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11월 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 기지에 도착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 방한 인사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11월 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 기지에 도착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엔 팔레스타인 문제로 말썽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각각 소유권을 주장하는 예루살렘에다가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옮기겠다는 입장을 밝힌 결과다. 로켓 공격과 전투기 공습 같은 작금의 사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무리하게 이행하려 하고 있다.

현재, 미국대사관은 예루살렘 서북쪽 지중해 해안가인 텔아비브에 있다. 다른 나라 대사관들도 마찬가지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어떤 나라도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두지 않았다. 국제연합(UN)도 총회 결의 제181호(1947년) 및 제303호(1949년)를 통해 특정 국가의 예루살렘 지배를 반대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사실상은 이스라엘 관할이지만, 국제 관행상으론 특정국 관할이 아니다. 트럼프가 이 관행을 무시한 것이다. 

트럼프 집안은 유대인 혈통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미국 가정에 비해 이 집안은 유대인을 상당히 많이 의식해 왔다. 독일에서 포도농장을 하던 트럼프의 할아버지 프레더릭은 김옥균의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때만 해도 드룸프(Drumpf)란 성을 썼던 프레더릭이 트럼프(Trump)로 성을 바꾼 것은 바로 유대인들 때문이다.

새로운 땅에서 식당을 개업한 프레더릭은 주변 지역에 유대인이 많다는 점을 의식했다. 유대인이 싫어하는 독일인이란 게 알려지면 장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으로 가장하고자 트럼프로 성을 바꿨다. 주거지를 바꾸는 대신, 성을 바꾸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 눈치를 보면서도 그 틈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태도는 아들 프레드에 이어 손자 도널드한테로도 이어졌다. 강준만 교수의 트럼프 평전 <도널드 트럼프 - 정치의 죽음> 제1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트럼프는 자서전에서 할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이라고 썼지만, 이는 아버지가 임대아파트 사업의 주요 고객층인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스웨덴 출신으로 행세했던 것에 따른 것이다. 할아버지가 미국에 건너와 적응하기 위해 성을 Drumpf에서 Trump로 바꾼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는 나중에 독일 출신이라고 실토하고, 독일계 미국인의 행사에 적극 참여한다."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도 유대인이고 딸 이방카도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점, 유대교 재력가들이 정치자금을 무기로 공화당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 러시아 스캔들을 돌파하고 대통령직을 지키자면 공화당 내 친(親)유대파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을 포섭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 등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점들과 더불어, 대대로 유대인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집안 내력도 트럼프의 조치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3중 계약에서 시작된 '예루살렘 사태'

팔레스타인 문제의 상당부분이 미국 책임이고, 트럼프로 인해 그 책임이 한층 무거워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원래는 영국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유럽 국제질서를 정립한 1815년 비인 회의 이후로, 영국은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 최강이 됐다. 1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전쟁에서 유럽이 청나라를 제압하면서, 유럽 최강 영·러는 세계 최강으로 격상됐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1905년 이후로는 영국이 단독으로 세계 최강이 됐다. 이 상태에서 발생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를 상대했다. 여기서 오스만투르크(오스만)와의 대결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파생시켰다.

터키공화국의 직전 왕조인 오스만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족(투르크·튀르크)의 후예다. 한때 강대국이었던 돌궐은 당나라에 밀려 8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서쪽 중동 지방에서 서서히 강대국으로 출현했다. 

돌궐족 국가인 셀주크투르크는 11세기에 중동의 강자로 등극했고, 또 다른 돌궐 국가인 오스만은 14세기부터 강국 대열에 들어섰다. 오스만은 중동뿐 아니라 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다. 명나라·청나라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행사할 때, 오스만은 서아시아를 거점으로 패권을 휘둘렀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중동 민족들이 그 지배 하에 들어갔다.

녹색으로 칠한 부분이 오스만투르크의 전성기 영토.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년) 때 영토다.
 녹색으로 칠한 부분이 오스만투르크의 전성기 영토.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년) 때 영토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19세기에 아시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한 유럽의 2대 표적은 청나라와 더불어 오스만이었다. 아시아 서부의 오스만과 동부의 청나라를 차지해야 아시아 정복이 완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목표는 좌절됐다. 청나라는 유럽 식민지로 전락한 게 아니라 1912년에 중화민국으로 대체됐고, 오스만 역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터키공화국으로 대체됐다. 이 중에서 오스만은 독일·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제1차 대전까지 가담해 영국·프랑스·러시아 등과 대결했다.    

이때 영국이 오스만을 꺾을 목적으로 구사한 방법이 지금도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다. 여러 민족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을 제압하고자 2중 계약도 아닌 3중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우선,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중동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후예이자 아랍의 지도자인 샤리프 후세인과 협정을 체결했다. 훗날 각각 요르단 및 이라크 왕이 될 압둘라와 파이샬이 후세인의 두 아들이다.

영국은 1915년 및 1916년에 고등판무관 맥마흔과 후세인의 서신 교환을 통해 '전쟁 후에 아랍 국가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맥마흔 선언). 이를 통해 영국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는 아랍인들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다.

맥마흔 선언이 완성되기 직전, 영국은 중동에 살지 않는 국가들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중동에 살지 않지만 중동을 갖고 싶어 하는 러시아·프랑스와 밀약을 맺은 것이다.

1916년에 영국인 중동 전문가 사이크스가 러시아의 동의 하에 프랑스 외교관 피코와 체결한 협정은 오스만 영토를 영국·러시아·프랑스가 분할한다는 것이다. 중동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영토를 주기로 해놓고, 중동에 살지 않는 러시아·프랑스와 더불어 오스만 영토를 나눠갖기로 한 것이다.

아랍인·러시아-프랑스·유대인에게 '약속어음' 남발

여기까지만 했으면 '이중계약'이다. 영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중계약까지 나갔다. 중동에 살고 싶어 하는 민족까지 끌어들였다. 바로, 유대인들과의 계약이었다.

이집트(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기 전에 모세가 동족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성경 출애굽기 3장 17절에 나오는 이 말의 요지는 '애굽의 고난 중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모세의 말을 흉내낸 사람이 제1차 대전 중의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였다. 밸푸어는 그 이전엔 총리였다. 그는 세계적인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벨푸어 선언). 팔레스타인 땅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다.

이처럼 영국은 오스만을 꺾을 욕심으로 중동에 살고 있는 아랍인, 중동에 살지 않는 러시아·프랑스, 중동에 살고 싶어 하는 유대인에게 상호 충돌하는 '약속어음'을 남발했다. 전쟁 중의 다급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세계 최강답지 않은 처신이었다.

아서 밸푸어 (1848~1930년)
 아서 밸푸어 (1848~1930년)
ⓒ 위키백과 영문판 (퍼블릭 도메인)

관련사진보기


유럽이 과학혁명·산업혁명·시민혁명에 이어 1840년 아편전쟁 승리까지 얻으며 세계 지배자로 떠오른 동력 중 하나는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이다. 이곳에서 공짜로 획득한 영토와 은이 비약적 경제성장의 토대가 됐다. 은은 13세기 이래 국제 화폐였다. 

그런데 유럽인들보다 아메리카를 훨씬 잘 활용한 민족은 사실은 유대인이다. 유럽에서 박해 받으며 살던 유대인들은 1694년부터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장희빈이 중전에서 후궁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귀한 그 해부터 유대인들이 아메리카 이민을 개시한 것이다.

유럽에 비해 기회가 많은 아메리카에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경제력을 축적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유대인 파워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미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지만, 그 미국을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으니 아메리카 탐험가 콜럼버스한테 진짜 감사해야 할 쪽은 유럽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다.

영국 정부가 벨푸어 선언을 한 것은, 그 시기에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움직이면 미국을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미국을 끌어들여 제1차 대전에서 승리할 목적으로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약속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나서면 미국이 영국 편에 서서 참전할 거라 계산했던 것이다.

이처럼 팔레스타인 문제는 오스만투르크를 꺾고 제1차 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영국의 의욕에서 비롯됐다. 일단 이기고 보자는 욕심에서 3중 계약을 체결한 게 오늘날의 세계 분쟁을 낳게 됐다. 그렇게 영국의 책임으로 발단한 문제가 지금은 미국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됐다. 트럼프의 가세로 인해 미국은 한층 더한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태그:#팔레스타인, #밸푸어, #예루살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