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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의 빅토르 위고의 역작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1832년 6월 항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기록으로 유명세를 탔으며, 전 세계에서 수많은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발장'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대충 내용은 알고 있을 법한 작품이다.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져서 일까. 레미제라블의 전체 내용이 장발장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레미제라블은 1832년 당시의 파리의 모습, 파리의 비참한 시대상을 가감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을 통해 1780년대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을 이어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의 사이에 민중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일어난 1832년 6월 항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레미제라블은 1815년, 빵 하나를 훔쳐 19년 감옥살이를 해야했던 장발장이라는 사내의 출소로 시작된다. 1815년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한 뒤 3월부터 6월까지의 백일천하가 워털루 전쟁으로 끝나고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당한 때이다. 나폴레옹 정권이 몰락하고, 프랑스에게 근대의 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장발장이 출소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으로 즉위한다. 루이 18세는 1789년 1차 프랑스 혁명이후 영국, 러시아 등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했으며, 1815년 집권 이후 입헌군주정 체제를 구축한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닌 의회를 통해 선출된 총리에게 행정권을 주고, 왕국의 질서 유지와 안정에 열심을 쏟았다.

루이 18세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자연스레 그 동생 샤를 10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혁명의 유산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려했던 형과는 달리, 샤를 10세는 빈체제; 구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부르주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소유한 국가공채를 빼앗아 왕당파들의 토지를 보상해주었다. 혁명 이후 약화되었던 성직자들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불경죄는 사형에 처하는 등, 극단적인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1830년 5월에 열린 선거에서 국왕 반대파가 다수 표를 얻었고, 샤를 10세는 긴급명령권을 행사하여 의회해산, 언론 통제, 그리고 새 선거법을 제정하여 다시 선거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30년 일어난 7월 혁명으로 인해서 폐위당했다. 1830년 7월 혁명은 샤를 10세의 구체제로의 복귀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었다. 시민들이 공장의 문을 닫자, 왕과 귀족이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 혁명은 3일만에 끝나 다소 허무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7월혁명의 결과로 샤를 10세는 다시 망명을 하여 쫓기는 삶을 살다가 망명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샤를 10세의 폐위 이후, 급진적인 혁명가들을 프랑스 땅에 공화정을 세우려고 한다. 왕을 없애고 민중이 지도자를 세우는 나라를 꿈꾼다. 그러나 중산층들은 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1792년에 프랑스 공화정을 위해 싸웠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시민혁명에 성공했지만 왕정체제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잠깐 장발장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1815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장발장은 어딜가나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노란종이 때문에 여관에서 먹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장발장을 핍박하고, 멸시하고 증오한다. 감옥조차 장발장을 받아주지 않고, 헛간을 찾아 들어간 장발장에서 심지어 개 조차 죄인을 알아보는 듯 장발장에게 짖어댄다.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장발장이 한 노파의 조언으로 지역의 덕망있는 주교가 있는 성당으로 가게 된다. 미리엘 신부는 초췌하고 더러운 장발장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장발장을 노형이라 부르며, 장발장의 신분에 상관없이 손님대접을 하며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은식기로 음식을 대접한다. 주교의 이런 따뜻한 섬김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은 신부가 제공한 은식기를 훔쳐 야반도주한다. 물론 얼마 못가서  잡히게 되고, 주교 앞에 붙들려온 장발장에게 신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

주교는 경찰들에게 자신이 은식기를 선물로 주었으며, 은촛대도 함께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장발장을 두둔한다. 장발장은 예상치 못하게 죄사함을 받았다. 죄를 지었음에도 용서받게 된 장발장은 주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남은 평생 정직하고 새롭게 살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장발장은 자신을 속박하는 노란 종이를 찢어버리고, 도망친다.

1830년 7월 혁명의 결과는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의회를 구성하는 상원이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어 귀족 세력이 줄어들었다. 귀족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귀족의 제도적 지배는 종언되었다. 2. 특별재판소가 폐지 되었다. 3. 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가 끝이 났다. 4.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자유를 뜻하는 청색, 평등을 의미하는 백색, 그리고 박애를 뜻하는 적생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는 현 프랑스 국기의 기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7월 혁명은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를 침투시키고, 국제적으로 빈 체제를 약화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시민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며 즉위한 루이 필리프는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그리고 산업활동의 자유를 크게 보장한다. 산업활동의 자유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직물, 금속공업 산업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산업화가 일어나게 된다. 당시 부르주아들은 산업화로 인한 급속적인 성장에 힘을 입어 순식간에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귀족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된다.

새로운 삶을 위해 신분을 버리고 도망가기를 선택했던 우리의 장발장은 이러한 프랑스의 산업환경의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다. 신분을 숨기고 도망치던 중, 화재가 난 건물에서 지역 유지의 자녀를 구하게 되고, 그 은혜로 구슬공장에 취직, 구슬에 옻을 칠하는 기술을 발명하여 구슬의 생산량 증가에 막대한 영향을 누리게 되고, 구슬공장의 사장까지 된다. 부자가 되어서도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자기보다 낮은 자를 위해서 아낌없이 나누었던 장발장은 지역의 시장까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가석방 도중에 도망친 죄수가, 순식간에 신분상승이 된다. 이러한 장발장의 모습은 당시 급속한 부의 성장을 경험한 부르주아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지만, 성장의 열매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산업화로 인해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고,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는 급증했다.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는 많은데, 인구에 비해 주택, 수도 시설등은 턱없이 부족했다. 인구에 비해 위생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불량한 위생환경으로 인해 빈민들이 죽음을 당했고, 1831년에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던 빈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가 반드시 오르게 되는데, 이는 성장의 열매를 누리지 못했던 빈민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으며, 물가의 성장은 빈민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빈민가의 남성들은 술에 찌든 삶을 살게 되고, 빈민가의 여성들은 머리를 팔고, 이를 팔고, 여성의 정체성까지 팔아버리게 된다. 많은 여성들이 매춘굴로 들어가 매춘부로 삶을 살아간다.

팡틴이 이러한 성장의 열매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한다. 파리의 도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삶을 누리던, 누구보다 빛나는 치아와 살랑거리는 금발을 가지고 있던 팡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후, 자신의 아이를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기고 장발장의 구슬공장에 취업하지만, 미혼모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아이에게 생활비를 보내야하는데 수입이 끊어진 팡틴은 결국 매춘굴로 들어가게 된다. 여성으로서 가진 마지막의 것까지 팔아야했던 팡틴의 모습이 도시 빈민가의 여성들을 대변한다.

테나르디에 부부, 에포닌을 통해서도 빈민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테나르디에 부부는 항상 술을 마시고 있고, 항상 취해 있는데, 이는 급속한 성장의 열매를 얻지 못해 빈부격차에서 빈을 담당하며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아갔던,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갔던 비참한 빈민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827년부터 1831년까지 이어진 극심한 경제난, 그리고 32년 콜레라의 대유행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한 불신을 커지게 했다. 불만을 가진 국민들의 분노는 31년 리옹폭동으로 시작된다. 견직물 산업이 주를 차지했던 리옹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최저임금을 요구했고, 기업가들은 정부의 힘을 빌어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1830년 7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보나파르티스트, 급진 개혁파들은 여전히 왕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만 보고있던 이들에게 과거 나폴레옹 휘하의 자유주의 정치인었던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의 죽음은 혁명의 시발점을 마련해주었다. 급진 개혁파들은 6월 5일에 치른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장례 행렬을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중심지였던 바스티유 광장으로 이끌며 본격적으로 혁명을 시작했다.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한 시위대에는 외국인과 어린아이까지 참여하여 폴란드, 이탈리아인들의 자유를 지지하는 연설도 이루어졌다. 장례행렬이 시위대가 되었고, 군대는 이에 맞서 발포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레미제라블'속의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모여서 혁명을 계획했던 'ABC 카페'는 '내리다, 떨어뜨리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abaisser'와 발음이 비슷하다. 오랜기간의 왕정체제 속에서 고통받았을 민중을 위해 왕을 내리자라는 혁명의 의미가 들어간 부분이다.

1832년 6월 항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겁에 질려 혁명세력들을 도와주지 않았고, 시민들의 비협조로 혁명 세력들은 바리케이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7월 혁명, 2월 혁명과 다르게 1832년 6월 '항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저항했으나, 그것이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월 항쟁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공화정을 위해, 진정한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근대의 프랑스의 모습과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싸웠던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많은 공통점이 있다. 개혁을 준비하고, 혁명을 준비했던 세력이 사회의 높은 인물이 아니라, 잘난 지식인,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어찌보면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청년들이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무시하지 않고, 나중에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보다는 좀 더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권력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6월 항쟁과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은 공통점이 많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6월 '항쟁'처럼 한국에도 518 '항쟁'이 있었고,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48년 2월 '혁명'이 있고, 6월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고,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침해되고 있는 권리들이 있다. 우리의 자녀들, 미래 세대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훗날 역사에 기록될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태그:#레미제라블, #1832년6월항쟁, #대한민국 , #민주화운동, #어떻게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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