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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갈라타 다리 위에서 바라본 에미뇌뉘 선착장.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인파로 늘 붐비는 이곳은 멋진 풍경과 낭만을 선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바라본 에미뇌뉘 선착장.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인파로 늘 붐비는 이곳은 멋진 풍경과 낭만을 선사하는 곳이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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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세계를 하나의 상권으로 가정하고서 지도를 펼쳐 놓고 가장 목 좋은 곳을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이스탄불을 지목하게 될 것입니다. 

대륙과 대륙이 만나는 곳,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곳, 종교와 종교가 만나는 곳.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제국(동로마)의 천백년 수도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제국의 5백년 수도였던 이곳은 실크로드의 중심축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미뇌뉘 선착장은 이스탄불을 여행자의 도시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사이에 두고 아시아 지구와 유럽 지구를 오가는 여객선과 페리를 타려는 인파로 늘 북새통입니다. 터키의 실업률을 가늠할 수 있다는 갈라타 다리의 강태공들과 다리 밑에서 고등어 케밥 굽는 냄새는 구수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냅니다.

검은색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과 다양한 색상의 히잡으로 멋을 낸 여성들, 그리고 이슬람식 복장을 하지 않은 여성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도 신선한 풍경입니다. 가족 중에 한국전 참전 용사가 있으며 김치와 소주를 좋아한다는 레퍼토리를 똑같이 구사하며 접근하는 갈라타 다리의 사기꾼들까지. 번잡함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는 이스탄불의 매력이었습니다.

다양한 옷차림의 여성들을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다양한 옷차림의 여성들을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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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다섯 번, 이슬람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 '아잔'.

'알라는 위대하다…  인생은 짧으니 어서 기도하러 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잔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집니다. 모스크마다 개별적으로 틀기 때문에 마치 도시 전체가 돌림노래 합창을 하는 듯합니다. 모스크를 바라보며 유럽 기독교 문명권을 너머 이슬람 국가에 와있음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잠재돼 있던 나의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슬람=여성차별', '이슬람=폭력'이 공식처럼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히잡을 쓴 채로 담배를 입에 물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 차도르를 입고 남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여성의 모습은 이런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립니다. 터키 여성들의 이슬람 복장 착용은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이고 히잡은 하나의 패션처럼 보였습니다.

터키는 1923년 근대 국가로 출범하면서부터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였고, 요즘은 남편이 부인의 성(姓)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터키 뿐만 아니라 부토 수상을 배출한 파키스탄도 이슬람 국가요, 우리나라 보다 먼저 여성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던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도 이슬람 국가임을 상기해보면, 이슬람이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짓고 있었던 무지를 깨닫습니다.

물론 여성에 대해 차별을 가하는 전근대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슬람 전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별적인 국가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이 옳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를 믿는 나라 중에 여성 차별적인 정책과 문화가 존재한다고 하여 그 종교와 문명 자체를 비난하지 않듯이, 이슬람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문구가 내포하는 이슬람의 폭력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탄불의 옛 이름 콘스탄티노플로 비잔틴제국의 천년 영광을 함께 했던 도시는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무너집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통상적으로 행해진 정복 후 3일을 제외하고는 도시를 약탈하지 않았고, 이곳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은 물론이요 유대교인들까지도 세금만 성실히 납부하면 그들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오히려 세수 감소를 우려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비단 이스탄불의 사례뿐만 아니라 이슬람 정복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역사적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폭력으로 교세를 확장했다는 느낌을 주는 저 문구가 얼마나 서구 중심적인 표현이요 왜곡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라는 기치 하에 자행되고 있는 현재의 테러를 비롯하여, 인류 역사를 통해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전쟁과 테러는 그 종교가 가진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이런 점을 간과한 채 '이슬람이 문제야', '기독교가 문제야' 하는 식으로 문제를 단순화하고 낙인 찍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편견을 조장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톱카프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 왼편이 유럽지구, 오른편이 아시아지구
 톱카프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 왼편이 유럽지구, 오른편이 아시아지구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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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나 지하철과 똑같은 대중교통 체계로 운항하는 여객선 선착장이 유럽과 아시아 지구에 여러 곳 있었습니다. 천원도 안 되는 요금으로 바다를 건너 대륙을 오가는 체험은 흥미로웠습니다.

나는 이스탄불을 먼저 '경계에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여객선을 타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오고 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아시아 지구의 선착장에서는 페르시아, 오스만, 이슬람 등 동양의 시선으로 유럽땅을 바라보고, 유럽 지구의 선착장에서는 그리스, 로마, 기독교 등 서양의 시선으로 아시아땅을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상상력을 발휘해보지만, 배를 타고 건너도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 지척의 땅은 달리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대륙간 이동이라는 의미 부여에 설레던 마음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무뎌졌습니다. 

바꾸어 보고, 자주 보면,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옅어지는 것이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애당초 경계란 사람들 마음의 문제일 뿐 바다와 땅은 나뉘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천장에는 기독교 성화와 이슬람 문양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천장에는 기독교 성화와 이슬람 문양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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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스탄불을 '경계 안에서' 혹은 '경계 너머로'도 보고 싶었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갔습니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을 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성 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온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60년 처음 건립하였다가 두 번의 소실을 거쳐 53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정교회가 바티칸과 갈라선 이후에는 사실상 정교회의 본당 역할을 했습니다.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제국이 함락되면서 성당은 파괴될 운명에 놓였지만,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정복 이후 바로 성당 파괴를 금지하고 이곳을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이후 건물은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부터는 일체의 종교행위를 금한 채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면서 당연히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성화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오스만제국 사람들은 성화를 긁어내지 않고 언제든 벗겨낼 수 있는 회반죽 칠을 해서 성화를 가렸던 것이었습니다. 

박물관 내부에서 돔 천장을 올려다 보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화가 있고, 오른편에는 알라를 의미하는 문양이 왼편에는 선지자 무함마드를 나타내는 문양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다투어왔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는 두 종교의 극적인 공존의 모습과 더불어 이슬람의 관용이 돋보이는 스토리가 지금도 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끌어 들이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오면 술탄 아흐메트 광장을 사이에 두고 푸른빛이 감도는 모스크를 볼 수 있습니다. 일명 '블루 모스크'로 불리는 이 건물의 공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자미'이고 1611년에 세워져 현재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광장에 서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번갈아 바라봅니다. 천년이라는 시차와 종교라는 간극을 넘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사원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이스탄불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짓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북쪽으로는 흑해에 이르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지중해에 닿는 바다입니다. 짙은 푸른색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가치 있는 지역은 끊임없이 전쟁과 다툼이 이어져왔기에 기구한 운명을 가진 땅이라고 비유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무심히 흐르는 보스포러스의 물길을 바라보니, 정작 불쌍한 것은 땅이 아니라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쪽빛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온 인간의 무지와 탐욕, 오만을 반성하게 됩니다.

시장에서 만난 터키 상인들.  터키는 '형제의 나라' 한국에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시장에서 만난 터키 상인들. 터키는 '형제의 나라' 한국에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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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들은 여행을 하며 만난 그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친절했습니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주고 환영의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형제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한국과 터키와의 친밀한 관계는 두 가지 인연에 기대고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는 한국전쟁 파병의 인연이요, 다른 하나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항하던 오래 전의 인연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족 왕조들이 두려워했던 북방 유목민족 '돌궐'이 바로 투르크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한때는 몽골과 만주, 러시아 남부까지 영역을 넓혔던 돌궐은 8세기 중엽 세력이 약화되면서 당나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터전을 잃고 밀리고 밀리던 돌궐은 당시 중동과 서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치던 이슬람 왕국인 압바스의 도움을 받아 멸족의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돌궐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고 힘을 키워가며 1037년에는 셀주크 투르크,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를 세웠고, 오스만 시절에는 이슬람 세계를 주도하는 대제국의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다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가, 1923년에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의 기치 하에 현재의 터키공화국으로 출범했습니다. 

한 때는 우리 옆에 살았던 사람들이 1천년의 시간과 8천km의 공간을 너머 지금은 아시아와 유럽의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터키 역사는 대이주의 드라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뜨거운 이슈는 이민·난민 문제입니다. 이민은 자발적인 이동이고, 난민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를 피해 피난처를 찾아 떠난다는 개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현재의 땅에서 도저히 살기 어려워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다는 면에서 같은 범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유럽여행 중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주요 대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목격했던 것은 인구 구성의 변화였습니다. 무슬림, 흑인, 아랍계, 동양계 사람들의 비율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고, 백인 만의 유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유색인종과 비기독교인의 비율이 많아지면서 경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뜨거운 감자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의 변화나 기근, 정치적 불안과 전쟁이 지속되면, '앉아서 죽느니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사람들은 터전을 떠나갔습니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이주는 지구촌의 역사를 바꾸어왔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민·난민 문제는 유럽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선거를 좌우하는 핵심 이슈가 된지 오래이고, 이주노동자와 탈북새터민 등 이제는 우리도 깊이 고민해야 할 성질의 문제입니다. 

왼편이 아야소피아, 오른편이 블루모스크. 두 건축물은 서로 마주보며 이스탄불의 밤을 아름답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왼편이 아야소피아, 오른편이 블루모스크. 두 건축물은 서로 마주보며 이스탄불의 밤을 아름답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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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은 단지 장벽의 건너편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한없이 왜소하게 만드는 굴레입니다."

언젠가 당신(신영복 교수)은 이스탄불을 둘러보고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술탄 마호메트 2세가 어떤 의도로 성당의 파괴를 금지하고 성화를 지워내지 않았는지, 그 선택에 깔린 의도를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차이 보다는 같음을 더 많이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다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원이라는 공통점, 수많은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진 돔에 담겨 있는 간절한 정성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장벽에 갇히지 않고 경계 너머로 빠져 나올 수 있었고, 그 선택이 공존과 관용이라는 미담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공존. 말은 참 쉽지만 실천은 너무 어렵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틀리다'라는 생각, 틀리면 죽여도 되고 파괴해도 된다는 닫힌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스탄불이 남긴 역사적 유산이 현재 인류가 당면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답이 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수준에서 무지와 편견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실마리는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야소피아는 지혜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스탄불, #아야소피아, #콘스탄티노플, #공존, #보스포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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