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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존재는 늘 아이로 대체됩니다. 아이를 품은 '엄마'가 아닌, '미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는 대중교통 임산부석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은 사라진 채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아가는 엄마들. [주간애미]는 '애 말고 엄마'들을 위한 콘텐츠를 지향합니다. [편집자말]
 요즘 보면 초등학생부터 여성혐오가 심각하더라. 욕설과 성적 표현은 이미 일상화되었다(사진은 대형 쇼핑몰 아동코너 화이트보드에 붙어있는 '앙 기모띠(일본 야동에 등장하는 '기분 좋다'라는 뜻의 일본어).
 요즘 보면 초등학생부터 여성혐오가 심각하더라. 욕설과 성적 표현은 이미 일상화되었다(사진은 대형 쇼핑몰 아동코너 화이트보드에 붙어있는 '앙 기모띠(일본 야동에 등장하는 '기분 좋다'라는 뜻의 일본어).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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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아,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했다.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을 뜻하는 그 페미니스트 말이야. 엄마가 대단한 여성학자도 아니고, 적극적인 활동가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한다는 것이 겸연쩍긴 하지만 세상엔 더 많은 페미니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선언하려고 해. 엄마는 페미니스트다.

가입하고 쭉 방치해오던 페이스북에 페미니즘에 관련한 글을 쓰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독서모임을 찾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질문을 시작했어. 페미니즘은 엄마의 삶이 되었다. 왜 엄마가 페미니스트의 길을 선택했을까?

엄마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엄마가 결혼 생활에 엄청난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가부장적이라거나, 시댁 식구들이 괴롭게 한다거나, 여성으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고 말야.

그런데 너도 봐서 알겠지만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애도 잘보고, 요리도 잘하고, 화장실 청소도 잘하고, 시댁과의 관계에서도 늘 중간자의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무엇보다 엄마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에 대해 이해하고 수긍하려는 자세가 되어있으니 이 정도면 가부장적인 남편이라고 보긴 어렵지.

아, 물론 아빠가 완벽하다거나 엄마가 아빠에게 불만이 없다는 건 아니야. 아빤 가끔씩 엄마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가 있잖니. 아무리 아빠가 평균 이상의 젠더 감수성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싸워야 할 일은 언제나 불쑥 불쑥 생기곤 해 (고구마 백 개 먹은 듯이 할 말을 잃게 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아빠의 이야기는 차차 들려줄게).

그런데 뭐, 그 정도야 페미니즘의 도움 없이도 엄마가 충분히 혼자의 힘으로 싸울 수 있어. 아빠 정도쯤은 엄마의 타고난 투쟁력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고. 페미니즘을 접하기 훨씬 전부터 엄마는 본래 불편한 농담에 웃지 않는 예민하고 까칠한 여자였으니까. 결혼을 했다고 해서 가부장 사회의 기존 질서를 충실히 따를 스타일이 전혀 아니거든. 더 나은 결혼 생활을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아니란 말이지.

"딸 키우기 겁나지 않냐"는 사람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5월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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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묻는다. 딸 키우기 겁나지 않냐고 말이야. 세상이 불평등하고, 여성들에게 많은 부분이 불리한 게 사실이니까. 엄마가 누나의 행복을 위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리라 짐작하기도 해. 이 말이 전혀 틀린 건 아니야. 엄마의 삶보다 누나의 삶이 더 나아져야 하고, 그게 바람직한 방향이니까. 엄마는 누나에게 좀 더 나은 삶을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단다.

그런데 말이지. 엄마가 이토록 간절하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결정적 이유가 누나는 아니야. 누나는 날 때부터 약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사회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는 존재다. 누나는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어.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거, 자신이 차별받는 존재라는 거, 이상하다는 거. 충분히 깨달을 수 있어.

학창 시절 남자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을 경험하면서, 생리를 생리라 말 못하고 '그거'라고 말하면서, 직장에서의 성희롱이나 승진 불이익을 경험하면서, 화장은 여자의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서, 늦은 귀가에 벌벌 떨며 걸음을 재촉하면서, 결혼을 하며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역할을 강요받으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온 몸으로 느낄 거야.

여자들은 꼭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처럼 말하곤 한단다. 억울하니까, 답답하니까, 열 받으니까... 때론 욕하고, 때론 참으며, 치열하게 더 나은 삶을 고민해. 페미니즘 없이도 삶이 곧 투쟁이다.

아마 누나는 사회화가 될수록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고 눈치보며 살게 될지도 몰라. 엄마가 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과하게 움츠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정도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이 엄청난 자유나 대단한 성취를 주리라 기대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페미니즘은 누나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단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권리와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 아는 만큼 보여서 행복해질까? 글쎄, 아는 만큼 괴로워질 수도 있지.

페미니즘을 공부한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혐오 범죄를 피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취직에 가산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승진이 더 빠른 것도 아니고, 독박육아를 대신해줄 요정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반대지. 남성중심 사회에 순응하지 않고자 하면 유별난 여자, 기가 센 여자가 되니까. 사회부적응자로 낙인 찍혀 자의든 타의든 소외되기 쉽잖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누나의 삶에 페미니즘이 꼭 필요한지는 확신이 서질 않아.

성차별 만연한 사회, 아들 키우기가 더 겁난다


그런데 한들아. 넌 아니야. 너를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요즘 보면 초등학생부터 여성혐오가 심각하더라. 욕설과 성적 표현은 이미 일상화되었다. 또래 여학생이나 여교사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일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유튜브,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방송 진행자들이 무분별하게 쓰는 단어를 초등학생들이 배워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더라. 각종 포르노 접근도 쉽고 말이야.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해봤니'라는 말을 던진다거나, 남학생들끼리 '미친X' '니 애미' 라는 욕을 하며 여성을 경멸의 의미로 사용한다지. 거칠고 상스럽게 말함으로써 멋있고 쿨한 남성인 듯 뽐내는 거야. 그저 재미 삼아, 또래 친구들한테 인정받으려는 생각에, 쉽게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거지. 상처받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야.

우리 사회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들의 폭력이 끊임없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하거나 심지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을 방송하며 많은 돈을 버는 BJ 남성들, 여교사 앞에서 집단 자위하는 남학생들, 몰카를 찍고 공유하며 결속감을 다지는 남자들, 여자를 집단 강간하면서도 죄책감을 못 느끼는 남자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 직장에서의 권위를 이용해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노리는 남자들, 본능이라는 말로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남자들.

한들, 남성중심 문화·성차별은 뿌리가 깊다. 인류 역사상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억압하는 성차별주의는 우리 사회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간주되어왔어.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젠더폭력이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

그런데 엄마가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각종 커뮤니티, 게임, 팬픽, 만화, 수많은 영상들의 영향을 받으며 편견을 강화해 성차별주의자가 되기 쉬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는 적절한 처벌이나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거야.

여성 혐오를 일삼으며 막장 방송을 해도 적절하게 규제하지 않는 사회, 한 여성을 살인하러 가던 BJ에게 단돈 5만 원의 벌금이 내려지는 사회, 자신보다 27살 어린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임신까지 시킨 40대 남성이 무죄를 확정 받는 사회, 유명인들이 강간을 시도하거나 여성비하 발언을 하고도 계속 유명할 수 있는 사회.

이런 불평등한 사회 현상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할 학교에서 "남자는 누드에 약하고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 "남자가 여자보다 성욕이 강하니 여자가 스스로 성폭력에 대비해야 한다" 등 성인식을 왜곡하는 내용을 교육하고 (학교 성교육 표준안), 의식있는 교사들은 초등학교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필요성을 언급했다가 신상이 털리고 검찰에 고발 당하는 등 극심한 공포를 느껴야 했어. 2017년에 말이야.

이런 사회에서 널 어떻게 키워야 할까?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할 기준이나 관점을 갖지 않으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며 성차별주의자가 되기 쉬운 환경인데.

그래. 눈치 챘겠지? 엄마는 너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고 싶어서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기로 한 거야. 사회에서 학교에서 교육할 의지가 없으니 엄마가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엄마는 페미니즘이 이런 불평등한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은 널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시킬 거라 믿어.

성차별을 하며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 아닌, 그 차별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으로, 깨어있는 남성으로, 존중의 의미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일상생활 속의 고정관념, 편견, 혐오 표현, 차별 구조 등을 곱씹고 생각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리라 믿어.

엄마와 함께 질문하며 살아보자

 한들, 엄마는 네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길이 페미니즘에 있다고 생각해.
 한들, 엄마는 네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길이 페미니즘에 있다고 생각해.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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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엄마는 두려워. 네가 평범하게 살다가 크고 작은 사건들의 가해자가 되면 어쩌나. 그게 잘못인지도 모르고 문제인지도 모르고. 상대방의 상처는 생각도 못하고 우월감에 빠져 여성혐오를 일삼으면 어쩌나.

네가 클수록 엄마 마음은 조급해진다. 엄마의 생각이 자라는 속도보다 네가 크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서 고민이 깊어진다. 더욱이 최근 이슈가 되었던 대기업 성폭행 사건과 같은 일들을 바라보면 그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말이야.

가해 남성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이 성폭행 가해자가 되기를 바라며 자식을 키우진 않았을 거야. 절대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피해 여성을 꽃뱀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남자들이 다 그렇지..."라는 말로 별 일 아닌 듯 생각할지도 몰라.

지금 넌 3살이고, 누구보다 사랑이 넘치는 애교 만점 귀염둥이다. 소꿉놀이를 가장 좋아하고, 누나의 공주 드레스나 발레복을 입으며 역할놀이를 즐겨. 엄마가 아픈 척 하면 "엄마 괜찮아?" 여러 번 물어보고 "호~호~" 불어주지. 도대체 남자들이 공감능력 떨어진다는 말은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다정하고 애교가 넘치는 걸.

보고보고 또 봐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네가, 이 사회에서 사회화를 거치면 거칠수록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절망스럽고 슬프다. 여기서 엄마가 말하는 가해자가 꼭 성폭행과 같은 범죄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따먹고 싶다" 라거나 '김여사', '된장녀' 같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누군가를 상처주는 가해자가 될 수 있지.

한들, 엄마는 네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길이 페미니즘에 있다고 생각해. 물론 엄마가 널 페미니스트로 키우고 싶다고 해도, 그게 엄마 뜻대로 되진 않겠지. 잘 알아. 그래도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보려고.

엄마는 얼마 전, 김장김치를 담그기 위해 우리 텃밭에 나가 배추를 수확했다. 글쎄 배추가 다 얼어 버렸더라. 얼마나 속상하던지. 지켜보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일찍 수확을 했어야 했다며 시기를 놓쳤다고 하셨고, 할머니께서는 비닐로 덮어 놨으면 얼지 않았을 텐데 아깝다고 말을 보태셨어. 얼어버린 배추를 손질하면서 엄마는 생각했지.

'나는 잘 키워서 실하고 맛있는 배추를 수확하고 싶었는데... 시기를 놓쳤구나... 방법을 몰랐구나... 농사라는 게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네가 다 커버린 후에 시기를 놓쳤다고, 방법을 몰랐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 너의 사소한 행동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너의 사소한 말 한 마디를 바꿀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찾아봐야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잖아. 영어, 한글 교육은 늦더라도 성평등 교육은 빠를수록 좋을 거라 믿어. 엄마가 너의 더 충만한 삶을 위해 열심히 공부할게. 엄마와 함께 질문하고 방법을 찾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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