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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우리에게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고,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이 가운데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최대 항구도시로 꼽힌다. 무역과 교통, 어업, 군사기지 등 다방면의 기능을 갖췄다. 러시아 혁명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20세기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이 발달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물자가 유통됐다. 도시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1903년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대륙의 경계를 허무는 교통도시로 발돋움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이곳은 낯설지 않다. 고려인의 삶과 죽음이 기록되어 있고,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연해주의 중심도시다.

민족의 한이 녹아든 혁명광장

혁명광장에는 시선을 끄는 다양한 동상들이 자리해 있다.
 혁명광장에는 시선을 끄는 다양한 동상들이 자리해 있다.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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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정으로 러이사 혁명사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혁명광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1917년 3월 레닌의 사회주의혁명을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한국에는 부패한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촛불혁명이 있다면 러시아는 100년 전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1세기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을 바꿔보자'는 두 사건의 궁극적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또 이곳은 1937년 강제 이주를 위해 고려인들을 집합시켜 열차에 태웠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스탈린의 가혹한 분리, 차별정책으로 고려인들은 숙청될 위기에 놓였다. 인원만 17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유대인과 함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추방됐다. 이 과정에서 굶주림으로 1만 명이 숨졌고, 이중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황무지를 개척하는 등 끈질긴 생존력을 보였다.

혁명광장 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는 모습.
 혁명광장 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는 모습.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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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라는 붉은 피와 민족의 한이 녹아든 곳이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의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매주 금요일마다 장이 열리는 혁명 광장시장은 우리나라의 '야시장'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싼 가격으로 생필품과 먹거리를 구매할 수 있다. 신년행사와 기념일 축제 등 각종 이벤트의 무대로도 이용된다. 광장 곳곳에는 "맛있어요", "싸요 싸요"라는 서툰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관광객이 많아졌고, 북한 주민들이 간혹 장사를 하면서 한국어가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보다

잠수함 박물관 전경.
 잠수함 박물관 전경.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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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관광지에 가면 꼭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동상과 군사시설이 그것이다. 유명인을 기리고, 총과 칼을 보존하는 것은 전 세계의 공통 의례인 듯하다. 혁명광장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잠수함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전쟁 당시 실제 사용된 이 잠수함은 공식 이름이 C-56으로 독일 군함 10개를 격침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참고로 C는 러시아어로 '에스'라고 읽으며, 군사 용어로 '중형급'이라는 뜻이다. 살상력이 높은 대포와 지뢰 등을 보유한 이 잠수함은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잠수함 박물관 내부 모습.
 잠수함 박물관 내부 모습.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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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전쟁 승리 30주년을 맞아 박물관으로 탈바꿈 돼 손님을 반기고 있다. 100루블(한화 1800원)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내부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쓰였던 각종 무기와 장비들이 전시돼 있고, 곳곳에는 선실과 기관실, 조타실 등이 보존돼 전쟁의 현실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당시 잠수함에는 케케한 화학약품 냄새와 높은 습도, 정화되지 않은 공기 탓에 승무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살기 위해선 적과 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부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심을 훤히 볼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

해가 지기 전 황급히 독수리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망대라고 해서 부담가질 필요는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하지만 계단을 이용하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나이지긋한 어르신들도 미소를 머금고 갈 정도다.  

혁명과 전쟁의 모습을 간직한 블라디보스톡이지만 외부인들에게 독수리 전망대는 영락없는 관광명소로 통한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추억을 만들었다. 30도가 웃도는 무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이곳은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탁 트인 시야로 시내 구석구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본 금각교.
 독수리 전망대에서 본 금각교.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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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건 세계 최장 사장교로 불리는 금각교다. 지난 2012년 8월 개통된 이 다리는 전체 길이가 2.1km밖에 되지 않지만 과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사장교는 다리 위에 세운 교탑에서 비스듬히 내린 케이블로 다리 구조물을 매단 형태의 교량을 말한다. 경제적이고 도시 미관에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다. 현재 사장교는 과학기술로 1km도 겨우 만들 정도라고 하니 금각교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러시아의 과학기술을 살펴봤다면 인문학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전망대 꼭대기에는 사이좋아 보이는 두 남성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주인공은 러시아 글 키릴 문자의 기원인 '글라골 문자'를 만든 키릴로스와 메소디오스 형제다.  

서울 광화문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져 있듯 이곳에도 두 사람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남북 평화 철도를 기원하다

블라디보스톡역에 있는 증기기관차 모형.
 블라디보스톡역에 있는 증기기관차 모형.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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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마지막 행선지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시작되는 블라디보스톡 중앙역을 찾았다. '대륙을 횡단한다'는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담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까지 가는 여정은 9288㎞로 7박 8일동안 이어진다. 단일 철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동아시아부터 북유럽과 동유럽, 서유럽을 넘나들며 세계 물류 시장의 젖줄이 되고 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한국의 물류시장은 어떻게 변화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이 철도의 경제적 번영은 엄청나다는 의미다.

블라디보스톡역에 정차중인 기차
 블라디보스톡역에 정차중인 기차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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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우리에게 멀리만 느껴진다. 남북관계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와 철도를 잇는 사업은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분단의 아픔을 유럽에서 느낄 줄 누가 알았을까. 하루 빨리 남북통일을 바랄 뿐이다.

80년 전 고려인이 이곳에서 강제 이주당한 수모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와 유럽을 잇는 철도가 개통된 모습을 보고싶다.


태그:#러시아블라디보스톡, #연해주, #독수리 전망대, #잠수함 박물관,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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