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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 지친 어느 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집어든 책 한 권이 저를 지옥에서 구해줬습니다. 작가의 한 문장에 고민이 풀리고 고뇌가 치유됐습니다. 아플 때 '약'이 돼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아이에게 더 많이,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 나는 퉁퉁 부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아이는 유기농 식재료로 정성 들여 이유식을 만들어먹였고, 나는 일어서서 허겁지겁 밥을 삼켜도 아이는 원목 아기 식탁의자에 앉혀 먹였다.
 아이에게 더 많이,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 나는 퉁퉁 부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아이는 유기농 식재료로 정성 들여 이유식을 만들어먹였고, 나는 일어서서 허겁지겁 밥을 삼켜도 아이는 원목 아기 식탁의자에 앉혀 먹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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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면서 갈팡질팡 고민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를 위해 사야 할 것과 해야 할 일이 계속 쏟아졌고, 그중 내가 살 것과 할 일을 솎아내는 게 일상이 됐다.    

아이에게 더 많이,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 나는 퉁퉁 부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아이는 유기농 식재료로 정성 들여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고, 나는 일어서서 허겁지겁 밥을 삼켜도 아이는 원목 아기 식탁의자에 앉혀 먹였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육아에 투자하는데도 아이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은 계속 생겼다. 주변 엄마들은 '비싸지만 하나쯤은 갖고 있으면 좋다'며 가격대가 센 교구와 전집 등을 추천했지만 형편상 살 엄두도 못 냈다.

세상엔 풍족한 사람이 많다는 걸 엄마가 되면서 실감했다. 온라인 세계에는 많이 사고 더 좋은 곳에 가는 엄마들이 많았다. '#육아'라는 해시태그를 입력하면 각종 인증사진이 쏟아졌다. 고가의 육아용품, 아이방 인테리어, 국외여행 등….

그들의 아이는 부족함 없이 자라는 듯했다. 다들 집이 40평 이상은 돼 보였고, <킨포크> 잡지에 나올 법한 인테리어로 넓은 거실을 꾸며놓았다. 엄마는 깔끔하게 펌을 한 머리에, 얼룩 없는 단정한 옷을 입고, 남편이 쉴 때는 호텔에서, 휴가일 때는 해외에서 지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나만 가난하고 능력 없는 엄마 같았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해도 열등감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았다.

계속 소비하는데... 어딘가 부족한 삶    

아이가 없을 때는 불편하지 않던 것들이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계속 소비하는데도 소유하지 못한 것들이 늘어갔고, 나와 우리의 무능력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자가용이었다.     

우리는 면허 없이 결혼했다. 둘이서 살 때는 굳이 차가 필요 없었는데, 임신했을 때부터 차가 없는 게 힘든 일이 됐다. 주변에서는 걱정하는 마음에 '남편이 왜 면허가 없니', '애가 곧 태어나는데 차가 없어도 괜찮겠니'라고 물었다. 부부동반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날, 배가 부른 몸으로 전철을 타고 택시로 갈아타는 길에 죄 없는 남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남편은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면허를 땄지만, 차가 없어 연습을 제대로 못하니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아이와 외출할 때면 택시와 각종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면허가 없는 나는 아이를 아기띠로 업고 휴대용 유모차를 한 손에 들고 외출 가방을 메고 다녔다. 언덕이 가파른 사직동, 서촌, 광화문 등 아이와 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갔다.     

다닐 때만 해도 '나도 아이와 외출했다'는 성취감으로 기뻤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우울감과 원망만 늘었다. 왜 면허를 땄는데도 운전을 못하냐고, 나와 아이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따지며 남편의 자존감을 갉았다.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밥을 차리고, 일을 다녀와서도 아이를 돌보며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하는 남편의 자상함은 보지 못했다.     

허벅지에 붙은 지방처럼 마음에 콕 달라붙어 있던 괴로움은 다행히 1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갔다. 회사 일이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가정과 나를 비교하는 횟수가 줄었고, 아이에게 무언가 해주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가라앉았다. 풍족한 소비로 점철된 SNS 계정들도 볼 시간이 없어서 팔로우를 끊었다.     

인터넷 쇼핑할 시간조차 없다 보니 아이에게도 정말 안 해주면 안 되는 것들만 겨우 해줬다. 어린이집 낮잠이불, 계절에 맞는 옷, 내가 올 때까지 심심함을 달랠 수 있는 스티커북과 인형 정도. 그 이상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매번 스트레스였던 자가용 문제도 평일엔 아예 탈 수가 없는 상황이 되니 무뎌졌다. 다시 현실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게 됐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왜 나는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됐을까. 최근에 나온 <신경끄기의 기술>(마크 맨슨)을 읽으며 복직 전과 후의 차이를 깨달았다. 바로 '신경 끄기'다.      

"더 행복하게, 더 풍족하게, 더 빠르게" 우리는 괴롭히는 구호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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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원할수록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야 할 일(To do list)'이나 사야 할 것, 버킷리스트를 늘려갈 게 아니라, 꼭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남겨둬서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강박을 한 번쯤은 품고 사는 듯하다. 자신의 다짐과 주변의 조언을 전부 만족하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똑똑하고, 빠르고, 풍족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인기 있고, 생산적이고, 부러움을 사고,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모두 잘하려 하다 보면 자꾸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만 보이고,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책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저자도 이점을 지적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입을 모아 외친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선, 더 나은 직업과 더 튼튼한 차와 더 멋진 애인 그리고 더 넓은 집을 가져야 한다고. 더 사고 더 소유하고 더 만들라고. 이런 메시지에 끊임없이 폭격당한 결과, 우리는 시종일관 모든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새로 나온 TV에 신경 쓰고, 직장 동료보다 더 멋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신경 쓰고, 집을 꾸미느라 신경 쓰고.

그런데 광고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이것저것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소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걸 잘하고 많은 걸 가지려는 태도가 나 자신을 괴롭혔던 것 같다. 예쁜 아이 옷을 보면 사주고 싶었고, 다들 사준다는 교구가 없으면 우리 아이가 뒤처질 것만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 차도 있어야 하고, 아이가 뛰어 놀 수 있는 넓은 거실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믿었다. 모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고, 굳게 자리 잡은 욕심이 나를 지옥에 가뒀다. 내게 필요한 건 신경 끄기의 기술이었다.      

저자는 현대 소비문화를 "우리가 더 많은 걸 원하게 만드는 데 선수"라고 정의한다. 모든 광고와 마케팅의 밑바탕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명제가 깔려 있고, 미디어에 노출된 사람들이 자연스레 더 많이 벌고, 여행하고, 경험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게 꼭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적으면 적을수록 더 행복을 느끼지만,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으면 '선택의 역설'에 시달리게 된다는 주장이다. 선택지가 많으면 하나를 선택했을 때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모든 선택지가 신경 쓰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든 덜 만족하게 된다고 한다.     

반면 몰입은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해준다. 중요한 일과 가치에만 집중해 자유롭게 된다. 선택지가 좁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더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떨칠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고 만족하면, 더 좋은 걸 쫓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미국 CEO가 돌연 회사를 그만둔 이유

지금의 나는 아이를 위해 더 많이 소유하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꼭 필요한 것만 해주려 한다. 예쁜 옷보다는 아이를 위한 편안한 활동복 위주로 사주고, 교구 대신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미술도구와 책 등을 매달 함께 고른다.     

또한 대궐 같은 거실은 아니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집에서 아이와 최대한 눈 맞추며 놀고, 자가용은 없지만 부부가 힘을 합쳐 아이와 근거리로 놀러 다닌다(힘들긴 하다). 정 차가 필요할 때는 자가용이 있는 양가 어르신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훗날 아이의 활동력이 폭발할 7살 전에만 부부 둘 중 한 명이 운전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면허 없이 결혼했다. 둘이서 살 때는 굳이 차가 필요 없었는데, 임신했을 때부터 차가 없는 게 힘든 일이 됐다.
 우리는 면허 없이 결혼했다. 둘이서 살 때는 굳이 차가 필요 없었는데, 임신했을 때부터 차가 없는 게 힘든 일이 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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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편이 면허를 따고도 운전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다. 친정이 바로 코앞이라 원한다면 언제든 친정 아빠의 차를 빌려 연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남편은 주말마다 나가지 않는다. 단 한두 시간이라도 나 홀로 독박육아하지 않게 하려고, 내게 자유시간을 주려고 운전연습 하러 가지 않는다. '괜찮으니까 다녀와'라고 해도 소용없다. 주말 아침마다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나를 보면 나갈 수가 없단다. 다 내 탓이다. 

세상은 기회비용으로 돌아간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남편은 아직 운전보다 육아가 더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일손을 도와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이야기다. 최대 2조 달러에 달하는 채권 펀드 회사의 CEO인 엘 에리언의 우선순위는 1년에 1억 달러는 버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연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가 적어 놓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 22개' 목록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 학교 공연, 졸업식 등 크레용으로 휘갈긴 목록 속 모든 순간에 그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지펀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니까.

"자신이 평범한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평가나 거창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다. 소소한 우정을 나눈다거나, 무언가를 창작한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거나. 좋은 책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웃는 일 등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 따분한 소리 같은가? 그건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이 괜히 일상인가. 중요하니까 일상이다."

앞으로는 소소한 일상을 즐겨보려 한다.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이다. 아이는 자신이 하루하루 눈에 띄게 성장하는 순간을 부모가 함께하길 원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때는 지금밖에 없다. 소중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중요하다고 믿는 일에 힘을 쏟는 삶. 내가 바라는 인생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었습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갤리온(2017)


태그:#신경 끄기의 기술, #육아, #엄마,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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