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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따라 섬이 다섯 개로 보이는 날도 있고 여섯 개로 보이는 날도 있다고 해서 '오륙도'라는 이름을 얻은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는 임진왜란의 산 증인이다. 1592년 4월 쳐들어 올 때에도, 1598년 11월 철수할 때에도 일본군은 오륙도 옆을 지났다. 지금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 수군이 부산포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7년 동안이나 지켜보아야 했던 섬이 바로 오륙도인 것이다.
▲ 오륙도 날씨에 따라 섬이 다섯 개로 보이는 날도 있고 여섯 개로 보이는 날도 있다고 해서 '오륙도'라는 이름을 얻은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는 임진왜란의 산 증인이다. 1592년 4월 쳐들어 올 때에도, 1598년 11월 철수할 때에도 일본군은 오륙도 옆을 지났다. 지금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 수군이 부산포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7년 동안이나 지켜보아야 했던 섬이 바로 오륙도인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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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앞바다에는 오륙도가 있다. 오륙도는 날씨에 따라 섬이 다섯 개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섯 개로 보이기도 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오륙도로 가는 배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957-8 '해운대 유람선'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섬에 내려주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배를 타면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서 오륙도를 한 바퀴 도는 유람을 즐길 수 있다. 부두에서 출발할 때부터 따라오던 갈매기들도 오륙도 가까이 가면 대부분 사라진다. 오륙도가 생각보다는 더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오륙도 옆으로 보이는 부산포 원경. 부산포에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 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륙도 옆으로 보이는 부산포 원경. 부산포에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 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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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오륙도

유람선을 탄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사방에서 오륙도를 감상한다. 하지만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이곳은 지금처럼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1592년 4월 일본군은 오륙도를 지나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1598년 11월 부대별로 뿔뿔이 제 나라로 철수할 때에도 오륙도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륙도는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보았다. 이순신도 보지 못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날 풍경까지도.

조선통신사 역사관
 조선통신사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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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무관 황진 등으로 구성된 통신사는 1590년 3월 출발하여 일본에 들어갔다가 1591년 1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통신사 역시 오륙도 옆을 지나다녔다. 이들은 영가대(부산시 동구 범일동 326-36 조선통신사역사관 앞)에서 출국하고 귀국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선조수정실록> 1590년 3월 1일자에 통신사가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출발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 해 뒤인 1591년 3월 1일자에는 통신사 정사 황윤길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고 보고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선조 앞에 도착한 부사 김성일은 '쥐새끼처럼 생긴 풍신수길은 전쟁을 일으킬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하고 황윤길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말한다. 이 두 날짜는 모두 음력이지만 1919년 기미독립만세일과 3월 1일이라는 점에서는 우연히도 똑 같다.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그리고 돌아왔을 때 행사가 펼쳐졌던 영가대는 바다에 인접해 있었다. 지금은 영가대 일대가 땅으로 변했지만...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그리고 돌아왔을 때 행사가 펼쳐졌던 영가대는 바다에 인접해 있었다. 지금은 영가대 일대가 땅으로 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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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권 세력은 동인이었다. 동인 집권층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무관 황진은 같은 동인이었지만 풍신수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황진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사가지고 귀국하면서 '내가 이 칼로 왜적들을 죽이겠다'라고 말한 인물이다. 그는 이치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2차 진주성 싸움 때 전사한다.

초량동 1148에 세워져 있는 정발 장군 동상
 초량동 1148에 세워져 있는 정발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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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6시경 부산 앞바다를 가득 메웠던 일본 침략군은 14일 아침 짙은 안개로 가득찬 해안으로 밀려온다. 1만 8000명이나 되는 적군은 금세 부산진성을 에워쌌다.

백성들까지 모두 합해도 1000명에 지나지 않았던 아군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 마흔밖에 안 된 부산진 첨사 정발은 끝까지 분투했지만 마침내 전사했고, 곁에서 돕던 첩 애향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의 길을 갔다.

정발 곁에서 충실한 참모 역할을 했던 이름 높은 선비 이정헌도 칼을 휘두르던 끝에 순절했고, 정발의 종 용월도 주인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분개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전사했다.

아들의 순절 소식을 들은 정발의 노모는 울음 끝에 절명했다. 일본군은 부산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학살했다. 군신(軍神)에게 제사를 지낸다면서 개와 고양이까지 다 죽였다.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이는 일본군

후대인들은 부산 동구 좌천동 473에 정공단(鄭公壇)을 차렸다. 단은 묘소 없이 제사를 지내는 시설을 말한다. 후대인들은 1766년(영조 42)에 조성한 이 제단에 정발만이 아니라 이정헌, 애향, 용월은 물론 이름 없이 숨져 간 선열들을 모두 모셨다. 정공단 경내에는 1761년(영조 37)에 세워진 '충장공 정발 전망(戰亡, 전쟁에서 죽음)비'도 있다.

부산진성을 무너뜨린 왜적은 다음날인 4월 15일 동래성으로 몰려갔다. (계속)

'충장공 정발 전망(전쟁에서 죽음)비'와 비각이 정공단 외삼문 옆에 세워져 있다.
 '충장공 정발 전망(전쟁에서 죽음)비'와 비각이 정공단 외삼문 옆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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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가대, #정발, #통신사, #이정헌,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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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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