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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국가 차원의 군트라우마센터를 만들자는 의미로 군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바로가기)에서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 엄마는 더 이상 과일가게를 가지 않는다
ⓒ 안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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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정기 일병의 군번줄.
 고 홍정기 일병의 군번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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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일 전, 아들이 군대에서 죽었다.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아들은 병원에 실려 가기 전날에만 네 차례나 연대 의무실을 찾아갔다. 그때마다 아들에게 쥐어진 건 두통약 몇 알뿐이었다.

병원에 실려 가던 날 새벽에도 아들은 상급부대(사단) 의무실로 이송됐다. 하지만 침대가 꽉 찼다는 이유로 다시 연대 의무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도 아들 손엔 두통약 몇 알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군대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우리 아들처럼, 군대에서 응급상황에 처하게 된 애들은 다 죽어야 하는 거죠."

군 생활에 만족했던 아들은 자주 이렇게 말했었다.

"엄마, 나 군대가 체질에 맞나 봐. 육사(육군사관학교) 갈 걸 그랬어."

그랬던 아들이 군대 때문에 죽었다.

홀로 방치된 아들

고 홍정기 일병의 군입대 사진과 유품이 비닐팩에 보관되어 있다.
 고 홍정기 일병의 군입대 사진과 유품이 비닐팩에 보관되어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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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정기 일병이 손꼽아 기다리던 제대날짜가 수양록에 적혀 있다.
 고 홍정기 일병이 손꼽아 기다리던 제대날짜가 수양록에 적혀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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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정기 일병(살아있다면 24세)은 따뜻한 아들이었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했고, 군대에서도 매일 밤 전화를 걸어왔다. 죽은 아들을 떠올릴 때면, 엄마의 말문은 수시로 턱턱 막혔다. 반면 눈물샘은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유난히 엄마 품을 안 떠나려는 애들 있잖아요. 엄마 없으면 막 우는 애들... 우리 정기가 그랬어요. 그렇게 천사처럼 왔다가 천사처럼 간 거 같아요."

아들은 군 생활에 열심이었다. 죽기 며칠 전까지도 특급전사(사격, 체력검사 등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주어지는 자격)가 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들의 유품에선 직접 그린 부대 약도와 세세한 건의사항("길의 정비 필요", "말벌집 제거 필요" 등)이 담긴 종이가 나오기도 했다.

공부를 제법 잘했던 아들은 자투리 시간을 내 학업에도 힘썼다. 자격증 취득을 위해 연등(군대에서 취침 전 1~2시간 주어지는 개인정비 시간)에 매일 참여할 정도였다. 아들의 병영일기에는 21개월 군 생활 계획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병원에 실려 가기 사흘 전에도 아들은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아들 장례식 이튿날, 엄마는 시험 합격 문자를 받고 가슴을 쳤다.

"정말 아무 걱정 없이 군대에 보냈어요. 걱정을 끼치거나 속상하게 한 일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렇게 너무 잘 자라줬는데..."

2016년 3월 21일은 월요일이었다. 아들은 며칠째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행정보급관은 아들을 데리고 부대를 나와 강원도 양구(홍 일병이 있던 부대의 소재지) 읍내의 작은 병원을 찾았다.

아들의 증상은 두통뿐만이 아니었다. 몸 일부에 멍 자국이 선명했다. 의사는 혈액암이나 패혈증이 의심된다며 "즉시 병원 이송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남겼다. 하지만 행정보급관은 아들을 데리고 곧장 부대에 복귀했다.

부대 복귀 후, 아들의 두통은 멈추지 않았다. 구토와 메스꺼움 증상이 이어져 네 번이나 연대 의무실을 찾았다. 하지만 의무관은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 외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께,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또 다시 토사물을 쏟아냈다. 이 모습을 본 생활관 동료들이 당직사관에게 보고했고, 그제야 아들은 군 구급차에 실려 상급부대인 사단 의무대로 이송됐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단 의무대장은 아들에게 또 진통제를 처방했다. 뿐만 아니라 의무대 침대 16개가 꽉 찼다며 다시 아들을 연대 의무실로 돌려보냈다.

동이 튼 뒤에도 한참 동안, 아들은 홀로 방치됐다. 그 시간 동안 아들이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면, 엄마는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낮이든 밤이든 아들은 계속 아프다고 호소했어요. 그런데 군대는 아무 것도 안 했죠. 그 깜깜한 밤에 홀로 고통 받았을 걸 생각하면... 하아,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생각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정말 힘들어요."

"평생 누워있어도 좋으니..."

고 홍정기 일병이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엄마 김미경(가명)씨는 이를 앨범으로 만들어 정리해놓고 기억을 더듬었다.
 고 홍정기 일병이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엄마 김미경(가명)씨는 이를 앨범으로 만들어 정리해놓고 기억을 더듬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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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9시, 남편이 출근한 뒤 엄마는 홀로 집에 남아 있었다. 그때 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아파서 국군춘천병원으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엄마는 마음을 다잡고 "우리가 가야 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그렇게 걱정하실 일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노파심에 이송을 담당하는 군 간부의 전화번호를 받아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엄마 : "정기 좀 바꿔주세요." (잠시 후)
아들 : "어, 어..."
엄마 : "얼른 가서 진단 받아봐."
아들 : "어, 어..."

엄마가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오전 11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병원에 가야 하니까 준비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부대에서 남편에게 다시 연락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 아들을 태운 차는 한림대춘천성심병원을 향하고 있었다. 아들의 증세가 뇌출혈로 판단돼 국군춘천병원에선 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엄마가 탄 차도 방향을 틀었다.

오후 1시 30분, 엄마는 아들과 마주했다. 하지만 아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입엔 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의사는 즉각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엄마는 서울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아들을 옮기려고 했다. 의사는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움직이면 잘못됩니다"라며 엄마를 붙들었다.

오후 3시,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너무 늦어버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엄마만 실감하지 못했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면회시간이 아닐 때도 계속 중환자실 앞에서 버텼어요. 거기 지키고 있으면 아들이 못 갈 줄 알았죠. 아니, 안 갈 줄 알았죠."

수술 이틀 후, 의사가 엄마를 불렀다. 면담을 이어가던 의사는 "저도 아들 키우는 사람인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엄마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머릿속에 아들과의 이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아이는 무조건 일어날 거예요. 어떤 애들보다 건강한 아이가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는 게 믿어지세요? 제가 몇 십 년이라도 아들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평생 누워 있어도 좋으니 살려만 주세요."

그날 오후 11시, 아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이제 만질 수 없는 아들

고 홍정기 일병의 유품상자.
 고 홍정기 일병의 유품상자.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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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엄마의 일상 곳곳에 묻어 있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기억 속의 아들은 분명히 살아 있는데, 엄마는 아들을 만질 수 없었다.

추억이 또렷한 만큼, 엄마의 일상도 무너졌다. 엄마는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는 아들의 영정을 바라봤다. 아들은 웃고 있었다.

"아들이 특히 과일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항상 과일을 박스째 사놓고 그랬어요. 근데 지금은 과일 가게를 안 가요. 과일만 보면 아들 생각이 나니까... 어쩌다 피자나 치킨을 시켜도 우느라 한 입도 못 먹어요. 아들이 잘 먹었던 피자, 치킨 말만 들어도... 하아."

엄마의 하루는 이불 위에서 눈물을 쏟으며 시작됐다. 눈만 뜨면 아들 생각이 나는데, 아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가족 앞에서도 아들 이야기는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응어리가 켜켜이 쌓여 갔다. 꾹꾹 눌러 담긴 한 때문에 가슴팍이 턱턱 막혀왔다. 어느 날, 이불 위에서 울고 있는 엄마에게 남편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여보, 우리 정신과 가보자. 나도 같이 가서 검사 받을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남편에게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미쳤어? 내가 정신과엘 왜 가? 나 정상이거든?"

엄마가 인정할 수 없었던 건 아들의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자신의 몸과 마음도 엄마는 애써 회피했다.

고 홍정기 일병이 군 생활을 하며 남겼던 메모에 "마지막...인고의 세월"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고 홍정기 일병이 군 생활을 하며 남겼던 메모에 "마지막...인고의 세월"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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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엄마는 방과 후 학교 지도교사였다. 오랜 시간 해왔던 일인데, 지금은 다시 돌아갈 힘이 없다.

"지난 봄, '다시 학교로 올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근데 제가 못한다고 그랬죠. 일을 치르고 난 뒤, 세상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계획조차 짜고 싶지 않아요. 제 마음이 허락을 안 해요."

엄마가 힘을 낼 수 있는 딱 하나의 일이 있다. 엄마는 무능력했던 군의관을 용서했다. 하지만 아직 군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을 죽게 한 군대의 의료체계를 고치기 위해 곳곳을 돌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군의관이 찾아왔어요. '뇌출혈 증세인지 몰랐냐' 물었죠. 그러니 '저는 정신과라...'라며 답을 잘 못하더군요. 곧바로 '사단 의무실에 어떤 의료기구가 있냐' 물었어요. '체온계, 혈압계, 흉부 엑스레이가 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죠. 사단 전체를 총괄하는 의무실 수준이 그렇다는 거예요(사단의 규모는 통상 1만 명).

군대 다녀온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원래 그런 거래요. 다 알고 있는 거래요. 그럼 군대에 간 아들들은 군복무 중 절대 아파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아들 낳아 군대에 보낸 게 죄인가요? 이제 더 이상 자식 먼저 보낸 죄인을 만들지 말아주세요."

엄마의 군대 밖 전쟁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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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군트라우마센터, #군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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