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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부터 #WithYou까지, 간명한 해시태그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나도 말한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뜨거운 주목을 받는 것이 새로울 뿐, 낯선 풍경은 아닙니다. 여성들은 이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해시태그를 앞세우고 사회 곳곳에 숨겨져있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에 대해 말해온 바 있습니다.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파편화됐던 여성의 목소리는 작은 태그 아래 모여 힘을 얻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3.8 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의 해시태그>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그간 터져나온 여성들의 소중한 선언을 조명하고, 앞으로 전하고 싶은 목소리를 한 문장의 해시태그로 정리합니다. 해시태그는 프로그래밍 도구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명령어' 앞에 사용하던 기호입니다. 우선,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작'입니다. [편집자말]
"신의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여편네의 잔소리가 울린다" 어느 모임 뒤풀이에서 40대 초반의 한 남성이 '농담'으로 던진 말이다.
 "신의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여편네의 잔소리가 울린다" 어느 모임 뒤풀이에서 40대 초반의 한 남성이 '농담'으로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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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여편네의 잔소리가 울린다"

어느 모임 뒤풀이에서 40대 초반의 한 남성이 '농담'으로 던진 말이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에 빗댄 것이었다. 그는 지역에서 소신 있는 활동을 해 온, 나름 '알려진' 인물이었다. 나도 여러 번 그의 강의를 듣고 청중으로서 감탄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성평등 의식이 부족해 보이는 발언이 심심찮게 나와 불편했다.

늘 신경이 쓰이던 차에 술자리에서 그의 '여편네' 발언이 내 귀에 꽂혔다. 나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의 '지적질'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누군들 편안하고 유쾌한 술자리에 찬 물을 끼얹고 싶을까. 그래도 나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잦은 그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중들도 이제 그런 낡은 성차별적 표현은 그만 들어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여편네'는 성차별적인 말이에요. 듣기 안 좋은데요."

역시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내가 농담과 농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여편네라는 말 속에 여성을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농담에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장애인 관련 표현을 예로 들며 "그럼 이런 말 쓰는 사람은 모두 장애인을 비하하는 건가요? 너무 예민한 거 아니에요?"라며 정색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야기가 엄한 데로 흘렀다.

"페미니스트의 발언은 너무 거칠고 세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같은 여성인 나는 그렇지 않은데 왜 페미니스트들은 불만 투성이냐"
"지적 받을까 봐 무서워 말을 못 하겠다"

이런 말들로 모임이 시끌시끌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걸(=여성주의) 해야 앞서가는 것 같은 분위기가 싫다"라는 말도 했다. "(여성주의가) 틀린 말은 아닌데 갑자기 들으면 당황스럽다.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정도가 가장 완곡한 표현이었다.

페미니스트를 향한 말말말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거칠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나에게 돌아온 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거칠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나에게 돌아온 말들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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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이 말한 '페미니스트'에는 나도 포함된 것 같은데, 나의 어떤 부분이 거칠고, 불만스럽고, 무섭게, 더군다나 앞서가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말투? 여성주의 이야기할 때만 튀어나오는 말투가 따로 있었나? 표현? 딱히 사나운 표현은 없었을 텐데. 내가 이론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앞서가는 느낌이란 뭘까. 페미니즘이 최근에 튀어나온 이론이나 주장이었나?

내가 "왜 페미니스트들은 머리가 남자처럼 짧아? 왜 그렇게 늘 화가 나 있어?"라는 질문을 가까운 남자 지인에게 받고 어이없다고 느낀 것이 15년 전이다. 여성이 다수인 이 모임 안에서조차, 여성주의는 최소한 이삼십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사실 그 모임에서 누군가가 한 말을 직접 지적한 것은 '여편네' 발언이 처음이었다. 나는 다만, 박근혜를 '미스 박', 최순실을 '아줌마'라 부르는 것은 여성혐오이며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 여성혐오 범죄다, 사랑하는 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아들과 똑같이 며느리도 자신의 명절을 보낼 권리가 있으니 나는 이번 명절엔 시댁에 가지 않기로 했다, 와 같은 의견을 내 발언 순서에 밝혔을 뿐이다.

그들은 내 의견에 딱히 동의도, 적극적으로 반박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의견을 낼 때, 그 목소리에 평소 생각과 관점이 녹아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무엇이 셌다는 걸까. 너무 솔직했나? 직설적이었나? 논리에 억지가 있었나?

찜찜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생각이 명확해졌다. 국립국어원에서 '여편네'라는 말을 포함한 5087개 성차별적 언어표현을 발표하고 다른 말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 지도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그 5087개나 되는 혐오 표현을 40년 동안 뼈에 새기도록 반복해 들어온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나는 5087개나 되는 표현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작은 목소리로 순화시켜 말하기 싫다. 센 것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는 너무나 당연한 이 불편함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겠다. 나는 좀 더 까칠해지기로 했다.

나는 피곤하지만, 건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참지 않는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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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나는 어느 모임에서든 성차별적 표현이 반복되거나 정도가 심한 경우, 될수록 이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SNS상에서도 그가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댓글로 표현한다. 그래도 불편한 표현이 계속되면 친구를 끊거나 차단한다. 다만 '아직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상대를 존중하려 노력하는 건 내 몫이다.

까칠하게 사는 건 자주 피곤하고 괴롭다. 일상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언어에도 반여성주의적 표현이 습관처럼 박혀 있으니 말이다. '예쁘다는 게 왜 성차별적 표현인가?'처럼, 누구나 가질 법한 질문에 답할 논리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진짜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적어도 그 발언의 당사자는 그날 이후로 '여편네'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대중 앞에서 말 한마디라도 실수할까 불편해졌을 수도 있다. 이것은 바람직한 불편함이다. 그렇다면 나의 피곤함도 '건강한 피곤함'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사실 여성주의는 어려운 게 아니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낯선 것도 자꾸 맞닥뜨리면 편안해진다. 귀를 열고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된다. 소리가 거세다는 핑계로 귀를 막지는 말길 바란다. 원래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작은 소리도 더 크게 들리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듣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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