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k Up(목소리를 높여라)"

북미 영화계에서 일어난 #MeToo와 Time's Up에 이어 유럽에서도 묵직한 울림이 등장했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머그>의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는 유럽 영화계 내 성폭력을 종식시킬 계획을 발표했다. 'Speak Up'은 바로 그 캠페인의 이름이다. 슈모프스카 감독은 유럽 영화계가 '목소리를 높여라'라는 구호 아래 단결해야 하며 성적 추행과 학대에 대해 불관용의 태도를 보일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같은 원칙은 촬영 현장뿐만 아니라 사무실과 영화제 현장에서도 고수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Speak Up 캠페인뿐만이 아니다. 할리우드에서의 성폭력 근절 움직임이 있었던 여파인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역시도 비슷한 기조를 보이고 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배우 클라우디아 아이징어는 미투 운동의 흐름에 맞추어 이번 베를린 영화제 개막식에는 레드 카펫 대신 검은 카펫을 깔자고 제안했고, 인터넷에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서명에 동참해 지지를 표했다. 디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 역시 미투 운동은 단지 북미 영화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만연한 차별과 성적 학대에 대해 논의하고 현재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포럼을 열겠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연대의 차원에서 제작진에 대한 성폭력 문제제기가 있는 작품의 초청을 제외했다고 밝혔다.

베를린 영화제 참석한 김기덕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기자회견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이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하얏트호텔에서 신작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에 출연한 배우 이성재, 후지이 미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베를린 영화제 참석한 김기덕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기자회견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이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하얏트호텔에서 신작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에 출연한 배우 이성재, 후지이 미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완벽한 줄 알았던 베를린 영화제의 오점

이 같은 움직임에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배우나 제작자 개개인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를 영화제 전체의 주제로 잡는 데에는 그만한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베를린 영화제와 같이 영향력이 큰 행사가 성폭력 근절을 이야기 하고 이를 초청 작품 기준으로 삼을 때 산업 전반에 미칠 긍정적인 파급력도 기대해 볼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김기덕 감독이다. 그의 새로운 작품인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 비경쟁 부문인 파노라마 스페셜에 초청되었고, 김기덕 감독 역시 영화제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방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아마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작년 말 김기덕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의 폭행과 강요를 이유로 고소 당했다. 피해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연기 지도를 명목으로 배우의 뺨을 때렸으며, 사전에 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남자 배우의 성기를 잡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사실일 경우, 연출을 가장한 폭력이자 성적 학대다.

하지만 디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성명을 통해 김기덕 감독의 혐의는 알고 있지만 폭행에 대해서는 이미 벌금형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성폭력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피해자인 배우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김기덕 감독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영화제 측은 섣부른 속단을 피하기 위해 그의 영화를 초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답했다.

베를린 영화제의 김기덕 초청 왜 문제인가

베를린 영화제서 '여배우 폭행' 질문받는 김기덕 감독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이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여배우 폭행' 사건과 관련해 질문을 받고 있다.

▲ 베를린 영화제서 '여배우 폭행' 질문받는 김기덕 감독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김기덕 감독이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여배우 폭행' 사건과 관련해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김기덕 감독은 폭행이 유죄로 인정되어 500만 원의 벌금형 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강제추행치상과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 자료에 따르면 당시 검찰의 소극적인 태도 탓에 해당 사건의 진위는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당시의 정황을 자세하게 파악할 영화 촬영 필름은 제출조차 되지 않았으며 김기덕 감독 아래에서 일해 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스태프들이 적극적으로 증언할 수 없다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았다. 핵심 증인에 대한 소환과 대질 심문 역시도 없었다. 그저 '법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변호인단은 항고를 통해 검찰의 더욱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예정이다.

물론 베를린 영화제 쪽이 이런 세세한 사정까지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재판에서도 인정된 폭행 부분까지 문제삼지 않은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벌금을 내고 죗값을 치렀으니 그만이라는 의미일까? 그것은 사법부의 판단이지 영화제의 것은 아니다. 연출을 이유로 배우의 뺨을 때리는 것이 충분히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김기덕 감독과 그의 영화를 초청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미 형이 확정됐음을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은 아무리 봐도 핑계에 불과하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김기덕 감독은 기자회견에 참석해 자신의 폭행에 대한 구차한 변명과 억울함을 호소했다.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사과도 없었다.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김기덕 감독에게 사건에 관한 논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하지만, 현재까지의 결과만 봐선 그저 가해자에게 마이크만 쥐어준 꼴이 되었다.

진정성 있는 연대를 바라며

앞서 소개한 'Speak Up' 캠페인은 홈페이지에 공개한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성적 추행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면 경력에 불이익을 미친다는 무언의 협박이 존재해 왔다'. 유럽의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높이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런 부정의한 관행을 끝내고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더욱 크게 호소하도록 만들어 영화계 내 성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김기덕 감독 사건의 피해자는 선언문이 언급한 '불이익'을 가장 크게 받은 당사자였다. 사건이 논란이 된 이후 김기덕 감독 측은 해당 배우가 무단으로 촬영에 불참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하지만 발표된 녹취록에 따르면, 이와 달리 피해자는 김기덕 감독의 결정으로 영화 촬영을 그만두는 것으로 연락을 받고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이미 피해자는 촬영을 거부하고 연락조차 받지 않은 불성실한 배우라는 낙인을 얻고 말았다.

피해자는 사건 이후 충격으로 배우 일을 그만두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재기를 시도한다고 해도 과연 그 길이 순탄할 수 있을까?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배우-스태프가 자신이 영화계에서 겪은 성적 폭력과 추행을 이야기 하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피해자는 두려움에 숨고 가해자는 국제 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실에서 말이다. 'Speak Up' 운동과 베를린 영화제가 '미투' 운동의 가치에 합류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활동에 대한 국제적 연대라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그 지지의 손길이 닿는 것은 오직 서구에 한정된 것일까. 피해 배우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기덕 감독에 대한 제대로된 결단이 없다면 이번 베를린 영화제가 거둔 성과는 어느정도 '위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기덕 베를린 영화제 METOO SPEAK UP TIME'S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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