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히어라 히카루' 지난 2017년 11월 24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뮤지컬 <팬레터> 프레스콜 현장. 배우 김히어라가 '히카루' 역을 맡아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연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 히카루, 김히어라의 첫 '관념캐' "<베헤모스> 때는 뒤에서 시체로 굉장히 오래 누워 있잖아요. 그때 일어나서 하는 것들이 사실 완벽하게 분리된 멀티는 아니었어요. 예를 들면 TV에 나오는 기자도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순 없죠. 살해당안 ‘민아’가 섞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정의의 여신도 그렇고요. 민아로서 연기 노선을 걷다가 다른 누군가나 태석의 상상으로 그려지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아예 관념적인 인물 자체가 되어서 연기한 건 처음이죠." ⓒ 엄소연


제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의 주인공 김히어라. 뮤지컬 <찌질의 역사>에서 '동명이인' 설하를 맡아 1인 3역을 소화하며 기대치 않았던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앙상블로 꾸준히 무대에 올랐던 이 배우가 처음 눈에 들어왔던 건 뮤지컬 <살리에르>에서 '카트리나'를 소화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리틀잭>의 '줄리'로 확실히 대학로 관객들의 마음에 들어왔고, <천사여, 고향을 보라>나 <베헤모스> 같은 연극에서도 발군의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줬다. 특히 <베헤모스>에서 멀티를 소화하며 보인 연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김히어라 배우의 대표 필모그래피는 역시 뮤지컬 <팬레터>이다.

"제가 받을 줄 몰랐거든요. '재롱이나 떨고 오자. 신인이니까 노래나 한 곡 하고'라는 마음이었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요. 수면 위에 올랐다고 하나? 그런 느낌이 맞나요? (웃음) 그 전에도 저를 좋아해 주시는 분이 있긴 있었지만, 제가 나이도 좀 어린 편이었고, 머리도 길고 그래서 저를 되게 '여리여리'한 배우로 보신 분이 많았어요. '얘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인식이 많았는데, '히카루' 하면서 사람들이 '저런 역할도 가능하구나', '쟤가 할 수 있는 범위가 넓구나'하고 인정해주신 것 같아요.

저의 매력을 알리게 해주는 작품이니까. 많은 분이 '인생캐'(인생 캐릭터)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감사하게 된 거지만, 되게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이 '너는 잘 될 줄 알았는데'하며 속상해하셨던 분들이 있어요. <팬레터> 보신 분들이 '너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서, 속이 시원하다'고. (웃음) 대표님과 작가님이 생각한 히카루와 제가 많이 닿아있다고 하셨거든요.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를 다 표현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잖아요. '김히어라 배우가 이렇구나'하고 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찌질의 역사>도 <팬레터> 덕분에 캐스팅된 거였거든요."

지난 2016년 10월 개막한 뮤지컬 <팬레터>는, 초연 창작극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11월 10일 개막하여 오는 2월 4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서 동숭홀에서 재연 일정을 이어가고 있는 <팬레터>의 이번 시즌 역시 성공적이다.

관객의 마음을 매료시킨 이 두 번의 시즌에서 김히어라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 공연계에서 이제는 자주 볼 수 있는 '관념 캐릭터'(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의 감정이나 관념을 대변하는 캐릭터)이지만, 여성이 연기하는 관념 캐릭터라는 점에서 우선 신선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 캐릭터 특유의 매력도 풍성했다.

글을 쓸 수 있게끔 영감을 주는 뮤즈,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한 줄기 빛 그리고 욕망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악몽. 지난 12월 4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히어라를 만나 히카루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

소설가의 시선 속 뮤즈

1930년대 경성, 문인 김해진을 동경하는 문학소년 정세훈은 김해진을 향해 '팬레터'를 보낸다. 본명으로 보내기 부끄러웠던 그는 '히카루'라는 중성적인 일본어 필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슬픔을 안고 계시나요'라는 히카루의 따뜻한 문체. 해진은 편지의 주인이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편지를 나누던 어느 날, 세훈은 해진이 소속된 순수문학 동인 '칠인회'의 곁에서 일을 도우며 글을 배우게 된다. 해진 선생님을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되어 기뻐하는 세훈이지만, 해진 선생님으로부터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듣는다.

해진은 히카루와 결혼할지도 모른단다. 해진의 머릿속 히카루는 '여자'가 확실하다. 자신의 많은 걸 이해하고, 위로하고, 영감을 주는 히카루는 여자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토록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면,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문인에게 보내는 조선 최초의 '팬레터'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 및 포스터. 재연 공연에 나선 뮤지컬 <팬레터>는 지난 2017년 11월 10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개막하여 오는 2월 4일까지 상연될 예정이다. 경성시대 순수문학 문인 모임 '칠인회'에서 일을 돕고 있는 세훈은, 평소 동경하던 해진 선생님에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팬레터를 보낸다. 팬레터에 마음이 동한 해진은 히카루를 사랑하게 되고, 해진을 실망시킬 수 없었던 세훈은 점점 편지 속 '히카루'를 연기하게 된다.

▲ 실체화 된 욕망 "세훈은 원래 해진 선생님을 직접 만지지도 못해요. 히카루가 먼저 손잡아보라고 하고, 모든 걸 먼저 움직이거든요. 세훈이가 하지 못하니까 ‘아, 내가 여자였으면, 내가 소녀였으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손도 잡고 대화도 나누고 안아보기도 하고…' 같은 소망을 히카루에게 넣었다고 생각했어요.“ ⓒ 스토리피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 편지를 하면서 '여자 같아', '여잔가 봐', '여자네!' 하는 거죠. 그렇게 한 번 믿고 나면 뭘 해도 '역시 여자야'가 되는 게 아닐까요. 저는 해진 선생님도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고,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쓰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고. 해진 선생님 본인이 뮤즈가 필요했던 거죠. 칠인회 배우들과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의 뮤즈는 여성이 훨씬 많았잖아요. 이윤 선생님도 뭔가 히카루가 이상한 사람인 걸 알지만, 결국은 해진의 문학을 보고 싶었으니 계속 뒀던 거죠. 수남이나 다른 사람들도 의심은 가지만, 히카루에 대해 심문하면서도 자기네 예술적인 욕심을 채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좋건 싫건,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해진 선생님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선생님께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라는 사람이 등장했잖아요. 제가 만약에 노래가사를 썼어요. '아, 커피가 맛있다. 너무 맛있네'라는 정도로만 썼는데, 누가 '너, 요즘 힘들구나? 그렇게 자꾸 맛있다고 안 해도 돼'라고 하면 이렇게 막 '또르르' 될 거 아니에요! 그 순간부터 해진이 뮤즈를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 또한 해진 선생님의 욕심이 아니었나….

세훈이가 숨기려고 숨긴 건 아니고 해진 선생님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거니까. 일부러 처음부터 여자로 보이려고 했던 게 절대 아니잖아요. 해진 선생님은 히카루를 만나보지도 않았어요. 해진 선생님은 자기 자체, 자신의 변화된 모습과 생동감 있게 살고 싶게 만드는 '한줄기 빛'을 얻었잖아요. 자기가 그냥 그렇게 인지하고 '여자일 것이다', '여자여야만 하고, 내 뮤즈여야만 하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서로의 욕심들이 막 엉켜서.

2막의 옷도 저는 해진의 시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해진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으로 립스틱을 바르고 옷을 입은 게 아니라, 해진이 원하는 뮤즈의 상, 연인상, 여성상 특히나 그 당시 경성의 신여성으로서 등장한 거죠. '세훈의 뮤즈인데, 너무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거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지만, 저는 그 당시 문인들이 생각하는 뮤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히카루가 존재하는 이유는 세훈의 욕망만이 아니라, 해진 선생님의 욕망도 있는 거죠. 연인이 됐는데, 사랑을 안 나눴겠어요? <생의 반려> 내용만 봐도 그렇고, 저는 정신적으로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었겠죠."

정세훈과 히카루, 그 불가분의 관계

다시 돌아온 '히어라 히카루' 지난 2017년 11월 24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뮤지컬 <팬레터> 프레스콜 현장. 배우 김히어라가 '히카루' 역을 맡아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연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 세훈의 히카루, 히카루의 세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되게 많이 표현했구나’ 싶어요. 저랑 세훈이랑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건 그냥 세훈이가 하면 되는 거거든요. 세훈이의 역할이 있고, 제 역할이 있는데 ‘내가 너무 세훈이가 표현할 감정까지 드러내 연기하려고 하지 않았나?’하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 엄소연


세훈은 편지를 쓸 때마다 히카루가 되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이제라도 진실을 밝힐까 하지만, 뒤늦게 실망하게 될 해진 선생님을 뵐 낯이 없다. 폐병으로 고생하는 그의 건강이 악화라도 된다면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세훈은 오히려 히카루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하기로 한다.

히카루는 생명력을 얻어 점점 더 구체화되고, 강인해진다. 히카루가 되었을 때 세훈은 놀라운 작문 능력을 보이며, 해진과 <생의 반려> 공동 집필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집필이 해진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음을 알게 된 세훈은 히카루를 멈추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히카루는 세훈의 통제를 벗어나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창작의 땔감으로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는 해진을 멈추기 위해, 히카루를 멈추기 위해, 세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히카루를 없애기로.

"초연 때는 그게 되게 컸어요. 배신감과 분노…. 비속어로 말하자면 '저 XX, 진짜 어우~ 답답해' 이런 게 컸거든요. 근데 제가 더 다가가고, 세훈이가 곧 히카루라고 생각하며 연기하다 보니까 요즘은 진짜로 불쌍하더라고요. '어휴' 이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어?' 하면서요. 예전에는 죽으면서도 진짜 비웃고 갔는데, 지금은 죽는 순간 다시 세훈이로 변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훈이를 보면서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그게?'라고 생각해요. 그 펜을 원래는 제가 들고 걸어갔는데, 지금은 펜을 끌어안고 가요. '너 진짜 글 안 쓸 거야? 그거 네가 진짜 바라던 건데…. 나는 너의 그 욕망으로 나온 아이잖아. 왜지? 그거 아닐 텐데?' 이런 마음도 약간 있어요.

예전에는 분노였다면, 지금은 애환이라고 할까요? 슬픔과도 같은 감정이죠. 그러면서도, '언젠간 네가 나를 다시 부를 수 있으니까'라면서, 완전 죽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짧게는 '그래, 뭐. <생의 반려>는 실패야. 이 문학 정도는 포기하지'라는 정도? 물론 언제 나올지 모르는 때로 돌아가는 건데, 착잡한 게 크죠. 그리고 가장 큰 부분은 이 친구가 안쓰러운 거지. '너 혼자 어떻게 살래?'하고요. 세훈이는 의지할 데가 없어지는 거니까, 마치 종교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세훈은 히카루를 죽였다. 자신의 오른손을 찌르는 순간, 히카루는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히카루는 사라진다. 세훈은 해진에게 사실대로 고한다. 하지만 해진은 인정하지 못한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히카루인 척 하지 왜 그랬냐고, 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했냐고 따져 묻는다. 세훈은 도망치고, 해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세훈은, 히카루의 사멸 이후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한다.

"히카루는 그냥 '세훈'이죠. 세훈인데, 세훈이가 표현하지 못하는... 세훈이 안에 있는 세훈의 욕망이죠. 그리고 '한 줄기 빛'이라고 하잖아요. 해진 선생님이나 다른 칠인회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는 뮤즈이기도 하지만, 이건 세훈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한 줄기 빛이라고도 생각해요. 세훈이는 희망이 없었고, 살 의욕도 없죠. 그럴 때 한 줄기 빛처럼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건, 즉, 꿈이 생기는 거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서 얘가 살아갈 이유를 느끼고, 아버지한테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힘을 불어 넣어주어서 세훈이가 빛을 보고, 해진을 꿈꾸고. 해진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게 다 히카루 '덕분'이죠.

그래서 세훈이가 '저 사람을 갖고 싶다'고 해서 히카루를 만든 게 아니라, 히카루라는 사람이 세훈이 안에서 생기면서부터 저 사람을 갖고 싶고, 나도 살고 싶고, 그것도 잘 살고 싶죠. 나도 원하는 걸 쟁취하고 싶고, 나중엔 건강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자기 세상에서 건강하게 나올 수 있게 해준 게 히카루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냥 친구처럼 그의 감정을 많이 느끼려고 하고, 걔보다 한 템포 나서서 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욕망이 점점 커지면서 세훈이랑 대립하고, 세훈 안에서 나와서 얘랑 맞닿아 싸우는 거잖아요."

나의 빛, 나의 악몽, 다시 내 곁으로

이후로 그냥저냥 살아가던 세훈이었지만, 김해진이 히카루와 집필했던 <생의 반려>가 출간된다는 소식에 놀라서 수감되어 있던 칠인회 멤버 '이윤'을 찾아간다. 이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회고하며 털어놓은 뒤, 그는 해진이 남긴 편지를 이어받는다. 악몽인 줄 알고 버렸던 한 줄기 빛이 다시 그 안에 있었다. 세훈은 다시 글을 쓸 용기를 얻는다. 시간이 흘렀다.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 세훈은 이제 칠인회의 새 동지가 되어 자신의 문장을 발표한다.

그 무대 뒤로 해진 선생님과 함께 히카루가 걸어 나온다. 애틋한 눈으로 해진을 바라보던 히카루는 해진의 손을 놓고 세훈에게 온다. 그리고 노래하는 세훈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는다. 약간은 슬픈 듯이, 약간은 기쁜 듯이. 뮤즈가, 세훈의 일부가, 세훈의 욕망이, 세훈의 사랑이 다시 찾아왔다. 둘은 하나가 된다. 세훈은 비로소 진짜 세훈이 된다.

"'관객과의 대화' 할 때, (손)승원이가 <팬레터>를 '사춘기'라고 표현했어요. 저도 '사춘기'라고 답하려고 했거든요. 재연 연습하던 어느 날, '해진의 편지' 하는 걸 보며 해진 선생님이랑 뒤에 대기를 하는데…. 아. 가기 싫은 거예요, 갑자기! 그래서 '어? 이 느낌 뭐지?' 원래 약간 누나처럼 세훈을 향해서 '다시 나에게 와!' 이런 느낌이었는데, 헤어지기 전에 선생님 손을 딱 잡는데 막 두려웠어요.

다시 돌아온 '히어라 히카루' 지난 2017년 11월 24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뮤지컬 <팬레터> 프레스콜 현장. 배우 김히어라가 '히카루' 역을 맡아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연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 김해진을 향한 갈등 "해진 선생님을 갖느냐, 아니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처럼 영원한 문학을 남기느냐. 어차피 해진 선생님은 히카루가 어떻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1년 안에 죽을 사람이에요. 이거를 조금 더 살게 하느냐, 아니면 눈 딱 감고 영원한 문학을 남기느냐. 해진 선생님에게도 나에게도 사실 득이 되는 거잖아요. 해진 선생님한테도 좋은 문학을 남기는 게 가장 큰 목표였고요. 그게 히카루와 세훈의 갈등이 되지 않았을까요." ⓒ 엄소연


제가 세훈의 입장에서 런을 보다가 가니까, 사춘기 때의 아픔을 나이가 들어서도 갖고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난 아직 안 지났는데 어떻게 그래'라고 하는데, 약간 이런 가사와 제 마음이 똑같은 거죠. 나는 아직 선생님을 못 보내겠는데…. 세훈인 거죠. 욕망이 커졌을 때가 아닌 사춘기 때의 세훈. 선생님을 처음 꿈꾸고 선생님을 좀 더 사랑했던 모습. 그 모습으로 저는 선생님한테 있는 거예요.

근데 얘가 선생님을 못 보내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과 항상 있었는데, 이제 해진 선생님이 저를 보내주는 거죠. '너 이제 나 그만 잊어. 다시 네 세상에서 너를 위해 살고, 좋은 글을 쓰고…. 세훈아. 너, 잘 살아라'라고요. 히카루가 아니라 저는 세훈의 마음이었어요. '선생님…' 하면서 뵈면 선생님이 '가'라고 하고, 그러면 고개를 돌려서 세훈을 보고, 그러면 두렵고…. 그냥 가서 세훈이를 안을 수가 없는 거죠. '어, 어떡하지. 나 선생님이랑 떨어질 수 있을까?' 하면서 선생님이랑 점점 멀어지다가 '보낸다'라고 노래를 부를 때, 저희 둘이 다시 하나가 돼요.

다시 돌아온 '히어라 히카루' 지난 2017년 11월 24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뮤지컬 <팬레터> 프레스콜 현장. 배우 김히어라가 '히카루' 역을 맡아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연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 세훈과 히카루, 다시 한 명의 정세훈으로 "기억을 못할 정도로 정말 다른 사람이 됐던 거잖아요. 분리가 된 후부터는 이건 히카루가 한 일이고, 세훈은 모르는 일로 분리하는 것 같아요. 다른 인격이 나와서 한 행동에 대해 또 다른 인격은 기억을 잃는 것 처럼요. 히카루가 칠인회를 밀고하는 투서를 쓴 뒤로, 세훈이 범인으로 추궁 받을 때 세훈 스스로 '어, 혹시? 내가?' 하다가 글씨가 다르니까 ‘거봐, 나 진짜 아니잖아! 아니라니까?’라는 거죠." ⓒ 엄소연


'재연 때 뭐가 제일 좋았어?' 하면 저는 딱 이 장면 꼽거든요. 연출님이 재연 첫 연습 때 '초연한 사람들, 뭐가 부족했는지 반성문을 하나씩 써 오세요' 이랬거든요. 저는 반성문에 '마지막 장면을 사실 아리송하게 했다. 정확하지 않았다. 정확한 걸 꼭 찾겠다'라고 썼거든요. 그걸 찾아내서 마음이 좋고, 대사 하나 없지만 그 신을 가장 정성들여서 해요. '한줄기 빛'이 다시 세훈에게 온 거죠.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생명, 저는 그게 히카루라고 생각하니까요. 다시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생긴 거죠.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성장해서, 사춘기를 겪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그게 히카루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날까지

청순한 첫사랑의 추억, 궁중악장의 촉망받는 제자,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길지 않은 기간임에도 김히어라는 자신의 커리어에 참 다양한 인물들을 꽉꽉 담아 채웠다. 세훈은 히카루 덕분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상처 입고, 또 이를 극복하며 문인이 됐다. 히어라도 히카루 덕분에 지금의 '배우 김히어라'가 될 수 있었다.

실체가 있는 인물이 아니기에 그 연기가 힘들고, 어려운 적도 있지만, 그렇기에 하면 할수록 연기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삼연이 돌아올 것이 거의 확실한 <팬레터>. 그 세 번째 무대에도 김히어라의 히카루가 있을 것이다. 아직 히카루를 떠나보내기에, 히어라는 아직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시 돌아온 '히어라 히카루' 지난 2017년 11월 24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뮤지컬 <팬레터> 프레스콜 현장. 배우 김히어라가 '히카루' 역을 맡아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연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 김태형 연출에게 들은 말 "연출님도 예전에도 제가 하는 히카루를 보고 많이 좋아하셨어요. ‘내가 생각하는 히카루와 많이 닿아있어’라고요. 원래 런 돌고 칭찬 잘 안하시는데 ‘뭐, 잘하네!’ ‘뭐, 나쁘지 않네’ ‘많이 늘었네. 볼만하다’ 이래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원래 칭찬 잘 안 하세요. ‘어, 그거 너무 좋아. 그렇게 가자’ 뭐 이런 정도지. ‘오늘 너, 너무 좋았어’ 이런 건 잘 안하세요. 그래서 사람들도 ‘이게 맞나?’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웃음)" ⓒ 엄소연


"조금 허할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해진이나 세훈처럼 내 생각과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사람이 아닌 상태로 연기를 하잖아요. 주고받는 것보다는, 내가 주기만 하고, 받지 않고, 차단하고…. 가끔은 '아, 나도 사람 연기 하고 싶다' 이럴 때가 있어요. 나도 좀 화가 나면 화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런데 계속 억누르면서 평온하게 가기를 연출이 원하셨거든요. 표정도 그렇고, 아무도 제가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요. 더 동요할수록 힘이 약해지니까요.

저도 그래서 연구한 게, 막 사람처럼 걷지 않고, 자세도 가만히 있고, 대신 눈빛 하나로 이 사람(세훈)을 움직이게 하는 게 더 힘이 있겠다 싶었어요. 조명 등으로 힘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지금은 되게 자글자글하게 재밌는 게 많아요. 그래도 초반에는 막 하고 싶잖아요. 나도 막 표현하고 싶고, 티내고 싶고, 다들 '배우병'이 있으니까요.

연습 때부터 참으려고 했는데, 그때는 제가 한다고 했는데도 부족했던 것 같아요. 표정을 가만히 지어도 사람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거를, 내가 너무 '나 지금 이런 사람이야!'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되게 많이 표현했구나 싶어요. 초연 때 비해 지금은 여유가 더 생긴 것 같아요.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연기가 너무 재밌어요. (웃음)

그래서 기회가 되면 히카루는 계속 하고 싶어요. 제가 '김탱'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에요. 제가 맨날 김태형 연출께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대표님도 '우리 소속 배우님은 뭐하시나~' 이러시고. (웃음) 그래서 신인상 받았을 때 전화했어요. 소정의 선물도 주시고, 저보고 대견하시대요."

문인에게 보내는 조선 최초의 '팬레터'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 및 포스터. 재연 공연에 나선 뮤지컬 <팬레터>는 지난 2017년 11월 10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개막하여 오는 2월 4일까지 상연될 예정이다. 경성시대 순수문학 문인 모임 '칠인회'에서 일을 돕고 있는 세훈은, 평소 동경하던 해진 선생님에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팬레터를 보낸다. 팬레터에 마음이 동한 해진은 히카루를 사랑하게 되고, 해진을 실망시킬 수 없었던 세훈은 점점 편지 속 '히카루'를 연기하게 된다.

▲ 김히어라에게 <팬레터>가 소중한 이유 시대상을 극으로 옮기다 보면 대상화되거나 수동적인 여성이 종종 등장한다. 최근에는 많이 깨지고 있지만, '뮤즈'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속성상 여러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히카루는 전통적인 뮤즈로 출발해서, 기존의 뮤즈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여성상을 그린다. 여자 배우로서 '현재진행형' 고민을 많이 하는 김히어라. 당시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연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지금의 여성 관객이 문제의식을 키워 과거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이다. ⓒ 스토리피



김히어라 히카루 히어라 팬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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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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