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티베트 불교 최대 대법회가 열리는 라다크로 떠나는 티베트 사람들.
 티베트 불교 최대 대법회가 열리는 라다크로 떠나는 티베트 사람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티베트 청년들이 숙소 앞마당에서 티베트 국기와 '프리 티베트'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이 매달린 모터사이클을 손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넸더니 곱상하게 생긴 한 청년이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코리아요"
"노오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나는 노오스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밀며 반갑다 했다니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 대신 나를 와락 껴안는다. 나는 그에게 "프리 티베트"를 큰 소리로 말했더니 그와 함께 옆에 있던 친구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는다.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속해 있는 데라둔에서 모터사이클을 몰고 왔다는 티베트 청년들, 그들은 라다크(헬레나 노르베리의 저서 <오래된 미래 라다크>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로 떠나기에 앞서 파드마 삼바바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이곳 리왈샤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며 나에게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아직 정해놓은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라다크로 가시죠. 조만간 라다크에서 큰 법회가 있습니다."
"어떤 법회 입니까?"
"칼라차크라!"
"칼라차크라요?"

그들은 내게 칼라차크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나는 그들의 말뜻을 잘 이해 할 수 없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인데 칼라차크라는 범어인 시간(kala)과 바퀴(cakra)를 합성한 말로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칼라차크라는 가장 빠르게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수행법이라고 전해져오고 있다.

인도 각지는 물론이고 때로는 유럽과 미국 캐나다에서도 열리기도 했던 칼라차크라는 티베트 불교의 최대 법회라고 한다. 이번에는 7월 초순부터 보름 동안 라다크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하여 칼라 차크라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물론이고 네팔의 티베트 불교신도들에 이르기까지 라다크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까?"
"20만명? 아마 그 이상 모이게 될 것입니다."

라다크에서 열리는 칼라차크라 법회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나선 티베트 사람들 중에는 더러 이곳 리왈샤에서 마음을 다스려 가며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라다크로 가기 위해서는 마날리를 거쳐 가야 하는데 그 시발점이 바로 이곳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리왈샤라 할 수 있었다.


옷 두벌을 번가라 입고 다녔기에 무릎 부분이 닳고 닳아 쩍 벌어졌다
 옷 두벌을 번가라 입고 다녔기에 무릎 부분이 닳고 닳아 쩍 벌어졌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리왈샤 마을의 옷 수선집 중년 사내가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냐’고 물었다.
 리왈샤 마을의 옷 수선집 중년 사내가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냐’고 물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4개월간 떠돌았더니, 옷들이 다 해졌다

라다크로 떠날까?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가능한 피해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 어쨌든 일주일 넘게 머물었던 리왈샤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다. 떠나기 전에 옷을 수선하기로 했다. 배낭 속에는 두 벌의 옷이 전부였다. 4개월 가까이 인도와 네팔을 떠돌아다니며 입었던 그 옷들이 다 해져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다람살라에서도 재봉질을 했는데 이번에는 바지의 무릎 부분이 닳고 닳아 쩍 갈라졌다.

바지를 새로 살까 하다가 수선 집을 찾아 나섰다. 리왈샤 마을에는 옷 수선집이 여러 곳 있었다. 처음 찾아간 곳에서는 다 닳아 버려야 할 것 같다며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찾아간 수선 집의 나이든 중년 사내는 내 몰골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바지를 건네주며 거듭 '나마스테'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긴 수염에 봉두난발의 내 몰골을 안경 너머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 아닙니까? 그냥 옷을 사 입지요."
"아닙니다. 아직 입을 만합니다."

그에게 한국에서도 나는 팬티에 이르기까지 다 떨어질 때까지 옷을 입고 다닌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버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해진 옷을 살펴보며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도 이런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드륵드륵 재봉질을 한다.

새 옷과 헌옷은 입거나 입지 않거나에 따라 분류가 된다. 사실 옷가게 진열대에 걸려 있는 새 옷은 쓸모가 없다. 옷가게 진열대에서 내려와 주인을 만나는 순간 쓸모 있는 옷이 된다. 그 어떤 새 옷도 하루를 입었건 1년을 입었건 입는 순간부터 헌옷이 된다. 내게 옷은 몸을 가리거나 혹은 날씨에 따라 몸을 보호하거나 하는, 편리성을 위한 쓸모 있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더구나 최대한 짐을 가볍게 꾸려야 하는 배낭 여행길이었기에 갈아입을 옷 한 벌이면 충분했다.

재봉질을 마친 중년 사내가 다람살라에서처럼 우리 돈으로 100원도 채 안 되는 단돈 5루피만 달라고 한다. 그렇게 나는 단돈 5루피로 바지 하나를 얻었다. 버려야 할 것을 수선했으니 그로부터 새로운 바지를 5루피에 새로 산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0루피를 건넸더니 5루피를 거슬러 주며 그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수행자입니까?"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인도 여행길에서도 반거충이였다. 한국에서 10여 년 동안 농사일을 해가며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반거충이로 밥벌이를 해왔듯이 인도에서도 여행자와 수행자를 오락가락하는 반거충이었다. 아니 여행자도 수행자도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딱히 목적지도 없이 끈 풀린 개처럼 인연 닳는 대로 길 떠나는 떠돌이에 불과했다.

 리왈샤에서 자주 이용했던 식당에서 일하는 꼬마 아이.
 리왈샤에서 자주 이용했던 식당에서 일하는 꼬마 아이.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리왈샤 뿐만 아니라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만두종류인 모모와 함께 주식으로 먹었던 자오민.
 리왈샤 뿐만 아니라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만두종류인 모모와 함께 주식으로 먹었던 자오민.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리왈샤에 와서 거의 매일 한 끼를 해결한 작은 식당에는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식당 일을 돕고 있는 꼬마 아이가 빙그레 웃으며 반겼다. 사실 식사도 식사였지만 일주일 넘게 정든 녀석과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녀석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만두 종류인 모모를 만들기 위한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올해 열두 살이라는 녀석은 1년 6개월 째 이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여행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아주 짧은 영어를 알아들었다.

"네가 직접 모모를 만들 수 있니?"
"그럼요. 얼마든지."
"오늘은 자오민을 먹고 싶은데..."
"잠깐 기다리세요. 자오민도 요리할 수 있어요."

녀석은 이곳 리왈샤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식당 주인 말에 의하면 녀석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 학교에 갈만한 형편이 못된다고 한다. 식당일로 번 돈을 가난한 가족들에게 꼬박꼬박 부쳐 주고 있다는 착실한 아이라는 것이다.

"너는 집에 언제 가니?"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씩 다녀와요. 집이 멀리에 있어요."

면과 양파에 다양한 향신료를 첨가한 자오민 요리를 만들고 있는 녀석의 표정이 흥겨워 보였다.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녀석은 부지런히 요리를 배워 훗날 이런 작은 식당을 꾸리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끝에서 나온 자오민을 맛있게 다 먹고 나서 식비와 함께 값싼 바지 한 벌 값에 해당하는 루피 용돈으로 쥐여 줬다. 녀석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본다. 나는 녀석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밀가루 묻은 꼬질꼬질한 녀석의 낡은 바지를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오늘 바지를 사려고 했는데 바지 한 벌이 거저 생겼단다. 네가 그 돈으로 바지를 사 입었으면 좋겠다."
"나마스테, 고맙습니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맙다며 '나마스테' 인사를 건넸다.

"네가 맛있는 요리를 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난다.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언제 다시 오나요?"
"그것은 나도 모른다."
"어디로 가나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반죽대 앞에서 부지런히 모모를 만들고 있는 녀석을 뒤로 하고 리왈샤 호수 주변을 걸었다. 배를 채워서 그런지 아니면 녀석의 밝은 표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볍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짜이를 마시다가 만난 티베트 사람들이 히말라야 오지 스피티를 추천했다.
 짜이를 마시다가 만난 티베트 사람들이 히말라야 오지 스피티를 추천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미지의 땅을 목적지로 정하다

호수 주변에 자리한 힌두사원 부근에는 식당을 겸하고 있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가끔씩 인도 전통 차, 짜이를 마시곤 했다. 짜이를 시켜 놓고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일행들과 함께 짜이를 마시던 한 여성이 밝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일본 사람입니까?"
"아니요. 한국 사람인데 당신들은 티베트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들 모두 라다크로 가려고 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당신도 라다크로 갑니까?"
"아니요. 라다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히말라야 깊숙한 곳으로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스피티가 당신이 원하는 곳 같네요."

이들의 말에 의하면 라다크 보다 스피티라는 곳이 더 오지라고 한다. 내가 그곳에 가고 싶다 말했더니 가는 길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스피티로 가려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7월로 접어 든 지금쯤이면 눈이 녹아 길이 열려 있겠지만 만에 하나 산사태로 버스길이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나는 그런 곳으로 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피티라는 생전처음 들어보는 미지의 땅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평균 고도 3000미터가 훨씬 넘는다는 곳,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친절한 미소의 티베트 사람들에게 재차 스피티 가는 길을 물어 꼼꼼히 메모했다.

스피티로 가려면 마날리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이곳 리왈샤에서 마날리 가는 버스는 이른 아침에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숙소 관리소가 문을 열지 않는다. 숙소 관리실을 찾아가 일주일간 머물렀던 숙비를 지불하고 비상금으로 꽁꽁 숨겨 놓았던 미화 100달러짜리 지폐를 루피를 환전했다.

숙소 관리실은 먹을거리와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념품과 먹을거리는 저렴한 식당을 이용하는 내게 부담이 되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매니저는 저렴한 숙소에서 일주일 내내 머물면서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주지 않아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나는 그의 마음을 감지하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켜 진하게 마셨다.

모터 사이클을 타고 라다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티베트 청년들.
 모터 사이클을 타고 라다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티베트 청년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이른 아침, 전날 밤 미리 싸 놓은 배낭을 들쳐 매고 숙소를 빠져 나오는데 모터 싸이클을 타고 온 티베트 청년들이 라다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낭을 들쳐 매고 나오는 나를 보고 한 청년이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목적지를 정했습니까?"
"스피티로 가기로 했습니다."
"라다크도 좋지만 스피티, 거기도 아주 좋은 곳입니다. 잘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리왈샤에서 버스를 타고 마날리에 도착했을 때 스피티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과정에서 산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었다. 버스 주차장 매표소 사람의 말에 의하면 길이 뚫리는 대로 버스가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흘이 될지 일주일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왈샤에서 스피티라는 오지를 알려줬던 티베트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히말라야 깊숙한 곳, 스피티와 라다크 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마날리. 마냥 마날리에서 목 빠지게 스피티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외국인과 현지인 관광객들로 즐비한 마날리는 혼잡했다. 나는 이곳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한다 말인가.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무거운 배낭을 들쳐 맨 채 마날리 버스 터미널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왔다.

"리왈샤에서 오셨죠?."
"예, 그런데요?"
"호수 주변에서 명상을 하거나 산책하는 당신을 여러 차례 봤습니다."
"아, 나도 기억납니다. 당신은 운동장에서 시크교 사람들하고 축구를 했었지요?."
"예 맞습니다. 우리 가족은 지금 라다크에 가려 합니다. 당신도 그곳에 갑니까?"

나는 그에게 스피티로 가려고 했다가 주저앉고 말았다며 서툰 영어로 자초지종 설명했다. 그러자 그가 제안을 했다.

"스피티 길은 언제 뚫리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하고 같이 라다크로 가시죠."
"라다크로 가는 길은 열려 있습니까?"
"예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라다크 가는 버스는 자주 있습니까?"
"라다크 가는 버스는 이미 떠났습니다. 내일 오전에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프차를 잡아 놨는데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좋습니다. 당신 가족들과 함께 라다크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주저 없이 라다크로 길을 바꿨다. 4개월 가까운 인도 네팔 여행길에서 수차례 경험했듯이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었다. 세상의 인연은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면 그만큼 내게 선의를 베풀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길이 다가온다. 어제 리왈샤에서 내가 새 바지를 사 입지 않고 그 돈을 식당 꼬마 아이에게 내준 것이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라다크로 떠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나는 티베트 청년의 뒤를 따라가며 불현듯 <티베트 죽음의 서>의 저자 파드마 삼바바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리왈샤에서 내 안의 악한 기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악몽과 함께 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던 옴마니 반메훔 진언. 그리고 리왈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던 라다크. 내게 일어났던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티베트 불교의 최대 법회, 칼라차크라가 열리는 라다크로 나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알 수 없는 기운이 무엇이든 간에 길은 어디에나 있었다. 어디에나 열려 있었다. 어디로 가든 내가 가는 길이 바로 내 길이었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꽉 막혀 있는 목적지를 고집하고 내 앞에 열린 길을 거부하면 그만큼 고통만 뒤따를 뿐이다. 그 길이 어디든 내 앞에 열린 길이 있으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이끄는 그 알 수 없는 기운, 그것은 바로 내 자신,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참나'이기도 했다.

관광도시 마날리의 혼잡한 버스 터미널. 스피티 가는 버스길이 막혀 리왈샤에 사는 티베트 청년 가족과 우연히 만나 라다크로 가기로 결정했다.
 관광도시 마날리의 혼잡한 버스 터미널. 스피티 가는 버스길이 막혀 리왈샤에 사는 티베트 청년 가족과 우연히 만나 라다크로 가기로 결정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태그:#북인도 리왈샤, #칼라차크라, #옷수선, #스피티, #마날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