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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당은 겨울마다 중대 결정을 내려왔다.
 보수정당은 겨울마다 중대 결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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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의 쇼크를 받은 이후, 보수 세력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행동이 있다. 쌀쌀한 계절에 고뇌에 빠지고 결단을 내리는 일이 잦아졌다는 점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지탱했던 민주정의당(민정당)은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했다.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시작이다. 민자당도 1995년 12월 이맘때 중대 결단을 내렸다. 12월 6일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신한국당은 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거듭났다. 한나라당은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새누리당은 올해 2월 자유한국당으로 개칭했다. 새로운 당을 만들고 당명을 바꾼 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6월 항쟁 이후 보수정당은 이렇게 초겨울에서 늦겨울 사이에 고뇌에 빠지고 중대 결단을 내리곤 했다.

2017년 12월은 어떨까. 현재 보수정당들도 위기에 처해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의 리더십은 안정적이지 않다. 홍준표는 유승민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보수층 유권자들의 눈엔 그 역시 마음에 쏙 들지 않는 모양새다.

게다가 박근혜 적폐 청산보다 훨씬 셀 것 같은 이명박 적폐 청산이 성공하면, 자유한국당이든 바른정당이든 불똥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이합집산을 하든, 당을 해체하든, 당명을 바꾸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6월항쟁 이후 30년간, 보수정당은 중도적인 민주당 쪽이나 진보적인 재야 세력보다 체질 개선을 더 많이 했다. 몇 년마다 겨울철에 신당을 창당하거나 당명을 바꾸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제의 적이었던 야당 및 재야 출신까지도 과감히 영입해 국회의원 후보 자리는 물론이고 대통령 후보 자리까지 내줬다. 김영삼·김문수·이재오 등의 성공이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

노무현도 탐냈던 홍준표, 그는 왜 신한국당에 갔을까

1996년 1월 25일, 문민정부 출범초 슬롯머신사건 수사검사였던 홍준표 변호사(오른쪽)가 신한국당에 공식 입당,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입당원서를 전달한 후 악수하고 있다.
▲ 홍준표 변호사 신한국당 입당 1996년 1월 25일, 문민정부 출범초 슬롯머신사건 수사검사였던 홍준표 변호사(오른쪽)가 신한국당에 공식 입당,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입당원서를 전달한 후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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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그런 분위기에서 보수정당에 발을 들였다. 출발 당시만 해도 그는 꽤 신선한 정치 신인이었다. 조직 폭력배와 권력형 비리를 용감히 파헤쳤다고 해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였다. 검사직을 그만둔 직후인 1996년 1월 25일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만 해도, 그는 그 당보다는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나 민주당이 더 어울렸다. 

자서전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에 따르면, 정치 입문 직전인 1995년 겨울 그는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로부터 첫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신한국당에서는 당시까지는 교섭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국민회의에 이어 그가 접촉한 대상은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이었다.

그때만 해도 홍준표가 신한국당보다는 국민회의나 민주당에 더 어울렸다는 점은, 신한국당 입당 기자회견 10시간 전인 1월 25일 자정께 그의 집을 '침입'한 사람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신한국당으로 가지 말고 민주당에 들어오라고 권유하러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홍준표 자서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느닷없이 밤 12시경 집으로 제정구 의원, 유인태 의원, 이철 의원, 김홍신, 노무현, 박인제 등 민주당 스타들이 대거 쳐들어와 민주당 입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무현은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다. 노무현도 탐을 냈던 홍준표가 신한국당으로 입당할 수 있었던 건 3당 합당 이후 보수정당이 야당·재야 출신을 대거 영입해 과거의 이미지를 많이 누그러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한 정치 신인들이 그리로 들어가기가 쑥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6월 항쟁이 보수정당에 준 변화

6월 항쟁.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6월 항쟁.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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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때 국민들은 야당과 합세해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주고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국민의 의지를 끝까지 대변할 정치 조직이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중도적 야당들을 후원하는 방법으로 개혁에 대한 열망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수정당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여소야대 정국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었던 그들은 당명을 바꾸고 새로운 피를 수혈함으로써 돌파구를 만들고자 했다. 1990년 3당 합당 때부터 본격화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수정당은 김영삼·김문수·이재오·홍준표 등을 끌어들이고 이따금 겨울철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생존을 계속해오고 있다.

6월 항쟁 때 강펀치를 제대로 얻어맞은 보수정당은 체질도 약해지고 자신감도 없어졌다. 계속 '링거'를 맞고 온몸을 수술하지 않으면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2016년 겨울에 '최순실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고 한동안 골골했던 것도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체질을 계승했으니 홍준표·유승민이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7년에 얻어맞고 2016년에 한번 더 맞은 상태에서 이명박 적폐 청산으로 또다시 맞게 되면, 보수정당은 구급차에 실려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될 수도 있다. 홍준표·유승민의 앞날은 더욱 더 험난하다.

1945년에도, 1960년에도 얻어맞은 보수... 그들이 건재했던 이유

1946년에 발행된 해방 1주년 기념엽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1946년에 발행된 해방 1주년 기념엽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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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수세력이 강펀치를 얻어맞은 것은 1987년과 2016년뿐만 아니다. 1945년에도 그랬고 1960년에도 그랬다. 1945년에는 조선총독부 몰락으로 친일 보수파가 위기에 봉착했고, 1960년에는 4월 혁명으로 자유당계 보수파가 위기를 마주했다.

그렇지만 1945년과 1960년의 강펀치가 보수파의 존립 기반을 크게 흔들지는 않았다. 보수파 정권의 상층부만 바뀌었을 뿐 중추세력은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1945년과 1960년 뒤에는 보수세력이 어제의 적인 진보 진영을 대거 수혈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5년 및 1960년 이후의 상황은 1987년 이후의 상황과 분명히 달랐다. 

이 차이는 변혁 직후에 반동(反動)이 있었느냐에 의해 갈라진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1945년 이후와 1960년 이후에 새로운 세력이 정권을 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1945년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3주간 권력을 잡았을 뿐이고, 1960년에는 민주당 정권이 9개월간 집권했을 뿐이다. 건준과 민주당이 권력을 뺏긴 뒤에는 보수화 경향이 다시 농후해졌다.

건준과 민주당이 새로운 상황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변혁 직후의 반동 때문이다. 1945년 경우에는 해방 3주 만에 미군이 상륙해 변혁의 물결을 '스톱'시켰고, 1960년 경우에는 이듬해 박정희 군대가 쿠데타로 변혁의 물결을 정지시켰다. 군대가 일으킨 반동으로 두 시기의 변혁이 얼마 못 가 무산됐던 것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미국의 사전 승인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사후 승인을 받은 것만큼은 명확하다. 결국 1945년 변혁에 이어 1960년 변혁도 미국과 미군이 무산시켰다는 말이 된다. 미국과 미군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 변혁을 원위치로 되돌렸기에, 1945년·1960년 강펀치를 맞고도 보수세력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이후에는 그런 반동이 없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로 광주·부산·서울에서 미국문화원이 한국 국민들의 공격을 받는 것에 놀란 미국은, 그 뒤로는 한국 국민들을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6월 항쟁 당시의 주한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중국통>이라는 저서에서 밝힌 것처럼, 미국이 전두환의 군대 동원을 극력 반대한 것은 그런 경계심 때문이었다. 한국군이 미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상황에서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해 시민항쟁을 진압하면 반미감정이 한층 격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지가 약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6월 항쟁 이후의 미국은 자국 군대나 한국군이 한국 민중의 열망을 진압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보수파는 군대의 반동으로 변혁을 원위치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나온 게, 당명을 바꾸거나 신당을 창당하거나 새 피를 수혈하는 대책이었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나오는 까닭

2017년 3월 11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앞에서 박사모 등 친박단체가 모인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주최로 ‘제1차 국민저항운동 태극기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참석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십자가, 태극기, 대형성조기를 들고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2017년 3월 11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앞에서 박사모 등 친박단체가 모인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주최로 ‘제1차 국민저항운동 태극기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참석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십자가, 태극기, 대형성조기를 들고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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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연말 이래의 태극기 집회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호소였다. 보수세력이 70년 넘게 권력을 유지해온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허무맹랑하거나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실현 가능성이 낮았을 뿐이다.

보수세력은 이제껏 미국과 미군에 주로 의존해왔다. 온실의 화초 같은 존재다. 그런데 미국의 손길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으니, 이들은 앞으로는 훨씬 더 엄혹한 환경에서 생존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웬만한 몸부림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추운 겨울의 한기를 녹일 정도의 몸부림이 아니면, 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태그:#자유한국당, #바른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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