쳐 '앞산꼭지'와 '낙동강을 생각하는 대구 사람들'을 거쳐 현재는 대구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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