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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투표하고는 끝,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뿐인가. 정치 이야기로 무르익어가는 대화에는 찬물을 끼얹는다.

"왜? 니들 어디 선거에라도 나가냐?"

투표를 했다는 자부심으로 SNS에 올린 인증샷까진 열정적이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정말 우리는 민주주의자이고,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을까. 진정,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호기심 가득 안고 <최초의 민주주의>를 펼쳤다.

<최초의 민주주의> 책표지
 <최초의 민주주의> 책표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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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 어느 때도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실현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고대에도, 현대에도. 또한, 민주주의는 이상(理想)이며, 책은 이상주의를 논하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달성하기 어렵고, 완벽하게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꿈같다 하여, 그것이 좌시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스스로 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길 희망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말한다. 이상은 우리가 실행하는 것들에 확실한 영향을 미친다고. 현실적이 되라는 구호는 침체와 안주라는 실패로 인도할 뿐이라고. 그렇다. 우리가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호기심에서 펼친 책은 기대감으로 나를 부풀게 했다.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물론,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저자의 학문적 성취와 그것을 당신 안에서만 잠들게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전달되어 기대는 고조되었다.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고대 아테네인들이 200년 동안 고치고 보완했던 민주주의 체계는 어떠했는지 책은 말하고 있다. 당시의 민주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민주주의 이념들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며, 그들이 민주주의 이념을 어떻게 배반했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서 현대의 우리가 반면교사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아테네가 곧 우리의 청사진은 아니다. 고대의 아테네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민주주의 이념들을 향한 그들의 끊임없는 도전이다."

저자는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고려하고 있는, "결코 멈출 수 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이념"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그러나 다른 이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역시 많은 대역(代役)들을 갖고 있다. 저자는 대역들이 규범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되어,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잘못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대역이란,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민주주의와 닮은 모양새 혹은 성격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며, 그 대표적 대역으로 바로 투표, 다수결의 원칙, 대표 선출제가 꼽힌다.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라고 익히 들어온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단언한다. "투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어떤 선택 절차를 거쳐 결정 사안들이나 후보들이 투표에 회부되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투표는 할 수 있으나 발언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역사의 독재자들은 투표 용지 위에 적힌 것을 철저히 통제하며 국민들에게 투표를 허용했고, 심지어 강요했다. 다수결의 원칙 역시 대역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결의 원칙이란 단지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정치 체제일 뿐, 그 자체로 민주주의는 아니다."

소수를 위협하고 배제하며 다수의 절대적 권력 아래 소수를 종속시키는 정치는 다수에 의한 독재와 다름없다. 이는 다른 독재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끝장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대표 선출제도 다르지 않다. 선거는 선거에서 이긴 자가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보다 자신이 속한 정당과 집단에 더욱 충실히 헌신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시민지혜, 지식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추론, 일반 교양 교육, 이상의 7가지 개념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설명하고, 그 중에서도 조화와 일반 교양 교육을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정의한다.

"아마도 조화는 민주주의 이념들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화는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실천적인 것이며, 실제적으로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핵심 요소다."

정치적 조화란, 법에 따른 통치를 충실히 수용하고, 공공의 목표를 위해 함께 협력하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름이 인정되는 토론과 논쟁은 언제나 환영받아야 한다.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갈등과 분개를 낳고, 분개는 불화로 이어져, 결국 불필요한 내분을 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최악의 전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경계해야 한다. 조화는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필수적이다. 조화가 깨질 때 대량 학살이나 도덕의 붕괴와 같은 끔찍한 내분이 발생한다. 저자는 덧붙인다. 조화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라고.

파이데이아(paideia)는 '일반 교양 교육'으로 번역되었으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전문가와 경쟁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전문가의 주장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는 '전문 교육 위의 교육(super-expert education)'이라 부를 수 있다.

전문가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므로,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것, 사태를 더욱 넓고 깊게 볼 줄 아는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파이데이아라고 저자는 강력히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그리고 훌륭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려 있는 사회를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은 "우리는 민주주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끝맺고 있다. 이념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우리와 고대 아테네인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대인들은 민주주의가 논쟁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어떻게 실행할지 뜨겁게 싸웠다면, 현대인은 논쟁은 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좋다는데 모두가 동의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영역에서, 저자의 말에 백분 동의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의 아이러니를 우리 역시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대의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끊임없이 현재의 정치와 사회상이 겹쳐 보였다. 정당성을 획득한 대표자는 시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당연한 문구를 보며 보며, 과도하게 쌓아올려졌던 차벽과 경이적인 경호 비용을 쓰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또한,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정당과 대표자에 대해서는 비판 자체를 터부시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건한 자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 억제되지 않은 무분별한 권력, 즉 가장 현명한 자조차도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오만해져서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권력을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게끔 고안되었다."

실수를 답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각성으로, 민주주의는 보다 완벽해질 것이다. 무관심과 무지로 점철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는 것과 같을 뿐이다. 저자가 말하듯, 무지와 두려움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머릿수로 상황을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기본적이면서도 오해하기 쉬운 핵심을 적어도 한동안은 떠들고 다닐 것 같다. 토론과 설득은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은 투표뿐이지 않는가, 결국 민주주의는 투표가 전부일 수밖에 없다며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만일, 문명과 멀리 떨어진 세상의 저편에서,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없어서 마시면 얼마 안 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염된 물을 먹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언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처럼, 인륜을 저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당장 답을 알 수 없더라도, 문제를 인정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 역시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은 민주주의 그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그리고 불가능한 이상을 외쳐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말해준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대로, 이상은 이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백번 동의한다. 우리는 영원히 꿈꿔야만 한다.


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 돌베개(2012)


태그:#최초의 민주주의, #폴 우드러프,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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