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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 있는 홍살문이 서있는 용주사.
 왕릉에 있는 홍살문이 서있는 용주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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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아담한 화산(華山) 자락에 용주사라는 절이 있다. 용주사는 국보가 여러 개 있는 오래된 절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효심이 깊이 묻어나는 특별한 사찰이기도 하다. 용주사 누리집에 방문하면 절 소개에 '효행 근본도량 용주사'라고 나와 있을 정도다. 그래서 흔히 효행 사찰이라고 부른단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 현릉원(현재 융릉)에 옮긴 뒤 아버지 넋을 기리며 무덤을 돌볼 사찰로 용주사를 지었다. 용주사는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 오대산 상원사와 함께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찰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용주사를 지을 당시 주변을 둘러보니 무덤 가까운 곳에 신라 문성왕 때 지었다는 갈양사(葛陽寺)가 병자호란 때 불타 터만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곳에 용주사를 짓는다. 당시 이 사찰을 짓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스님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이제야 한을 풀고 승천한 것이라고 믿고 '용주사'란 이름을 직접 지어 내린다.

정조의 효심으로 다시 태어난 용주사에는 눈길을 끄는 문화재와 보물들도 있다. 용주사 범종은 보물 제120호로 지정되었고, 김홍도가 그린 탱화와 '부모은중경'은 경기도 유형문화재(제17호)로 지정되었다.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나무다. 여기에 올해 8월 또 하나의 보물이 생겼다. 절집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대웅보전으로 보물 1942호로 지정됐다.  

일반 사찰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용주사 

연풍교(連豊橋)란 이름의 이채로운 선돌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연풍교(連豊橋)란 이름의 이채로운 선돌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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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있는 이색적인 박물관.
 절에 있는 이색적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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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는 문화재구역 입장료가 적용되어 어른 15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700원을 받고 있다. 대한 불교조계종 신도증 소지자와 7세 미만 어린이, 65세 이상의 노인은 무료입장할 수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면 더욱 좋겠다. 해설 시간은 10시, 1시, 3시이며 월요일은 휴무다.

절 어귀에 이르면 흔히 보이는 일주문대신 연풍교(連豊橋)란 이름의 보기 드문 돌길이 방문객을 맞는다. 양쪽에 늘어선 자연석에는 '到此門來 莫存知解'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뜻이란다. 매표소에서 천왕문까지 큼직한 선돌들이 양 옆에서 호위하며 방문객을 맞는데 이채로운 기분이 들었다.

왕릉이나 향교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홍살문도 절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홍살문은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다. 제사 물자를 준비하기 위한 조포사(造泡寺) 역할도 했다. 능침사찰은 왕과 왕비의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말하고, 조포사는 능(陵)이나 원(園)에 딸려서 제사 물자를 조달하는 절을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 전까지 일 년에 6회 사도세자 내외, 정조임금 내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왕의 위패를 모신 절이기 때문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정조는 아버지 무덤에 참배할 때마다 용주사에 들러 아버지의 넋을 기렸다. 그래서 용주사는 보통 절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와 유물을 지니게 됐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양식인 삼문각.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양식인 삼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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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돌이를 하며 기원하는 사람들.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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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보호하고 악귀가 드나드는 것을 막는 사천왕문이 나타났다.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서로 다른 이채로운 모습으로 서있다. 처음 볼 때는 좀 놀라고 무서운데 가만히 쳐다보면 이상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사천왕문을 통해 들어서면 왼편에 보기드문 박물관이 서있다. 효행 박물관은 정조대왕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해 보물 제1095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 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제, 화가 김홍도의 사곡 병풍 등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이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양식인 삼문을 만난다. 좌우 7칸의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동서 옆문과 중앙 대문에 각각 문이 있다. 이를 삼문각이라고 부른다. 양 옆으론 마치 사대부집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길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돌을 깔아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이는 절의 모습이 아닌 궁궐 또는 관아의 모습으로, 절기마다 찾아오는 정조의 행차 때문에 이러한 구조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어지는 용주사 '천보루(天保樓)'도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아래층 6개 돌기둥 위에 올려진 2층 누각은 삼면으로 누마루를 댔다. 격식이 높은 건물이란 의미다.

사도세자 명복 빌던 '용주사 대웅보전' 보물이 되다

올해 보물로 지정된 용주사 대웅보전.
 올해 보물로 지정된 용주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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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장주(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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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의 효심이 담겨있는 '부모은중경' 탑.
 정조임금의 효심이 담겨있는 '부모은중경'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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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도한 때문인지 정조의 효심은 남달랐다. 할아버지 영조는 정조를 사도의 아들이 아닌 걸로 하라고 유언까지 남겼지만,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스스로를 사도의 아들이라 공표했다.

정조는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이란 설법을 듣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더욱 그리워했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소중한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얘기한 경전이다. 장조(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앞에 부모님의 자식사랑을 탑에 새긴 '부모은총경'을 지었다.

용주사에는 나무·돌·금속으로 만든 세 종류의 '부모은중경'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예술적 안목이 뛰어난 정조는 '신필'이라 불렸던 화원 김홍도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김홍도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이를 목판에 새겼으니 오늘날까지 용주사의 상징으로 전해온다.

올해 8월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주불전으로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지만 외부 단청을 제외하고는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의 높은 불단에 사바정토의 석가여래,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불상 뒤에는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을 그린 그림(후불탱화, 後佛幀畵)이 그려져 있다. 김홍도의 감독 하에 조성된 후불탱화로 우리나라 최초로 후불탱화에 서양화의 음영기법을 도입하여 그렸다.

"조선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고 단원 김홍도에게 불전(佛殿)의 탱화를 그리게 하니, 더 이상 보충할 데가 없이 정교하여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든 듯 묘(妙)하다." - <조선불교통사>

용주사에 있는 국보 고려 범종.
 용주사에 있는 국보 고려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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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무들이 살고 있는 널찍한 절 마당.
 오래된 나무들이 살고 있는 널찍한 절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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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용주사에는 국보(제120호)로 지정된 고려 범종이 유명하다. 몸통에 삼존상이 새겨져 있으며 종 꼭대기에 용 모양의 음통이 만들어져 있다. 문화 해설사에게 들은 우리나라 종 이야기가 참 유익했다. 한국 종은 중국이나 일본 것과 비교해 소리가 매우 은은하고 맑단다. 종 머리 부분에 있는 음통(혹은 음관)은 전 세계에게 유일하게 한국 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것을 만파식적(萬波息笛, 이 피리를 불면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되고, 쳐들어오던 적군이 물러갔다고 함) 설화와 관련하여 신령스런 피리의 형태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런 특징으로 한국 종은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독창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 일명 에밀레종 설화가 떠올라 문화 해설사에게 물어봤다. 그런 종류의 설화를 인신공양설화라고 하는데 동아시아 문화권에 흔히 나오는 전래이야기라고 한다. 놀랍게도 에밀레종 설화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나왔다고 한다.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창작문예란에 염근수라는 작가가 '어밀레 종'이란 동화를 발표했다. 얼마 후 이 동화를 뼈대로 하여 현대적인 희곡이 만들어졌고 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에밀레종 설화는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정조임금이 절을 지을 때 기념수로 심었다는 오래된 나무 회양목(Korean box tree, 淮陽木)등 여러 노거수 나무가 있어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사찰여행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예전엔 천연기념물 나무였는데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야위고 앙상해지자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고 한다. 예전에는 황양목(黃楊木)이라고도 불렀던 회양목은 석회암지대가 발달된 북한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자랐기 때문에 회양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 대중교통편 : 수도권전철 1호선 병점역 2번 출구 앞 - 버스 34번, 34-1번, 35-1번, 46번 용주사 하차
* 지난 12월 23일에 다녀왔습니다.
* 화성시 블로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용주사, #정조대왕, #부모은중경, #후불탱화,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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