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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애에는 당대의 역사가 알게 모르게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또한 그 시대의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심지어 역사의 드라마틱한 소용돌이가 청소년기를 관통한 사람들이라면 오죽할까.

1945년 해방 후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된다. 일본 정부의 부당한 귀국정책, 조국 땅의 심상치 않은 정세와 전쟁, 생활 기반의 문제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우리말과 글을 모르는 자식들을 위해 국어강습소를 세운다.

식민지민으로서 말과 글, 이름까지 빼앗겼던 조선인들에게 말과 글을 되찾고 역사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전국의 국어강습소는 어엿한 초,중,고교로 발전하지만 강제폐교를 당하고 다시 세웠다가 또다시 탄압을 받는다.

보쿠라노하타(우리들의 깃발)
 보쿠라노하타(우리들의 깃발)
ⓒ 도서출판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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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소설 <보쿠라노하타 1, 2>(우리들의 깃발)는 그 소용돌이 속의 조선학교와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복잡한 시대의 역사와 개인의 성장통이 학생 '김석철'의 시점으로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다.

중학교 입학식 날 첫 등교에서 아이들이 마주한 풍경은 시대의 역사 그대로였다. 과거 일본군 무기고였던 학교는 열악한 콘크리트 창고를 교실로 쓰고 있고, 바로 옆은 철조망을 두른 미군의 사격훈련장이었다.

고막을 찢는 요란한 총소리에 귀를 막고 놀라던 신입생들이 어느새 총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조국! 통일!"을 외치며 이겨내기까지 학교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금도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민족교육의 암흑기'라 불리는 시기였다.

소학교 시절 일본경찰의 학교 습격을 받아야 했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 새로운 '일상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폐교 대신 도립학교가 된 탓에 교내에선 조선말이 금지된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겨우 5년째였다. 아이들은 첫날부터 일본인 교장, 교사들에게 '우리는 조선사람이니 조선말로 말씀해주세요!'란 투쟁을 시작하고 스스로 우리말쓰기 운동을 벌인다.

하지만 아이들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일본인 교사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돌아갈 것이라 여겼던 조국에서 터져버린 전쟁. 거기다 조국전쟁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간다. 더 열심히 우리말 공부를 하고 매일 하교 후 거리에 나가 반전운동을 벌인다. 그렇게 해서 일본인들에게 받은 서명이 100만이 넘었다.

반전운동이 구실이 되어 또다시 일본경찰의 학교 습격을 받는다. 중학교 1학년생들만 남아있던 학교에 수천 명의 경찰들이 쳐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학교를 지켜야겠단 마음에 교문 앞에서 몸으로 경찰을 막는다. 경찰봉에 맞고 발로 짓밟히고 굴욕을 당하며 아이들은 몸 속에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을 새기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조센징" 소리를 들으며 받아왔던 차별과 따돌림을 받는 아이들. 이들이 '조선인인 나는 왜 일본에 있는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 정의하는 국어사전에 당혹감을 느끼며 고향과 조국에 대한 고민,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역사의 사생아'라 부르고 차별을 극복하고 자기만의 깃발을 힘차게 휘날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처지와 고민은 별반 다르지 않다. 아직도 조선학교는 일본에서 사회적, 제도적 차별을 받고 있다. 주인공 석철이가 고교 시절 존폐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학교에 북한은 교육원조금을 보내준다.

그리고 일본에서 나고 자란 동포들에게 조국으로 와 공부할 수 있는 길도 만들어준다. 재일조선인에 대해 아무 정책도 관심도 없었던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처우였다. 자연스레 조선학교는 북한식 교육을 따르게 된다.

북한과 일본은 지금도 미수교국이고 정치적 갈등이 복잡하다. 그러하기에 북-일간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타격을 받는 건 조선학교와 그 학생들이다.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인 치마저고리가 등하굣길에 찢기는가 하면 우익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거기다 학생이라면 모두 살 수 있는 전철정기통학권도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밖에도 각종 학생체육대회 참가문제, 대학 입학수험 자격문제, 학교 앞 스쿨존 부재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고교무상화 문제까지 일일이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의 투쟁으로 바꾸고 싸우는 중이다.

북-일 관계를 구실로 인간의 기본 권리인 교육권조차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가 일제 식민정책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70년간 이어진 일본정부의 이러한 차별정책은 역사적 책임을 기만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우리학교> 중 한 장면
 조선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우리학교> 중 한 장면
ⓒ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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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라노하타>에는 차별과 분단, 민족 이주의 시대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갔다가 불안한 정치상황으로 다시 밀항해 온 친구가 외국인등록증 불소지로 걸려 전쟁중인 한국으로 강제송환 될 때 눈물 흘리며 부른 '고향의 봄', 정전협정 날 온 동네 동포들이 아침부터 모여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시고 때 빼고 광낸 삼륜 트럭을 타고 축하 모임에 가던 일 등 시대의 풍랑 속 재일조선인들의 웃음과 눈물이 담겨있다.

또한 이 시기 한반도 역사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각, 북측의 시각 등을 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자신들이 가는 길,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모두 개인의 삶이며 동시에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새로 열어가는 싸움이었던 이들의 기록이 바로 <보쿠라노하타>이다.

올해는 1948년 일본의 조선학교 강제폐교에 맞서 싸웠던 한신교육투쟁이 70년 되는 해이다. 그리고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고교무상화 소송의 결과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70년간 이념적, 민족적 차별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 이름을 쓰며 자신들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 온 그들에게 이제는 고향 땅에서도 함께 깃발을 들어 화답해야 하지 않을까.


보쿠라노 하타 2 - 우리들의 깃발

박기석 지음, 정미영 옮김, 품(도서출판)(2018)


보쿠라노 하타 1 - 우리들의 깃발

박기석 지음, 정미영 옮김, 품(도서출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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