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예수정

영화 <신과 함께>에서 주인공의 엄마로 분한 예수정은 그 자체로 밀도 높은 캐릭터였다. ⓒ 이정민


그간 스크린을 채운 엄마 캐릭터에는 전형이 있다. 엄마의 대명사가 된 훌륭한 배우들은 많은 관객과 호흡했다. 그렇다면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 속 예수정은? 40년 가까운 그의 연기 경력을 바탕으로 입은 청각장애인 엄마는 그 자체로 신선했고, 천만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차고 넘쳤다.

소방관으로 사람을 구하다 사망한 자홍(차태현)에겐 가난의 슬픔이 있었다. 총기사고로 죽은 동생 수홍(김동욱)의 억울함과 어머니에게 품었던 원망의 마음은 저승길 재판에서 위기로 작용했고, 그 엄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던 현몽에 나타나 마지막 저승 재판을 남긴 아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남긴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아마도 모든 엄마들이 자식에게 어느 순간 꼭 하고 싶지만 다른 말은 다 해도 그 말은 못 하고 사는 말이 아닐까. 마치 문신처럼 박혀있지만 차마 입으로 하지 못했던 그 말,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말이기에 게다가 장애인 엄마가 그 대사를 하니 공감을 받은 것 같다."

삶을 켜켜이 담아내다

지난 5일, 그의 단골 카페에서 만난 예수정은 우아한 아티스트였다. "여기 그림 보면서 인터뷰해요"라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에게서 삶의 고통을 온몸에 새긴 엄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속 몇 장면을 설명하며 그는 "감독님이 참 이야기를 잘 쓰셨다"고 말했다.

"영화 속 엄마는 큰아들의 부재와 둘째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현몽에서 둘째)아들이 에둘러서 죽는다는 얘길 하는데, 곧 죽는다고 하는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귀하기에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올인해서 얘를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승화한다. 지나가는 1초 1초를 거부도 긍정도 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그렇게 이해했다. 모든 세포를 열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아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현몽(꿈이나 신령 등으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기자 주)이라는 설정을 참 잘 쓴 것 같다. 마지막에 엄마로선 얼마나 간절하게 그 말을 하고 싶었을까. '너희들의 잘못은 없어, 다 내 잘못이다. 사랑한다' 딱 필요한 말만 하는 엄마였다. 캐릭터 설정이 참 좋았다."

 신과 함께- 죄와 벌

영화 <신과 함께> 속 한 장면. 극중 자홍과 수홍의 엄마(예수정)는 총기 사고로 죽은 수홍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원작 웹툰은 보지 않았지만 예수정은 "시나리오 자체가 완성도가 높았고 재미있었다"며 작품의 첫 인상을 전했다. 죽음 이후의 삶을 판타지로 그려낸 작품이라니. 그도 그럴 것이 몇몇 인터뷰에서 그는 '죽음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라고 한 미국 경제학자 스콧 니어링의 말을 자신의 인생관 중 하나로 설명한 적이 있다.

"특히 나태지옥과 배신지옥이 재밌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 안 걸릴 수 없지(웃음). 그런 지옥을 돌아다니며 인생에서 지은 죄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게 참 좋았다. 위인들 회고록을 읽으면 사람들이 감동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름의 지옥을 떠올리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객 분들 역시 이렇게 영화를 보면서 두 시간 동안 자신만의 회고록을 쓰거나 그러실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삶에 남아 있는 잘못을 생각하다 보면 다들 엄청난 지옥의 유령을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동시에 이 영화가 참 따뜻한 이유는 이승에서 용서받으면 저승에서 다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용서가 있는 기독교적 사상 같았다. 용서하면 영화에선 환생한다는 설정이 있잖나. 기독교로 보면 일종의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얼핏 보면 황당하기도 한데 삶을 켜켜이 잘 담은 작품 같았다.

보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는 게 아니잖나. 개인적으로 보고 난 뒤 기분이 나빠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걸고 캐릭터들이 진심으로 달려가는 영화는 좋은데 꼭 말미에 이 세상에 진실은 없고, 너도 나쁘고 우리 모두가 나쁘다고 하는 어둡고 습한 영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소망이 없어보여서 보고 나면 좀 불쾌함이 남더라. 누군가는 인간이 다 그런 것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삶이 설령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가 잊고 있던 내 안 어느 구석에 있는 보석 같은 어떤 면을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신과 함께>에 그런 여지가 있더라."

 배우 예수정

ⓒ 이정민



마피아가 되고 싶었던 예수정

본래 예수정은 영화 보단 무대 예술로 자신의 지평을 넓혀왔다.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이후 <밤으로의 긴 여로> <그린 벤치> <늙은 부부 이야기> <신의 아그네스> 등 예술성과 실험성을 겸비한 많은 작품을 소화했다. 무대를 경험한 많은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방향을 굳힌 것과 달리 예수정은 고르게 양쪽에서 활동하는 중이다. 최근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선 주인공 제혁(박해수)의 엄마로 등장한다.

알려진 대로 그의 모친은 드라마 <전원일기>로도 잘 알려진 배우 정애란(본명: 예대임) 선생이다. 남편 또한 연극이론 쪽으로 유명한 학자이며, 딸 역시 연출가다. 말 그대로 예술가 집안인 셈. 하지만 그 또래, 특히 여성 배우들이 그랬듯 예수정 역시 연기자의 길을 걷기가 순탄하진 않았다.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대뜸 영화 <대부> 속 말론 브란도를 보고 연기에 매료됐고 그 길로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다 결혼과 출산으로 공백기가 꽤 있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혈혈단신 아프리카 대륙으로 떠나보기도 했다. 모든 게 "내 삶을 이 두 발로 살아보자"는 스스로의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론 브란도! 멋있잖나. 아이와 함께 꽃밭을 보다가 쓱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어린 마음에 확 끌렸지(웃음). 진짜, 멋있네. 딱 한 번만 저런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법을 어기는 자를 혼내는 여자 마피아를 해보고 싶었다. 연기에 관심이 있진 않았다. 그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삶이 멋있게 느껴진 거지. 그러다 한 선배가 '네 어머님이 배우인데 연기 한 번 해봐' 해서 시작한 거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9년 간 공백이 있었지. 공부를 못했다. 머리가 나빠서(웃음). 즐겁게 지냈다. 도서관도 잘 돼 있었고, 그곳의 시민정신이 뭔지 살면서 느꼈다. 학문이 아닌 생활면에서 배운 것 같다. 기숙사에서 걸레질도 참 열심히 했다(웃음). 아프리카는 연극을 하다보니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가 없어서 나도 월급 받으며 살자는 마음으로 간 것이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안 좋아져서 다시 돌아왔다. 이때가 독일 유학을 다녀온 한참 뒤였지.

그 때가 제 삶에서 한 번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일을 계속할 것인지, 가정적인 삶을 살 것인지. 왜 바깥일을 자꾸 하냐고 당시 어머님이 계속 물으셨거든. 그래서 내 두 발로 살아보고, 삶을 똑바로 바라보자는 차원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구세주 같은 연출가님(이성열 연출가)의 부름을 받고 다시 연기에 복귀했지."

나름의 굴곡진 연기자 생활에서 예수정은 두 사람의 이름을 더 언급했다. 딸의 연기를 그렇게도 반대했던 정애란 선생을 직접 찾아가 설득시킨 유덕형 연출가(현 서울예술대학교 총장)와 연기자의 자세를 알려준 배우 장두이 선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을 몰래 했거든. 공연 후 뒤풀이 그런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제 모습을 본 유 선생이 '연기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며 집에 오셔서 어머니에게 '연기자라는 건 피를 타고 내려오는 건데 이 친구, 배우를 시켜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숨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 장두이 선배는 제게 늘 책을 읽으라며 추천해주시곤 했다. 두 분이 절 이 폭풍노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 거지(웃음)."

 배우 예수정

ⓒ 이정민


 배우 예수정

ⓒ 이정민



삶을 운전하는 건 나 자신

이런 경력의 배우도 연기할 때 매번 고민한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정은 스스로를 '40년 무명배우'라고 소개하곤 한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다. 무명과 유명을 구분하며 말한 게 아니다. '무명배우'라는 단어에 얽힌 그의 연기관 때문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오해도 많이 하셨는데 스스로 자랑삼아 하는 말이다. 아무 것도 주어진 게 없는데 연기를 40년이나 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것처럼 살면서 든든한 게 없거든. 사람은 늘 업 앤 다운(좋을 때와 나쁠 때)이 있다. 좋아하는 게 있는 사람은 다운됐을 때도 알고 있다. 언젠가 다시 올라간다는 걸. 그런데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은 한 번 다운되면 큰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들떠 있으려고 한다.

배우라는 직업은 무명, 유명과 상관없는 직업이다. 어떤 기자 분이 이렇게 물었었거든. '유명 배우들과 오랜 세월 연기했는데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느냐'고. 제가 '네?' 하고 되물었다. 유명 때문에 연기라는 걸 했다면 난 벌써 그만뒀겠지. 난 자랑스러워하며 40년을 연기했다."

자녀를 잘 키워내고, 환갑을 넘긴 그는 지금을 "정말 나라는 존재로 깨어 있으려는 때"로 표현했다. "정말 나다운 삶을 살았나?" 항상 자문하면서 "내 삶을 스스로 운전하려 한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지금 나이에) 그런 삶을 사는 분이 드문 것 같다. 매일 며느리를 구박한다거나, 젊은이들 뒤꽁무니를 잡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나이가 든 사람들도 젊은 분들처럼 하우스셰어 이런 걸 할 수도 있잖나. 누구는 글을 쓰고, 누구는 그림 그리고. 남은 삶을 끌려가듯 살지 말고, 남은 삶에 감사해하며, 운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엄청 위험한 사회가 된 것 같다. 65세를 넘은 분들이 스스로를 분리수거 해서 포기하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

이 말에 치열함이 느껴졌다. 반평생을 그는 배우로 오롯이 남으려 했다. 그것도 처절하게. 그 밑바탕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연기에 대한 철학,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담겨 있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격언을 빌려 물었다.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라는 말은 예수정 역시 평소 강하게 설파하는 말이기도 했다. 여전히 그 말이 유효한가를 묻는 말에 "여전히가 아닌 영원히!"라고 그가 답했다.

 배우 예수정

ⓒ 이정민


"물론 극장은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 계몽을 위해 있다고 본다. 지금 시대에선 계몽이라는 걸 싫어하는데 전 제 자신에게도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린 보기 싫은 것에 대해 고개를 돌리곤 하잖나. 지난해에 젊은이들에 의해 한국이 좋게 바뀌었다. 사람들에게도 제게도 모두 악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 그랬거든. '악을 대항해 이길 힘은 없을지언정 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라고.

극장을 통해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계몽의 한 구석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게 계몽만이 아닌 셈이다. 제가 정치와 사회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 도처에서 부딪히는 보기 싫은 악의 모습과 우리가 과연 싸울 수 있을까? 정말 용감한 분들은 맞서 싸우고 희생하신다.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분들게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 다만 우린, 우리 안의 악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아름다움을 보며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예술이 참 중요하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작품에서 누군가의 엄마였던, 그의 차기작 중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일본 재판정에서 일본 공권력과 맞서 싸운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다. 이와 함께 <염력>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온몸으로 삶의 여러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이 배우는 분명 아름답다.

김용화 감독이 전한 배우 예수정의 캐스팅 속사정
"얼굴이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졌지만 연기적으로는 강렬한 배우" 찾기. 영화를 연출하는 모든 감독의 꿈 중 하나 아닐까.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전면에 섰던 <신과 함께>도 마찬가지였다. 극중 자홍(차태현)과 수홍(김동욱), 두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한 청각장애인 엄마는 분명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8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김용화 감독이 배우 예수정의 캐스팅 비하인드를 전했다.

"얼굴이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연기적으로 강렬한 분이면 어떨까 싶었다. 몇 분을 물망에 놓고 있었는데 예수정 선생님의 여러 부분을 살폈다.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하시는 분이면 좋겠다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좋게 보신 것 같더라. 후보군 중 가장 처음 시나리오를 보낸 분이었다.

사무실에서 뵙고 제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가 둘 다 서로 울었다(웃음).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의 허물 앞에 벙어리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는데 너무 좋았다. 진짜 아티스트고 배우시라는 걸 느꼈다. 현장에서 예수정 배우님이 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나올까 매우 궁금했다. 여담이지만 현장에서 한 번도 육성을 내신 적이 없다. (마치 장애인인 것처럼) 속삭이면서 의견을 전하곤 했다. 일종의 핸디캡 연기인데 참 신선했다."


예수정 신과 함께 차태현 김동욱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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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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