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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이 평등한 삶을 바라는 여성으로서 인생의 선배이자 엄마로서 두 아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남편이랑 너무 싸우지 말고,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살아. 그렇게 하나씩 따지고 살면 안 피곤해? 행복하게 살아야지."

엄마가 사소한 말 한마디로 발끈하여 부부싸움을 한 경험을 공유하면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심으로 걱정되어 하는 말인 줄 아니까 나쁘게 생각하진 않고 이렇게 답하곤 해.

"싸우는 일은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아."

아리야, 예민한 사람이 되기를 머뭇거리지 마라. 사실 예민하게 따지고 드는 건 사람들 말대로 정말 피곤한 일이야. 다들 그냥 넘어가는 것을 따지고 들면, 고집 봐라. 기가 세네. 나대네.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네. 친하던 사람들도 쉽게 멀어지지.

여성차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태어날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여성들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많아. 차별 받으면서도 당연시 하거나 알아도 묵인하지. 아니, 어느 면에서는 여자가 여성을 낮추는 일에 앞장서기도 해.

엄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타고나기도 했고, 후천적으로 길러지기도 했어. 결혼을 하여 아내, 며느리, 엄마가 되니 더 잘 느끼게 되는 것 같아.

좋은 게 좋은 거고. 분위기 잘 맞추는 순종적인 여자가 사랑받는 세상. 무디고 어리숙한 여자에겐 아름다울 미(美)까지 붙여 '백치미'라 부르는 세상에서 여성혐오니, 구조의 문제니 따지고 드는 여자는 이 사회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게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예민한 귀를, 예민한 눈을 갖길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마누라가 어때서?

하지만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예민한 귀를, 예민한 눈을 갖길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사진은 KBS 드라마 <고백부부> 한 장면).
 하지만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예민한 귀를, 예민한 눈을 갖길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사진은 KBS 드라마 <고백부부>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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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예민하게 구는 여자고, 아빠는 무조건 미안하다거나 알겠다고 기분을 맞춰주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야. 엄마나 아빠 둘 중 한 사람이 순종적이라면 말다툼은 필요 없을 텐데. 둘 다 목소리가 크다.

'둘 다' 라는 게 중요해. 아빠가 고분고분 해도 갈등은 없을 수 있는 문제인데 왜 '고분고분'이라는 말은 여자에게 주로 쓰이는지. 하여튼 예민한 엄마와 예스맨이 아닌 아빠는 단어 하나로도 부부싸움을 할 수밖에.

까칠한 엄마는 아빠가 남에게 엄마를 지칭하며 '마누라'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싫었다. 결혼한 남자가 제3자에게 자신의 배우자를 말할 때 호칭을 살펴보면 집사람, 아내, 와이프, 마누라, 처, 여편네, 각시가 있어. 

어느 것 하나 맘에 쏙 들지는 않지만 이 중에 아빠가 선택한 '마누라'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별로인 거야. 그래서 그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했지. 아빠는 이번에도 순순히 알겠다고 하지 않고 토를 달며 목소리를 높였어. 또 피곤한 싸움이 되었지. 늘 그렇듯 아빠의 말은 엄마가 유별나다는 거야.

이 호칭은 많은 남성들이 사용하는 말이고, 어원이 본래 높이는 말이고, 다정하고 친근한 말인데 그걸 기분 나쁘다고 하니 엄마가 문제라는 거지. 

아빠 말대로 '마누라'는 흔히 사용하는 호칭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다소 정겹게 느껴지는 단어긴 해. 어원을 찾아보면 본래 높이는 말이기까지 하다.

'마누라'는 15세기의 <삼강행실도>에 '마노라'로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의 '마노라'는 '주인'의 의미였대. <이두편람>에서는 비천한 사람이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했고. <한중록>에서는 '왕,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과 같은 궁중의 높은 인물을 직접 지시하는 데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비마노라, 선왕마노라' 등으로 활용되어 궁중 인물과 결부된 존칭어로 쓰였다는 구나. 남녀 구별없이 지극히 높이는 의미로 말야.

그런데도 엄마에게 이 호칭이 너무 불쾌한 이유는 단어의 쓰임에 있다. 그 옛날에는 극존칭으로 쓰였을지 몰라도 19세기 이후 어형이 '마누라'로 변한 이후에는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어. 존칭으로서 남녀 모두에게 통용되던 단어였지만 '중년 이상 된 아내'나 '보통의 늙은 부인' 등 여성에게만 쓰는 단어로 쓰임이 달라지면서 존칭의 의미는 퇴색 되었거든.

일부의 사람들은 '마주 보고 눕는 여자'라거나 '남편과 같이 못 있고 마루 밑에나 있는 여자', '마주한 누나', '마, (이제) 누우라' 등으로 어원을 설명하기도 한다.

다정다감하게 부를 때는 한없이 친근하다가도 아내를 낮추고 업신여길 상황에서는 '여편네' 만큼이나 천대하는 호칭이 되었어.

"이 마누라가 미쳤는지 기어오르더라고!"

이 문장이 어색하지 않지? '마누라'가 존칭의 말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부부는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으로 동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기어오를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문장은 어색함 없이 쓰이잖아. 배우자를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보고 내리까는 상황에서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마누라'.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언제든 내리깔 준비가 된 호칭이라니. 엄마는 이렇게 남자들 기분 따라 제멋대로인 호칭이 싫었어.

아빠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한 건 아니지만 한 여자로, 동등한 부부관계로, 존중받는 느낌이 드는 말은 아니라고 느꼈거든. 역시나 찾아보니 엄마만의 생각은 아니었더라.

2006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차별적, 비객관적 언어 표현 개선을 위한 기초 연구' 조사 결과에서도 마누라를 불평등 단어라고 규정하고 있어.

'미망인'은 남편이 사망한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봉건시대적인 가치관이 숨어있는 표현으로. '시집가다', '바깥어른', '집사람', '학부형'은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여편네', '마누라', '여시'는 여성을 비하하는 양성 불평등 관련 표현으로 발표한거야.

말이 길어졌는데 각설하고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평화를 위해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으면 엄마는 더 행복했을까? 예민하게 따지고 싸워서 더 행복해졌을까?

엄마는 마누라로 불리기 싫다 했고, 아빠는 남들 다~ 쓰는 말인데 왜 너만 유난 떠냐 목소리를 높였잖아. 아빠가 뭐라 그래도 엄마는 예민한 여자가 되기로 했어. 끝까지 예민하게 굴었지. 격렬하게 싸움을 했던 며칠 후 아빠가 말하더구나. 남에게 엄마를 지칭할 땐 '아내' 를 사용하겠다고. 그리고 아빠 폰의 엄마번호를 '내안에'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더라.

내 안에

'안에'라는 말이 생긴 이후, '마누라'일 때보다 훨씬 더 존중받는 기분이야
 '안에'라는 말이 생긴 이후, '마누라'일 때보다 훨씬 더 존중받는 기분이야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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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내래. 엄마는 이보다 더 좋은 신조어를 들어본 적이 없어. 고작 세 음절인 '내안에'는 생각만으로 입가에 웃음이 난다.

엄마의 예민함을 수용해준 고마움에 웃고, 아내라는 말로 불릴 때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 웃고, 아내를 발음하며 안에를 떠올린 아빠가 사랑스러워 웃는다.

친근하게 듣고 넘기면 될 일을 문제제기하는 예민함. 남들은 다 쓰는 말을 불편해 하는 예민함. 엄마의 이런 예민함은 결국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해주었어.

'안에'라는 말이 생긴 이후, '마누라'일 때보다 훨씬 더 존중받는 기분이거든.

싸우지 않고 '마누라'로 불릴 때보다, 피곤한 다툼의 과정으로 얻은 '안에'라는 말로 불릴 때. 엄마가 아빠와 동등한 부부로 대우받는 기분이고, 아빠의 기분에 따라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어. 아빠와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

아리야!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야. 남들이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네가 부당하다 느낀다면 예민하게 굴어. 남들이 화내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화를 내는 게 이상한 건 아냐.

너는 단지 네가 누려야 할 행복을 당당히 주장하고, 존중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인 거야. 결국엔 예민한 사람들이 더 큰 행복으로 향한다. 우리 사회는 예민한 여자들에 의해 이만큼 좋아진거야.

사람들은 여자들 살기 참~좋아졌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좋아지길 바라는 거냐고 묻기도 하지. 하지만 여성차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완화된 것뿐이야.

엄마의 엄마는 심각하게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차별 받으며 눈물 나게 살았고. 엄마는 아주 아주 아주 차별 받으며 살고 있어. 예민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네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평등해지겠지.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더 존중받으며 살고 싶다면 말해야 해. 예민한 사람으로 불리는 걸 두려워 하지마. 넌 예민한 게 아니니까.


태그:#주간애미, #엄마, #페미니스트, #마누라,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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