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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으로 시작된 촛불이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사회가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인권의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인권단체들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인권현실을 알리고자 촛불1주년인 오는 28일 오후 4시 보신각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인권궐기대회를 준비 중이다. 그에 앞서, 우리의 삶과 일상을 나누는 연속기고를 진행한다. - 기자 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함께 십여 명이 둘러앉아 밥을 나눠 먹었다.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이하 KNP+)가 주최하는 오픈마이크 '그래도 봄은 오더라' 행사를 마치고 나면 늘 식사를 함께 한다.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새롭게 HIV 확진을 받은 감염인들을 초대해 밥을 먹는 자리다. 용기내어 사람들이 모였다.

오늘의 메뉴는 비빔밥. 요리 솜씨가 뛰어난 감염인 분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다른 방에서는 HIV 확진 이후의 삶이 어땠는지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KNP+ 사무실은 서울 시내에 있어서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촛불집회들을 만나며 이곳에 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사람들을 가로질러야 HIV감염인이 모이는 안전한 공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인파가 북적거리는 곳을 지나서인지 몰라도 감염인들이 모인 이곳은 뭔가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이었다. 복잡한 생각도 잠시 프로그램을 다 마친 감염인분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초도 준비했다. 마치 축제를 찾아가는 사람들처럼 들떠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인증샷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탄핵'으로 대한민국이 타오르던 그때, 우리도 그곳에 있었다.

촛불광장, HIV감염인이 서 있던 그 자리

세계에이즈의날을 맞아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진행된 거리 캠페인 모습. 이 캠페인의 제목은 ‘HIV/AIDS에 대한 차별과 혐오, 하야해야해!’ 였다.
▲ 2016.11.26 세계에이즈의 날 맞이 거리 캠페인 세계에이즈의날을 맞아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진행된 거리 캠페인 모습. 이 캠페인의 제목은 ‘HIV/AIDS에 대한 차별과 혐오, 하야해야해!’ 였다.
ⓒ 정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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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6일 5차 촛불집회가 열리던 때 '세계에이즈의 날(12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거리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다. 캠페인 제목은 'HIV/AIDS에 대한 차별과 혐오, 하야해야해!' 감염인들은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동시에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촛불시민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일반 시민들과 포옹을 하고 싶어했던 한 감염인은 직접 프리허그 판넬을 만들었다. 시민들에게 나눠줄 홍보 스티커도 제작하고, 감염인이 경험하는 진료거부의 현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웹툰도 그렸다. 하지만 너무 야속하게도 첫눈이 펑펑 오는 것이 아닌가. 왜 하필 이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눈을 맞으며 거리에 섰고, 목소리를 높였고, 촛불시민들과 포옹을 나눴다.

무언가 꿈꿀 수 있었고, 붐비는 인파 속에서 촛불을 함께 들었던 광장이 그립다. 감염인과 기꺼이 포옹을 나누고,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만들었던 열정이 그립다. 언론기사 하나를 클릭하기 두려울 정도로 에이즈 쇼크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요즘 같은 때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많은 이들이 원했던 촛불의 힘으로 권력이 바뀌었고, 박근혜가 구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 품고 있는 촛불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에이즈 감염 여중생 성매매 사건'과 '부산 에이즈 감염 20대 여성 성매매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 전파경로가 명확한 질병, 일상생활로 감염되지 않는다는 에이즈의 진짜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죽음의 질병으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했고, 감염인은 다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클릭률을 높이기 위해 언론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극적인 기사제목을 뽑기 바쁘고, 남 일처럼 뒷짐 지고 있는 정부의 태도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HIV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잊혀졌다.

온라인 혐오표현 의미망 분석 조사결과를 보면 작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 동성애 혐오가 보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촛불이 한창이던 때 '에이즈'는 혐오를 강화시키는 논리에 이용된 것이다. 죽음, 문란함, 하늘이 내린 천형으로서 인식되었던 에이즈만큼 말하기 쉬운 게 없었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에이즈환자의 처참한 모습을 동성애자들의 미래라고 언급하면 혐오는 쉽게 확산되고, 인권을 부정하기 쉬워진다.

정권은 바뀌었는데, 혐오는 더 강화되고 있다. 적폐세력들은 국민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에이즈가 확산되는데 정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규탄하고 있고,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위해 국민의 혈세를 쓰고 있다며 '귀족환자' 운운한다. 인사청문회나 국정감사 현장에서 혐오선동에 앞장선 이들이 떵떵거리며 혐오를 말하는데 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에이즈'를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보수정권이 국민의 생명을 포기한 적폐였음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촛불을 들지 않았던가. 마치 정권이 바뀌고 나서 감염인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새롭게 생긴 것처럼, 에이즈 관리정책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감염인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긴 시간동안 에이즈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도, 관리정책도 바뀌지도 않았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절망의 수치들

2016.11.26 거리캠페인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감염인 인권의 온도는' 이미지
 2016.11.26 거리캠페인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감염인 인권의 온도는' 이미지
ⓒ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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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후 감염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감염인(HIV/AIDS) 의료차별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유엔에이즈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감염인 낙인지표조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 참여한 감염인들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내재적 낙인' 지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 응답자의 64.4%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75.0%가 자신을 탓하고 있었으며, 36.5%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조사되었다.

낙인이 심할수록 마음은 곪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연구를 보면 의료차별의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HIV 감염인 76.2%가 '다른 질병으로 병원 방문 시 HIV 감염인임을 밝히기 어렵다'고 답하였고, 40.5%가 '치료/수술/입원 시 감염예방을 이유로 별도의 기구나 공간을 사용했다'고 했으며, 26.4%가 'HIV 감염사실 확인 후 약속된 수술을 기피하거나 거부했다'고 응답했다. 장기요양이 필요한 에이즈 환자들이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은 전혀 없다.

절망적인 수치들이다. 차별과 낙인의 울타리에 묶여 있는 감염인들은 존엄을 꿈꿀 수 없다. 특종보도처럼 나오는 에이즈 관련 기사들에 난도질되고 있는 인권은 아직 꺼내지 못한 촛불과도 같다.

작년 11월 26일 'HIV/AIDS에 대한 차별과 혐오, 하야해야해!' 거리캠페인에서 진행하기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에이즈 예방과 인권의 상징인 레드리본에 시민들이 참여하는 지지의 글로 100도 온도를 채우는 프로그램이었다. 눈이 펑펑 오는 상황에서 이 프로그램은 진행되지 못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을 촛불 1년을 맞은 지금 진행한다면 감염인 인권의 온도는 몇 도로 체크될 수 있을까.

촛불 1년, 에이즈를 향한 혐오와 감염인이 경험하는 차별을 줄이기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 두려움과 공포를 상징하는 질병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HIV감염인들은 광장의 일부였고,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존엄 그 자체였다. 이제 꺼내지 못했던 촛불을 들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당신이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


태그:#에이즈, #감염인 인권, #촛불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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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 사람,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무지개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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