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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기분이 드는 여강 자전거여행.
 아늑한 기분이 드는 여강 자전거여행.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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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긴 강줄기엔 지역마다 역사와 전설을 품은 강의 별칭이 따로 있다. 부여를 지나는 백마강, 영월의 동강, 무안의 몽탄강, 서울의 한강처럼... 경기도 여주를 품고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는 '여강'이라고 부른다. 옛 선조들은 남한강을 삼등분해 상부를 단강(丹江), 중앙을 여강(驪江), 하단부를 기류(沂流)라고 했단다.

지난 해 개통한 경강선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 이천이나 여주까지 전철을 타고 갈 수 있게 해준다. 여주역에 내려 경기도에서 성남 모란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닷새장이 열리는 여주시장을 지나면 바로 여강이다. 여주시장은 '여주한글시장'으로 간판을 바꿨는데, 시장 상인에게 물어보니 여주에 세종대왕릉이 있어서 바꿨을 거란다.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남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혀왔다. 여말선초 이규보, 이색, 정도전, 서거정 같은 선비들이 여기에서 뱃놀이를 하고 운치 있는 시를 남기면서 유명해졌다. 그런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후손들은 강 주변으로 4개 코스로 된 여강길도 조성하고, 황포돛배를 만들어 운항하고 있다. 황포돛배는 말 그대로 누런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사람과 물자를 수송했던 배다.

남한강은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나무를 싣고 띄운 뗏목이 강을 따라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다고 하여 '나라의 길'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80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오랜 뱃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여강의 운치 있는 정자, 강월헌과 영월루 

'여주한글시장'으로 간판을 바꾼 큰 여주시장.
 '여주한글시장'으로 간판을 바꾼 큰 여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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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돛배 떠다니는 여강.
 황포돛배 떠다니는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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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명한 문인인 목은 이색(1328~96)은 이렇게 노래했다.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天地無涯生有涯)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갈 것인가 (浩然歸志欲何之)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廬江一曲山如畵)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구나 (半似丹靑半似詩)

선비들이 여강을 바라보며 시조를 지었을 곳 가운데 남아있는 곳이 강변 정자 강월헌(江月軒)이다. 무려 7점의 국가보물이 있는 신륵사가 품고 있는 곳이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으로 선정한 오래된 사찰이다. 여러 점의 국가보물 외에도 산속에 자리 잡은 여느 절과 달리 신륵사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여강변에 자리한 운치 있는 절, 신륵사.
 여강변에 자리한 운치 있는 절,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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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또 다른 누각 '영월루'에서 바라본 아늑한 여강.
 강변의 또 다른 누각 '영월루'에서 바라본 아늑한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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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월헌의 강 건너편엔 '마암(馬巖)'이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바윗돌 위에 자리한 누각 영월루(경기도 여주시 상동 136-6)가 있다. 마암 강변에 가로등과 함께 산책로가 나있는데 여주8경 중 2경인 곳이다. 영월루는 전망대처럼 조금 높은 곳에 있어선지 여강 풍경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현지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옛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의 저자이자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은 사람이 살기 좋은 강변마을로 몇 곳을 들었다. 대동강변의 평양과 소양강변의 춘천, 그리고 남한강 줄기인 여강이 흐르고 있는 경기도 여주를 꼽았다. 살 만한 고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맑고 아름다운 강가에 풍요롭고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였다.

우리나라는 동해가 높고 서해가 낮아 물의 유속이 빠르다. 그래서 여울이 많고 소가 발달되어 있다. 여울은 수심이 얕고 빠르게 흐르는 지역이고, 소는 수심이 깊고 물이 고여 있는 곳이다. 여울과 소가 어우러져 있는 강이 환경적으로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남한강은 그런 속성을 지닌 대표적인 강이었다. 장마로 인해 수없이 많은 쓰레기들이 상류에서 떠내려 와도 비가 그치면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만큼 수질이 좋은 물줄기였다.

세종대왕릉이 여강가에 자리한 이유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사이 '왕의 숲길'.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사이 '왕의 숲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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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강변 마을 여주 여강가에 세종대왕릉와 효종대왕릉이 있다. 왕의 능이 있어선지 동네 이름도 능서면 왕대리다. 세종대왕릉이 왜 한양 궁궐에서 먼 이곳 여주에 자리한 걸까 궁금한 마음이 문득 들었다. 세종대왕릉 정문에 들어서면 혼천의, 천평일구, 측우기 등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당시의 업적을 재현한 많은 과학기구를 볼 수 있는 것도 색다르다.

게다가 조선왕릉 최초의 부부합장릉이다. 그래서 능상은 하나이지만 혼유석은 2개가 놓여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1살의 아까운 나이에 죽은 효종대왕릉이 옆에 함께 있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사이에 소나무 숲 울창한 '왕의 숲길'이 나있다.

청신한 기분이 드는 울울창창한 숲길, 나무 하나하나가 저마다 모양이 다르다.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신명나게 어깨춤을 추는 노인 같은 나무, 왕릉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소나무들도 있었다. 왕릉에 오면 소나무의 개성과 미덕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구불구불,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구불구불,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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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문화 해설사 아저씨가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원래 민간인 무덤이 있던 자리였는데 예종 원년(1469)에 헌릉(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세종대왕릉을 이곳으로 옮겼단다. 이유는 당시 지관과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 천하의 명당으로 뽑혀서였다.

이 왕릉 덕분에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됐다는 말이 지관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고. 하지만 왕릉이 옮겨오면서 많은 여주 사람들의 무덤들이 강제 이장돼야 했다. 과거 시험으로 노비에 대한 의견을 묻는 문제를 낼 정도로 애민정신과 백성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많았던 세종은 천릉을 원치 않았을 것 같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을 내려다보는 지세를 갖춘 터가 명당의 기본이라던데, 여강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왕릉이 자리하자 당시 지명이었던 여흥군은 인접해 있던 천령현(川寧縣)과 합쳐져 현재의 이름 여주로 승격된다.

이름이 무색해져 버린 금은모래 강변공원

모래가 사라져버린 금은모래 강변공원.
 모래가 사라져버린 금은모래 강변공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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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가에서 가장 아쉽고 아까운 곳 가운데 하나가 금은모래 강변공원(경기도 여주시 강변유원지길 164)이다. 본래 이름은 금은모래 유원지로, 4대강 개발 후 캠핑장과 산책로가 있는 공원이 되었다. 그러나 달빛과 햇빛에 반사돼 금빛·은빛으로 반짝였다던 85만㎡(25만평)의 넓고 아름다운 강변 모래사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옛 시절을 기억하는지 모래사장이 있었던 산책로에 노랑부리 백로들이 찾아와 거닐고 있었다. 준설한 모래는 인근 공터에 산처럼 쌓아 놓았지만, 더 이상 금은모래가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태그:#남한강 , #여강, #여주여행, #세종대왕릉,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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