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산범>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장산범>

영화 <장산범> 포스터 ⓒ (주)NEW


한국에서 장르 영화가 소실된 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스크린 독과점과 수직 계열 등의 거대 이슈들은 일단 차치하고도, 한국 영화의 장르가 비리 장르와 사극으로 이분화 된 것에 업계 사람들이든, 관객들이든 익숙해 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위협적이고 소름 끼치는 일이다.

공포영화는 이런 기형적인 토양에서 멸종해버린 안타까운 장르 중 하나다. 한국 영화가 공포영화 (K-Horror)로 대표되던 시기가 있었다. 1998년 개봉한 <여고괴담>의 엄청난 흥행을 시작으로 많은 수의 공포영화들이 제작되고 2003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 한국과 해외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이른바 '한국형 공포 영화'가 세계적인 시장을 확보하게 된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여름 극장가는 공포 영화로 넘쳐났다. 돈 되는 영화들이 그러 하듯, 히트 쳤던 공포영화들이 2탄, 3탄의 후속편들을 양성해냈다.

아쉽게도 K-호러의 위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장르의 언어들이 변주가 아닌 단순 반복되고 자기 복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당시 부상하던 사극이나 고예산 영화들에 의해 잠식된다. 이후 <요가학원>(2009),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2011), <미확인 동영상>(2012) 등 순수 '공포영화(스릴러와 미스터리를 제외한)'들이 드문드문 만들어 지긴 했으나 90년대의 아성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납량 특집' 공포 영화 하나 못보고 또 한 해를 보내는가 했던 올해, <장산범>이라는 공포영화가 개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대성공이다. 지난 십여 년 간 한국 영화에서 멸종하다시피 했던 공포 장르의 네크로멘서(necromancer: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주술사; 강령술사) 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장산범>

▲ 영화 <장산범> 희연은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아온 것처럼 몸에 피멍이 가득한 이 소녀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키우게 된다. ⓒ (주)NEW


한국 공포영화의 부활, <장산범>

<장산범>은 아들을 잃은 한 가족이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장산'이라는 외딴 공간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엄마, 희연(염정아 분)은 어느 날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던 마을 아이들에 의해 집 주변에 동굴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동굴에서는 사람 목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희연이 동굴의 이상한 힘을 알게 된 직후, 한 길 잃은 소녀가 그녀의 집으로 찾아온다. 희연은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아온 것처럼 몸에 피멍이 가득한 이 소녀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키우게 된다.

영화의 전반부는 장산동굴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집으로 들어 오게 된 소녀를 그리는 데 할애 된다. 그리고 러닝타임 1시간 여부터 시작되는 본격적 호러는 노모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소녀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전개 된다.

<장산범>은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사람을 홀린다는 '장산범 괴담'–호랑이로 변장한 요괴-을 토대로 한 영화다. 한국 남부 지방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출처가 불분명하고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어 목숨을 꾀어 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의 민담 설화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소재이다. 예를 들어, 인도와 에티오피아에 내려오는 전설의 '크로코타(crocotta)'라는 짐승 역시 사람의 목소리를 모사하는 동물이며 그들의 말에 반응하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출처: Strabo, Geographica, XVI.4.16.).

그러므로 <장산범>의 괄목한 만한 점은, 소재의 특이성 만은 아니다. 이런 유니버설한 요괴 설화에 어떤 탄생사 (誕生社)를 입히고 그가 발현하는 악(惡)의 과녁을 어디로 맞출지 등은 오롯이 창작자의 고뇌다. 그런 점에서 <장산범>은 '악'의 구체화(configurization)와 고통 받는 자, 즉 주인공 서사의 아귀를 신통하게 물린다.

 영화 <장산범>

▲ 영화 <장산범> <장산범>의 괄목한 만한 점은, 소재의 특이성 만은 아니다. ⓒ (주)NEW


소재의 특이성, 뛰어난 연기... 그것만으로도 기특하다

가령, '장산범'의 영혼은 장산으로 신을 받으러 온, 별로 영험하지 않은 무당의 육체로 들어간다. 그는 본인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갖고자 하는 탐욕으로, 자진해서 악의 수하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인 희연 역시 이미 죽은 것이 확실한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노모까지 희생시켜 장산으로 들어오게 되는 인물이고, 무당의 딸, 즉 귀신임을 알면서도 소녀를 거두는 것은 그녀가 차마 묻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을 안위하기 위한 자기 연민의 기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장산범'이라는 악마는 인간성(人間性)에 기거하는 악의 두 축, 탐욕과 집착을 매개하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의 도플갱어 같은 존재인 것이다. 영화는 도플갱어의 모티프를 '거울' 이라는 소품을 이용해 전달한다. 장산범은 거울 안에 사는 존재로 그려지며, 그의 목소리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인물들은 거울에 테이프를 감아 놓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영화 <장산범>

▲ 영화 <장산범> 영화는 도플갱어의 모티프를 '거울' 이라는 소품을 이용해 전달한다. 장산범은 거울 안에 사는 존재로 그려지며, 그의 목소리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인물들은 거울에 테이프를 감아 놓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 (주)NEW


그 외에 배우들의 호연, 특히 염정아의 연기는 늘 그렇듯 기대 이상이다. <장화, 홍련>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표독스러운 연기는 '악덕 계모'(특히 공포물에서)의 전형(prototype)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장산범>에서 희연은 어쩌면 '계모' 캐릭터 반대 선상에 서있다. 그녀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잠식당한 인물이다. 아들에 대한 그녀의 모성은 악마의 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그로 인해 희생된다. 그녀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는 희연이 그리는 엄마가 아들을 그리워하기만 하는 수동적 모성이 아닌, 그로 인해 인생이 침몰해 가는, 급기야 죽음을 택하게 되는 역설적 모성을 과하지 않게 담담히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산범>은 무결(無缺)한 영화는 아니다. 악의 존재를 가장 먼저 증상적으로 감지하는 노모는 오프닝에 잠깐 등장했다가 별 설명 없이 40분이 지나서야 다시 등장한다. 100분여의 러닝타임과 노모 캐릭터의 내러티브적 기능을 고려했을 때, 너무나도 긴 부재다. 또한 오프닝 크레디트 전 에 등장하는 강렬한 살인사건의 동기 역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왜 그는 그녀를 죽여야만 했는지, 그녀는 누구인지 모두 장산범의 '목소리'로만 추측해야 한다. 이렇듯 영화는 관객의 추리, 혹은 타협적 시선으로 내러티브를 매워야 하는 구석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내는 서스펜스와 설정, 그리고 배우의 호연이 이 단점들을 작아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만들어진 '납량특집' 영화 한 편이 귀환한 것 같아 반갑고,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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